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자 최재천 교수가 [통섭(統攝))]이라는 이름의 괴생명체를 소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울산의 한 대기업(아마 현대 자동차겠지)에 가서 ‘노사문제 해법’에 대한 강연 때 통섭이를 부른다고 하던데, 생물학자가 노사문제 해법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도대체 통섭이가 얼마나 무서운 놈이길래... 지가 무슨 곶감이라도 되는가? 일단은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사실이다.
최 교수는 얼마전 교육방송에서 6개월간 강의한 강연록을 정리하여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궁리)이라는 책을 냈다고 하는데 아마 통섭이라는 놈도 그 책 속에 소개되는가 보다. 그의 책은 ‘개미들은 어떻게 말하나’, ‘꿀벌들의 춤 언어’, ‘냄새로 말하는 동물들’처럼 동물과 곤충의 행동을 사람의 행동과 비교하여 설명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행동과 게임이론’, ‘최적화 이론’ 같은 어려운 과학이론도 등장한다고 하니 쉬운 책만은 아닌 듯하다.
“쉽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지만 내용은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과학이 쉬운 것은 아니죠. 저는 ‘과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과학화’를 하고자 했어요.” 저자의 인터뷰가 그놈의 책과 친해보려는 마음에 걸림돌이 되고 통섭이라는 놈과도 거리감을 두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자연에는 수억 년 동안 검증된 성공한 아이디어가 널려 있습니다. 개미의 조직사회를 연구하면 인간 조직사회의 노사문제를 푸는 방법이 있을 수 있어요.”라는 저자의 말이 그 책 속에 길은 아니라도 의미심장한 무엇이 있어 보이게 만든다.
이쯤해서 통섭이를 등장시키지 않으면 나 몰매 맞겠지. 그러니까 통섭이 걔는 동물도 아니고 더더구나 사람은 아니거든. 뭐랄까, 통섭이란 것은 학제적 연구랄까 뭐 그런 거를 말하는 학술용어라는 거라네요. 자기 전공분야에 다른 학문의 이야기를 잠깐 보태는 다학문적 연구(multidisciplinary approach)를 넘어서 자유롭게 학문의 분야를 넘나드는 학제적 또는 범학문적 연구(interdisciplinary approach or trans-disciplinary approach) 연구의 필요성을 말하는 개념이랍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휴월이 처음 ‘consilience'라는 단어로 표현한 이 개념은 에드워드 윌슨이 그의 사회생물학에서 사용함으로써 지식의 통합 전망을 갖춘 학문의 세계와 지식의 통합 전망을 갖추지 못한 학문 세계를 구별할 수 있는 [학문사적 이정표]가 된 개념이기도 하다. 윌슨의 제자인 최 교수가 책을 번역하면서 이를 ’통섭‘으로 번역했는데, 최 교수에 따르면 “윌슨은 ‘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로 학문의 큰 줄기를 잡고자’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니 그의 consilience에는 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로서 통섭(通涉)과 학문의 큰 줄기로서의 통섭(統攝)의 개념이 모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서도 굳이 후자를 택한 것은 신라시대 승려 의상이 ’화엄종을 통해 한 마음(一心)으로 우주 만물을 통섭하고자 했던 뜻까지 고려한 듯하다. 이로써 학제, 다학문, 범학문 같은 개념들과 차별성도 갖게 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가 협조적 노사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든 예는 다름 아닌 꿀벌사회(개미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임)였다. 꿀벌사회에는 노사분규가 없다. 그건 개미사회에도 마찬가지다. 하긴 뭐 일본 정도의 벌집이나 개미굴을 연상시키는 철저한 천황 중심의 가족화 사회가 노사분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을 보면서 무릎을 치게 된다. 여왕벌이나 개미를 연상시키는 천황, 병정벌이나 개미를 연상시키는 자위대와 경찰, 일벌이나 개미를 연상시키는 근로자에, 기업가나 상인조차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일벌이나 개미 수준을 벗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럴 듯하다고 박수는 칠 수 있지만 꿀벌이나 개미사회에서 뭘 배워서 노사관계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통섭한단 말인가? 여왕벌(개미), 병정벌(개미), 일벌(개미)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고 철저한 분업에 의해 움직이는 꿀벌이나 개미 사회에는 인간사회에 그 흔한 사기꾼류의 정치인도 없고 병정 말고는 쌈박질로 먹고 사는 노조꾼도 없으며, 남을 착취하거나 중간이득을 취하는 기업가나 상인도 없는 것이다. 그저 배울 수 있다면 쓸데없는 족속들 수나 줄이는 정도...
