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칸 리더십 전문가와 강의 및 토론 기회
몽골 대초원(사진출처 : JR의 유목민 이야기)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탓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 친구도 없고, 병사로는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00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빰에 화살을 맞고도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칭기스칸이 되었다.
몽골과 러시아 바이칼지역을 전문으로 하는 (주)대통투어(대표 문동일)가 올 여름 청소년을 대상으로 를 연다. 프로그램은 몽골 국제승마학교에 입소하여 몽골 과학아카데미 칭기스칸 리더십 전문가인 권오문 박사의 강의와 토론을 통해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탄생시킨 칭기스칸의 탁월한 리더십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국제승마학교의 승마 프로그램에 따라 칭기스칸 승마법을 익히고 몽골의 아름다운 산과 강, 초원에서 펼치는 승마 트레킹, 몽골 유목민 생활체험, 몽골 전통공연, 칭기스칸 800주년을 맞아 웅장한 스케일의 칭기스칸 기마대 재현 관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리더십을 함양하고 호연지기를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4박 5일 일정으로 진행되며 참가비는 청소년 99만 원. 10인 이상 단체 예약 시 6% 할인 혜택도 주어진다.
문의전화는 02-739-1120, 1121(대통투어 문화팀), 홈페이지는ww.missbaikal.com이다.
칭기스칸 리더십 캠프 강사진 약력
권오문 박사
-현 몽골 과학아케데미 칭기스칸 리더쉽박사
-국제대하교 MIU 부총장, 몽골 대외협력 행정 부총장
-국제환경연합 몽골, 시베리아 디렉터
-몽골 현지 13년째 거주
이상규박사
-현 몽골 후레 정보통신대학 부총장
-전 건국대학장, 국방대학 연구원
-칭기스칸 리더쉽 연구가
간의내용 요지
-테무진의 유년기를 통한 리더십
-테무진의 청년기를 통한 리더십
-유목민의 특성
-유목민의 교육법
-여성의 리더십
-칭기스칸 가정 배경사를 통한 리더십 개발
-칭기스칸 사회적 배경사를 통한 리더십 개발
-칭기스칸 정치, 군사적 배경사를 통한 리더십 개발
칭기스칸 푸른군대의 정복 전쟁이 성공한 이유
목축과 사냥으로 살아가던 가난한, 그것도 얼마 되지 않은 수의 군사를 가진 유목민들이 어떻게 무한한 인적자원을 가진 강력한 문명국가를 짓밟고 초토화 시킬 수 있을 을까?
1. 전투는 생활
사냥은 유목민들에게 식량과 모피를 제공해 주는 경제활동의 하나였다.
표범이나, 늑대, 곰 같은 사나운 짐승을 사냥하는 데는 용맹성과 기동력, 그리고 전투력뿐만 아니라 상황을 정확히 읽어내는 판단력과 함께 무엇보다 서로 간에 손발이 제대로 맞는 협동심이 필요했다. 칭기스칸의 푸른군대는 바로 이 사냥을 통해 군사훈련을 생활화 하면서 최강의 군대로 태어날 수 있었다.
칭기스칸은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세계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많은 시간을 병사들과 사냥을 하면서 보냈다. 칸의 주도아래 라고 부르는 대규모 사냥은 그 자체가 전투나 마찬가지였다. 대규모 사냥은 상대가 사람에게서 짐승으로 바뀌었을 뿐 모든 것이 실제 전투 그대로였다. 사냥 과정에서의 규율도 전투 때의 군율과 마찬가지로 엄격히 적용되었다.
