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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 태종 때 언관(言官) 위징(魏徵)

이양자 |2007.01.18 00:33
조회 27 |추천 0


 

                                                  

                                 언관(言官)

 

 

당(唐)의 최고 흥성기를 이끌었던 태종에게는 무서운 직언자가 있었다.

비수와 같은 날카로운 간언이 지속되다 그가 물러나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당 태종은 "저 늙은이를 죽여 버릴 테다"며 고함을 지를 정도였다.



그의 이름은 위징(魏徵). 당대를 통틀어 황제에게 가장 강력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충신이었다. 어느 날 태종은 귀한 새매를 얻는다.

멋진 매가 귀여워 이를 어루만지던 태종은 "위징이 곧 도착합니다"라는 전언을 듣는다. 정사에 열중하지 않는다는 꾸중을 들을까 두려워 태종은 매를 품속에 급히 감춘다.



위징이 얼른 물러가기를 바랐던 태종의 기대는 사그라졌다. 품속에 감춘 매를 눈치 챈 위징이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위징은 아울러 옛 군주들이 자신의 기호에 탐닉하다가 정사를 그르친 일을 천천히 열거했다.

그가 물러난 뒤에 매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품속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곡절에도 불구하고 태종의 위징에 대한 애정은 깊었다. 그가 죽었을 때 황제가 그의 빈소를 직접 찾고 "구리로 만든 거울로는 의관이 흐트러진 것을 고치고…옛 역사를 거울 삼아 가히 흥망과 교체를 알았으며, 사람의 거울로는 나의 득실을 밝혔으며  항상 짐은 이 세개의 거울을 가지고 있어서  나의 잘못을 방지할 수 있었는데..  이제 위징이 죽어 큰 거울 하나를 잃었다"(以銅爲鏡  可以正衣冠,  以古爲鏡  可以知興替. 以人爲鏡  可以明得失, 朕常保此三鏡   以防己過, 今徵阻逝  遂亡一鏡矣)고 한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위징이 죽은 뒤에 태종은 고구려 등을 향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한다. 그 좋던 당 왕실은 이를 계기로 일차 쇠퇴의 길로 향한다. 위징이 죽어서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태종에게 직언을 그만큼 할 인물도 없었던 게 사실이다.



군주의 권한이 말할 수 없이 컸던 왕조 시대에도 언관(言官)의 역할은 대단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고려와 조선 때에는 대간(臺諫)을 두고 국왕에 대해 간언토록 했다.

왕이 펼치는 정책에 대해 그 득실을 논하고 각 관료 기구의 과실을 논하거나 탄핵까지 하는 언론기관이었던 셈이다.



독주하는 왕권이 이 언관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을 때 국정은 독선으로 흐르기 쉬웠다. 마찬가지로 관료사회의 부정부패 등에 언관이 제대로 개입하지 못할 경우 국정의 폐해는 그대로 백성에게 옮겨졌다.

요즘 한국의 언론인들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담합이나 하는" 식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것도 국정 최고권자인 대통령에 의해서 말이다.



곁에서 옳은 말 잘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사람도 살고 나라도 좋아진다. 자명한 이치인데도 대통령의 시비는 끊이지 않는다. '소임은 막중하고 갈 길은 먼데(任重道遠)' 말이다.



유광종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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