하지만 그것이 통섭이론의 약점이 될 수는 없어 보인다. 최교수가 직접 인용하지 않았지만 동물의 세계에도 인간세계와 비슷한 통섭의 법칙이 많이 존재한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이 동물의 세계만이 아니잖은가? IMF이후 우리나라에서 구조조정을 할 때 적용한 법칙을 보면 알 것이다. 나이든 사람, 여자, 저학력자가 먼저 퇴출당했다. 만약이 인간이 동물답지 않았더라면 IMF사태를 불러온 정계 고위층 공기업, 대기업, 중소기업, 자영업자 순으로, 그리고 자리를 먼저 찾을 가능성이 있는 능력있는 남자부터 여자로, 고학력자부터 저학력자로, 젊은 층부터 고령자로 정리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긴팔원숭이나 말벌 등 동물들의 의사소통 메커니즘이 IT제품 등 산업기술에 접목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산업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흙탕물에 살면서도 멀리 있는 먹잇감을 잡아먹는 가물치의 특성을 연구하면 새로운 개념의 비행기 조종사용 고글 안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제까지는 ‘생물학’이 별개로 존재했지만 최근의 경향은 ‘통합생물학’이라는 큰 틀을 통해 인문사회학문까지 담을 수 있는 생물학으로 변모하는 중”이라고 최 교수는 말한다. 생명이 영위되는 것은 워낙 복잡한 현상이라 여러 분야가 한 데 모여 동시에 통섭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인데, 생물학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에서 ‘통섭’을 이루기 위한 추세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는 것이다.
1905년 고전 역학과 양자역학 사이에 다리를 놓아 ‘통합 물리학’의 기틀을 마련했던 아인슈타인 이래, 이미 살펴본 윌슨의 사회생물학(sociobiology)’, 그리고 최근에 물리학 이론들을 사회과학에 접목시키고 있는 프랙탈 이론, 불혹실성이론, 복잡계 이론들이 이러한 통섭적 접근법이다.
분명 통섭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사회현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어느 한 분야의 분절된 학문으로 치유할 수 없는 현상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지식의 대통합’ 혹은 ‘학문과 현실의 대통합’이 요구되고 있다. “20세기는 학문을 쪼개는 분과학문의 시대였지만 21세기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같이 하지 않으면 제대로 학문을 할 수 없는 시대다. 인간이 구분한 학문분과에 상관없이 돌아다니는 진리의 행보를 자연스럽게 따라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통섭은 평화의 시기보다는 환난의 시기에 더욱 빛을 발하는 학문 연구 방법이다. 평화의 시기에 지식의 탐구와 축적은 그저 유희일 수 있으며, 지적 사치와 안분지족을 용인받은 일종의 예비군일 수 있다. 그러나 환난은 인간에게 성찰을 요구하며, 특히 지식인에게는 더욱 뼈아픈 실존의 질문을 던진다. 태평성대에 예비군이었던 지식인은 그때 스스로 준비해온 무엇인가를 내놓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통섭이 던지는 문제제기는 심오하고 원대하며 아울러 절박하다.
IMF라는 경제사회적 환난이 닥쳤을 때 우리 사회에도 자기비판과 성찰이 없었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자기만을 위해 쓰여졌을 뿐 고통받는 누군가를 위해 예비군으로서 투입되지 못했다. 이제 IMF보다 더 큰 시련의 이 시기에 지식 예비군들이 어떤 자세로 사회를 향해 준비된 것을 내놓을 것인가? 통섭은 그것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통섭은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며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며 끊임없이 지식인을 압박하는 괴생명체인 것이다. 통섭이가 요구하는 것은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대학은 어설픈 교양, 비전공생을 위한 엉거주춤한 개론이 아니라 멀티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튼실한 인문학과 자연과학 모두를 가르쳐야 한다. 대학생은 단순히 다른 학문을 ‘교양과목’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수학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히딩크가 한국축구를 세계 4강에 올려놓은 것이 멀티 플레이어를 통한 것이라는 것을 어찌 모르겠냐마는, 386컴퓨터로 멀티태스킹을 하려니 자꾸 버벅대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