사냥은 부족 간 또는 씨족 간 단결과 협력을 이끌어 내는 좋은 수단이었다. 띄엄띄엄 떨어져 사는 유목민들이 대규모 사냥을 할 때는 몇 개의 씨족이 연합해야 가능하고, 반드시 지도자를 선출해 그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2. 속도가 경쟁력
유목민들은 말에서 태어나 말에서 죽는다. 바로 이 기동성이 세계를 정복했던 푸른군대의 한 축이였다. 푸른군대는 하루에 200~300km를 이동하는 기동력을 과시했다. 기마술과 마상 무예는 기마 유목민족에세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그 출발은 최초의 기마 유목민인 스키타이(기원전 7~3세기)로 시작된다. BC 524년 페르시아 제국이 스카타이 원정에 나섰을 때,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한 차례 공격을 퍼붓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스키타이 기마대에게 무려 8만 명에 이르는 병사가 전사하고 페르시아 군은 서둘러 퇴각했다.
스키타이가 물려준 놀란 만한 기마 전술과 전법은 흉노와 돌궐, 몽골 등 초원의 지배자들에게 이어지면서 보완되고 다듬어져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중세 몽골 제국을 여행했던 마르코폴로가 묘사한 모골 병사들의 전투장면을 보면 “그들은 적을 추격할 때는 물론 퇴각 시에도 적을 물리친다. 그들은 퇴각 시에도 적과 상면해 싸우는 것과 같이 완강히 저항한다. 등을 돌려 적을 향해 많은 화살을 퍼붓기 때문에 싸울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적을 사살한다”
-가벼우면 빠르다.
무기와, 1년 치 휴대용 양식을 다 합쳐도 푸른군대의 병사 1인당 군장은 50kg을 넘지 않았다. 당시 유럽 병사들의 군장은 통상 70Kg을 넘었다. 또한 보르츠(소고기, 양고기를 말려 가루를 낸 것)를 소의 오줌보 안에 넣어 다니면서, 물에 두세 스푼 넣고 2~3분 끊이면 훌륭한 영양식이 되었다.
-중세의 인터넷
칭기스칸을 지난 1,000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은 미국 워싱턴포스트 지는 중세 몽골의 통신 체계인 역참제를 이렇게 평가했다.
역참제 역시 유목민들의 생활습관을 활용해 이를 제도화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칭기스칸은 통치지역이 넓어지고 전쟁이 잦아지면서 바로 유목민의 전통적인 통신방법을 제도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도입된 것이 역참제였다. 그들은 인터넷이 발명되기 700년 전에 전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개척해 놓았다. 칭기스칸은 사람과 기술을 이동시켜 세계를 좁게 만든 인물이다.
3. 근본을 바꾼 개혁
-경쟁과 능력의 보장
1203년, 케레이트부를 멸망시킨 칭기스칸은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칭기스칸은 과거 몽골 초원을 장악했던 흉노의 군대조직을 참고로 삼았다. 흉노의 군대조직의 특징은 유목국가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십진법 체계이다. 이 십진법을 기본으로 한 흉노의 군대조직은 놀랄 만큼 질서정연한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기본 골격에다 살을 붙여 푸른 군대에 적용함으로써 흉노 이후 최강의 유목민 군대를 만들어 냈는데 그것이 바로 천호제(千戶制)다.
천호제는 기존의 씨족과 부족제도를 파괴하는 바탕위에서 만들어 졌다. 구질서를 파괴하는 대신 종적으로 확고한 연결고리를 지닌 군사 조직체인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천호는 좌익에 6만 2천명, 우익에 3만 8천명이 배치됐고, 나머지는 보층대에 편입됐다. 천호제와 중앙 3분할 체제는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진 조직 체계로 하드웨어 측면에서 우수성을 나나냈다.
그러나 그것을 운영하는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더 큰 위력을 나나냈다.
칭기스칸은 철저히 능력위주로 이 조직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능력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십호장, 백호장, 천호장에 기용됐고,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 조직 안에서 능력 있는 인물로 교체됐다.
목수, 대장장이, 양치기 등 당시 비천한 신분의 인물들이 천호장에 임명됐다. 이 천호제의 또 하나의 특징은 철저히 연대 책임을 물음으로써 조직의 결집력을 극대화 시켰다.
