
중국의 작은 마을에서 아흔 세 살 된 한 할머니의 죽음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아흔세 살
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에 왜, 사람들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 물론 장수를 누린 것도
이유가 되지만, 그 할머니는 스물세 살에 과부가 되어 무려 70년을 혼자서 수절하며 살았기 때
문이라고 한다.
특히 전족을 한 두 발로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이 할머니에 대한 사람들
의 관심을 더욱 부추겼다. 원래 전족은 성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남성에게 묘한 쾌감을 주기 위
해 고안된 성적 장치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평생을 수절하면서 고귀하게 사신 할머니
에게 전족의 발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남성에게 강요된 성적 장치를 평생지
킴으로서 자신의 정절 역시 지켜진다고 생각한 할머니의 보수적인 사고방식은 아니었을까?
이혼과 불륜이 흔한 연예의 화제 거리가 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현대 여성이 할머니를 바라보
노라면 아마 이해가 되지 않을 법도 하다.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문화에서의 정조야 말로 유교가 여성에게 가장 강요한 으뜸의 덕목이었
다. 중국의 에로틱 문화 속에서도 정절이란 또 다른 문화가 여성들의 목을 죄어 왔던 것이다.
원래 정조를 최초로 강요한 장본인은 바로 중국을 통일한 최고의 진시황제였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전국을 순찰하면서 비석을 세우고 바위에 공적을 새기게 했는데, 그 가운데 여성
의 정절에 대해 상당히 많은 언급을 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국토 통일의 위업을 성취하면서 정절을 국가의 대의로 내세운 것은 당시의 문란
한 성 풍속으로 인해 남녀 관계가 음탕하게 변하면서 나라 전체를 휩쓸었기 때문이라고 전한
다.
송나라와 명나라, 청나라를 거처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정조관념은 상류 계층은 물론이
요, 백성들 사이에도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덕택에 고대 문헌 속에는 수없이 많은 절부열녀가 등장하고 그에 관한 일화들이 주옥같이
펼쳐져 있다. 그중 명나라의 ‘우원잡기’를 쓴 왕기의 집에는 여섯 명의 절부가 살고 있었는데
모두 스무 살 남짓에 청춘과부가 되어 죽을 때까지 수절을 했다고 한다. 젊은 과부들은 수십
년 동안 외간남자와 만나기를 피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집 밖을 나가지 않았으면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의 진사 장영녕이 늙어 죽게 되자, 그의 젊은 애첩들만 남겨지게 되었는데 그녀들
은 재가를 하지 않고 밀폐된 가옥에 갇혀 살았으며, 밖에서 밥을 넣어 줄 수 있는 조그만 구멍
으로 겨우 끼니를 해결하면서 살다고 죽었다고 한다.

늙고 권력 있는 한 남자의 성욕을 위해서 젊은 애첩들은 그가 살아있을 때 성적인 욕구를 충족
시켜 주었으며, 그가 곧 병들어 죽게 되자, 죽은 자를 위해 세상과 절연한 상태에서 강요된 정
절과 사랑을 지키며 죽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갖은 고통과 수난, 육체적인 아픔을 견디면서 정
절을 목숨만큼 중히 여긴 여자들의 정절이 죽은 자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었을까?
정조는 중요한 덕목이지만 한 남자에 의해 여러 젊은 여자들이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가야 하
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남자의 팽창된 성욕 아래 여자들은 희생물이 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런 정절과 열녀비의 이면에는 재가와 불륜의 진실이 베일에 가려
져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부정 역시 종이 한 장의 차이로 중국 문화사 중심
에서 늘 함께 했었다.
송나라 이전의 중국에서는 과부들이 수절을 하는 것은 소수에 불과했고, 남편이 죽은 뒤 개가
하는 여인들이 오히려 더 많았다고 한다. 이것은 왕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문제의 어머니
박 태후와 한경제의 왕후가 수절은커녕 재가한 것으로 유명하다. 진혜제의 황후 양씨는 재가
하여 조나라의 왕에게 시집을 갔고, 오대의 조 태조는 네 번이나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모두 재
가한 여성들이었다고 한다. 당나라 초기와 중기에도 아흔여덟 명의 공주 가운데 스물일곱 명
이 개가를 했다. 이렇게 송나라 이전에는 상당히 개방적이었지만 송나라의 엄격한 성리학은
여성들에게 굶어죽는 것보다 정조를 잃은 것이 더 중요하다는 위선적인 윤리를 내세워 여자들
만 힘들게 정조를 지켜야만 하는 불공평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사실은 성리학의 창시자 중 한사람인 도학자 정이의 외 조카와 조카며느리
도 서슴없이 재혼을 했다고 하니 위선자에 대한 더 없는 풍자이자, 거센 도전은 아니었을까?
이후 청나라에서는 가혹한 부녀 정절의 정책 아래 수많은 정녀와 열녀가 탄생했고, 정절패와
열녀비가 방방곡곡에 세워지면서 수절과 정절은 여자의 덕목이 되었지만 그 반면, 재혼도 다
반사였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 정절이니 수절이니 하는 것은 동전 뒤집기
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수절이나 정절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불륜만큼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
다. 어쩌면 철저하게 고립된 여성들의 정조관념과 성적 억압이 이제 와서 봇물처럼 터지는 것
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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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성과 아름다운 사랑> -LJ 비뇨기과-엘제이비뇨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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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
광고성 글이지만,
재밌는게 많아서, 가끔 보는데,
정말 이상한 인간의 역사다.
70년 동안 정절 지켰다는 남자과부 는 없는...
( 있다면 0.0000001 % 것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