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 중에서
그러나 철학은 정체되어 있는가? 과학이 항상 진보하는 것으로 보이는 데 비해 철학은 항상 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이 과학적 방법에는 아직 열려 있지 않은 문제들을 다루는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떠맡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선과 악, 미와 추, 질서와 자유, 삶과 죽음 등의 문제 같은 말이다. 어떤 탐구 분야가 정밀한 공식화가 가능한 지식을 산출하면 그것은 과학이라고 일컬어진다. 모든 과학은 철학으로 시작하여 기술로 끝나고 가설로 시작하여 성취로 흘러들어간다. 철학은 미지의 것에 대한 가설적 해석(형이상학에서처럼) 또는 덜 엄밀하게 알려진 것에 대한 가설적 해석(윤리학이나 정치철학에서처럼)이다. 그것은 진리를 공략하는 데 있어서 전방의 참호 역할을 한다. 과학은 점령된 영토이고, 그 후방에는 지식과 기술이 우리의 불완전하고 경이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안전한 영토가 있다. 철학은 당황하여 멈춰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이 승리의 열매를 그의 딸인 과학에게 넘겨주고 신성한 불만족스러움을 지닌 채 불확실하고 탐구되지 않은 곳으로 전진하기 때문이다.
블레즈 파스칼 <명상록>중에서
자기애와 자기 도취의 본질은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자기 자신)이 결함과 결여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막을 수 없으니. 그는 위대하기를 원하지만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완벽하기를 바라지만 자기 자신이 결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스스로 비참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지만, 결함으로 인해 사람들의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이 처해 있는 이 곤혹스러움은 그에게서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의하고 범죄적인 격정을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비난하고 결점을 확신시키는 이 진실에 대해 치명적인 반감을 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진실을 없애고자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것을 파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사람의 (그 진실에 대한) 앎을 가능한 데까지 없애고자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스스로의 결함을 숨기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인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지적해주거나 아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이란 영원한 환각이다. 인간은 서로를 속이고 서로에게 아첨한다. 누구도 우리가 없을 때 우리에 대해 말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가 있을 때 말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는 상호기만에 기초해 있다. 진지하게 증오감 없이 이야기한다 해도 친구가 그의 부재중에 무엇을 말하는지를 안다면 지속될 수 있는 우정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가장이나 거짓이나 위선이다. 누구라도 자신에게 진실을 들려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도 꺼린다. 그리고 정의와 이성으로부터 그리도 먼 모든 이러한 기질들은 인간의 마음에 본래부터 뿌리 박혀 있던 것이다.
존 스톡폴드의 <공산주의>중에서
이처럼 빈번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주제에 대해 강의를 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약간의 불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날씨와 정반대로 공산주의와 관련한 상황은, 모든 사람이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행하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말하자면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보통은 정치적 경연장은 특정 영역에서의 목적이나, 특정한 공산주의 기구의 성취 또는 실패에 관해서만 말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목적과 기구에 대해 공산주의가 조성하는 위협을 끊임없이 말한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그 기초가 되는 원칙이나 그 원칙 자체가, 그러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위협이라기보다는 약속으로 여겨지는 세계관으로 어떻게 조직되어 가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하지 않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공산주의를 정치적 프로그램이나 체제가 아닌 철학으로 논의하기 원한다.
공산주의가 이러한 측면에서 별로 논의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넓게 퍼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더 잘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더욱더 용서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안다고 확신한다. 공산주의를 더 많이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가진 가치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런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조사하는 것도 역시 두려워한다. 그들은 그러한 조사에 착수하는 모든 사람은 단지 부고장을 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해-이해되고 있는 거이 무엇이든-는 수용이나 거부의 어느 한 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히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더욱 합리적인 기초를 제공한다.
공산주의 철학에 대한 가장 보편적 오해 중 하나는 '유물론'을 의미론적으로 잘못 해석해서 생깁니다. 유물론이라는 말에서 보통 사람들은 '물질주의'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언론이나 교단에서도 보통 그런 의미로 쓰지요.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공산주의는 절대 유물론적(물질주의적)이지 ㅇ낳습니다. 또한 이렇게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유물론이야말로 사람들에게 가장 호소력 있는 부분인데, 이는 완전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지요. 즉 사람들은 유물론을 다음과 같이 오해합니다. 행복은 잘 먹는 데(위장)에 있다, 생리적인 견지에서 정의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물질적인 것들을 획득하는 것에 의해 측정된다 등등. 이에 대해 저자는 그것은 '도덕적 물질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을 '무신론자'에다 '물질주의자'로 취급하여 가혹하게 비난하게 만든 동기입니다. 사실상 유물론이 의미하는 것은, 세계의실체(world substance)가 물질이라는 것이지, 가치의 판단(value-judgment)이 물질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사 전체를 통해 유물론이 욕먹는 이유는 도덕적 물질주의로 오해되었기 때문이지요.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중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한때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다"라고 썼는데, 그것이 실존주의의 출발점이 된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말이지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고 그 결과 인간은 외로움에 처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내면이나 외부에서 의존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변명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주어진 특정한 인간 본성에 비추어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 결정론(determinism)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고 또 자유 그 자체인 것이다(man is free, man is freedom). 하지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행동을 합법화해줄 수 있는 가설이나 명령을 전혀 제공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치의 빛나는 세계속에서 우리 뒤에서든 앞에서든 정당화나 해명의 수단을 가지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는 내 말의 의미인 것이다. 저주받았다는 것은 그가 자신을 창조한 것도 아니면서 자유에 직면해 있고 이 세상에 던져진 순간부터 자신이 하는 모든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
"인간이란 그가 목적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실현시키는 한 존재하며, 따라서 인간이란 자기 행동의 총체 이상도 아니며, 그의 생애 이상도 아니다." (...)
당신이 비겁자로 태어났다면 당신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당신은 그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당신이 무엇을 하건간에 평생동안 비겁자로 살 것이다. 또한 당신이 영웅으로 태어났다면 당신이 다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당신은 평생 동안 영웅으로 살 것이다. 영웅적으로 먹고 마시면서. 반면에 실존주의자는, 비겁자는 자신을 비겁자로 만들고 영웅은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며, 비겁자가 비겁함을 거부하거나 영웅이 스스로 영웅으로 살기를 멈출 가능서은 언제나 존재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참여(commitment)이고 당신이 총체적으로 참여적인 것인 개별적인 행동이나 상황에 의해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