-충성이 최상의 덕목
천호제와 함께 푸른군대의 핵심을 차지한 또 하나의 조직이 케식텐(친위대)이다. 칭기스칸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친위 집단을 만들었다. 칭기스칸이 이 조직을 만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수많은 부족들이 집단적인 이기주의를 누르고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창출해 내기 위해서였다.
칭기스칸의 의도는 그대로 적중했다. 케식텐 출범이후 감히 대칸에 대한 도전은 꿈도 꾸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도 케식텐의 존재 때문 이였다.
케식텐에 속하는 친위대원들은 국가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의 정식 구성원이 되었다.
-만장일치의 합의제
쿠릴타이는 지도자를 뽑거나 전쟁 등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열리는 회의체였다. 몽골 종족의 대표들이 모두 참석해 총의를 한곳에 모으고 중대사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쿠릴타이는 대단히 의미 있는 행사였다. 즉 힘을 한곳에 모으고 그것을 어떠한 목표를 향해 모두 쏟아 부을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절차라는 점에서 국가통치의 기반이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 도출된 사안은 일사불란하게 추진될 수 있었으며, 또 쿠릴타이는 단순한 회의체가 아니라 회의가 열리는 동안은 국가 축제 기간이나 마찬가지여서 계속되는 연회와 각종 행사를 통해 몽골인들의 단합을 도모하고 여기에서 집결된 힘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법보다 중요한 약속
칭기스칸의 명령과 지시, 그리고 훈시 등은 문서로 기록돼 책으로 묶어졌다. 이것이 바로라고 불리는 칭기스칸의 법령집이다.
“전투에 태만한 병사와 짐승을 놓친 자는 태형에 처한다.
종군하는 부녀자는 남편이 싸움에서 물러났을 때는 남편을 대신해 의무를 다해야 한다. 자격이 없는 천호장, 백호장, 십호장은 그 안에서 갈아 치워야한다. 사냥에 나가면 짐승을 많이 죽여야 하고, 전쟁에 나가면 사람을 많이 죽여야 한다”
의 내용을 보면 칭기스칸은 대부분의 경우 유목민 사회에서 내려오는 관습법을 적용하고, 전체적인 평화와 질서를 파괴할 염려가 있는 경우에만 새로운 법에 따라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4. 열린 마음
-머무는 곳이 고향
새로운 것을 찾아 끊임없이 옮겨 다니며 살아야 하는 유목민들은 낯선 곳,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다. 자리를 잡으면 고향이고, 그곳에서 만하는 사람이 이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항상 열려있다.
푸른군대가 초원을 넘어 거침없이 원정길에 오를 수 있었던 힘과,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쉽게 만드는 탁월한 능럭은 이렇게 열린 마음 때문이다.
-차별 없는 종교
칭기스칸은 에 이렇게 언급했다.
“모든 종교는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며 어느 종교도 다른 종교에 대해 우위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칭기스칸은 차별 없는 종교 정책과 함께 모든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 종교 전쟁이라는 위험한 화약고를 피해 나가면서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종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것은 그의 열린 마음이 가져온 열매였다.
-세계를 향해 연 빗장
칭기스칸의 열린 마음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적도 그의 품에 들어오면 푸른군대의 병사가 될 수 있었고 몽골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가져온 것이 다국적군과 다민족 공동체의 탄생이었다.
10만 명 남짓으로 출발한 푸른군대가 20만 명, 30만 명으로 고무줄처럼 늘어나 적과 대적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칭기스칸은 사람들의 충고에 귀 기울이고,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칭기스칸이 가진 유연성이었다.
민족과 인종 그리고 종교를 초월하는 칭기스칸의 이러한 정책한 실제로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제국을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이 열린 정책은 몽골 제국 안에서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새 삶을 꽃피울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칭기스칸은 포로로 잡은 이방인들 가운데 기술자를 우대하고 적극 활용했다. 어떤 전쟁에서도 기술자만큼은 절대 죽이지 않았다. 각 분야의 기술자들은 대우를 받은 만큼 기술로 몽골제국에 기여했다.
5. 인간 칭기스칸
-소박하고 검소한 군주
칭기스칸의 푸른군대가 성공적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세계제국을 효율적으로 경영할 수 있었던 요인들은 바로 인간 칭기스칸이 선택한 것들이다.
그러한 선택은 칭기스칸이 지니고 있는 성격과 기질, 생활태도 그리고 기본적인 정서가 그 밑바탕에 있다.
“나는 중국의 지나친 사치에 환멸을 느낀다. 나는 소박함으로 돌아가 한번 더 절제를 모색한다. 나는 황량한 북방에서 태어났고, 양치기와 똑 같은 옷을 입고 음식을 먹는다. 또한 재화도 함께 나눠 갖는다.
나는 백성들을 갖 태어난 아기처럼 생각하고, 병사들은 내 형제처럼 생각한다. 백번의 전투에서 나는 늘 선두에 섰다. 7년간 나는 큰일을 해냈다.”
-칭기스칸이 참모이며 한인이였던 장춘인에게 보낸 편지 구절-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태도, 그것은 칭기스칸이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견지해 온 것이다. 자신이 말한 대로 칭기스칸은 세계의 군주자리에 오른 뒤에도 병사들이나 백성들과 거의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잠자리에 들었다. 이러한 생활태도는 조직의 민주화를 이루는 출발점이 되었다.
아래 사람에게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면 칭기스칸은 자신을 자유스럽게 부르도록 했는데 이러한 조치는 군주와 아래 사람 간의 자유로운 대화를 가능하게 만들어 각 사안마다 많은 사람의 의견이 집약된 효과적인 결론을 돌출할 수 있었다.
칭기스칸의 성격 가운데 또 하난 두드러진 면은 친화력이다. 이 친화력은 주위에 사람을 모이게 하는 큰 요인이 됐다. 이 친화력의 밑바다에는 사람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 평등의식이 깔려있다. 이러한 친화력을 가진 칭기스칸은 일단 자신의 품으로 들어온 사람은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공정한 분배
푸른군대의 전투과정에서 큰 힘을 발휘한 것은 전리품의 공정한 분배였다.
병사에서부터 장수, 심지어 칭기스칸에 이르기까지 별 차이가 없는 공정한 분배는 서로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조직은 그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는 재화의 공정한 분배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칭기스칸의 생활태도가 만들어 낸 최대의 무기이다.
-정보가 최상의 무기
지피지기 백전백승
칭기스칸은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손자병법의 원리를 최대한 활용한 정보전, 심리전, 홍보전의 대가였다. 정보를 중요시 하고 이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활용함으로써 선택의 갈림길에서 항상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적을 알고 적은 나를 모르니 싸움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적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은 말한 나위가 없다.”
칭기스칸은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공포라는 초대한 무기를 활용함으로써 전투 없이 승리하는 사례가 많았다.
항상 주변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고 상대방의 심리 상태를 최대한 활용한 칭기스칸의 정보 마인드에 대해 몽골의 원로학자 이시잠치 교수는 칭기스칸만이 지닐 수 있었던 기술이자 예술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기 타
-2006년은 칭기스칸 800주년의 해
1206년 봄, 몽골을 제패한 칭기스칸은 오논강 하류에서 몽골 전 부족이 참여한 가운데 가 열리고 테무진은 몽골 최고의 샤먼 텝탱그리로부터 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칭기스칸은 이 자리에서 대몽골 탄생을 선언했다.
2006년 칭기스칸 800주년을 맞아 몽골에서는 몽골 정부가 주최하는 많은 행사들이 개최될 예정이다. 그 중 몽골초원에서 가 웅대한 스케일로 재현되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유목민의 특성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이동하며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개척해 나가는 일, 즉 끝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유목민 마인드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자료제공 : 대통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