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 방배추씨:민족 깡패 ? 난 자유인이야
"난 상품가치 없는 사람이오. 생각 없시다." 방배추(71·본명 방동규·方東圭)씨는 인터뷰 요청 전화에 딱지부터 놓았다. 뜻밖이다.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이자 민족 깡패"(소설가 황석영의 말), 따라서 살아온 내력이 소설인 사람이 그다. 최근 영화화를 검토됐다는 말도 들린다. 마음 단단히 먹고 다음날 다시 전화했다. 그의 후배들을 동원해 물밑작업을 마친 뒤다. 오전 11시 전화가 좋다는 정보도 얻었다. 젊은이 뺨친다는 이 `할아버지 협객`이 한참 기분 좋을 때가 그때란다. 1백50㎏짜리 벤치프레스와 씨름하며 땀을 뺀 직후 말이다. 해서 결국 오케이 사인은 떨어졌는데, 다시 놀랐다. 문화동네 사정에 뜨르르했기 때문이다. "인사동에서 김정헌 개인전이 있어요. 민중화가 알죠? 가나아트에서 만납시다." 10분 전에 들어선 약속장소에서 노인 협객은 금세 눈에 띄었다. 청바지 차림의 캐주얼한 스타일. 그는 노인네가 아니었다. 신장이 173㎝라는데 깨끗한 이목구비에 눈빛까지가 오래 기억에 남을 정도였다. 전시회에서 방배추는 구면인 시인 신경림, 그리고 `금강`의 민족시인 신동엽의 부인 인병선씨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속으로 "이 분 왕년의 어깨 맞아?" 싶은데 그는 자기 원칙부터 천명했다.
"민족깡패라고요? 그런 과장된 표현은 내 맘에 안들어. 거창한 민족주의나, 말만 달콤한 민주주의 따위의 언어들도 마찬가지요. 또 나는 깡패도 아니요. 완력으로 남 괴롭히는 깡패들은 제대로 된 운동과는 거리가 멀죠. 나는 몸을 그저 단련하는 사람입니다. 스님들 참선과도 같은 이치요. 이해합니까? 따라서 벽돌 몇 장 깨느냐, 누구의 조직이냐는 식의 엉뚱한 소리는 서로 삼갑시다."
-좋습니다. 우선 백기완과의 그 유명한 만남부터 말씀해주시죠. 정치깡패 임화수가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뿌리친 것도요.
"10대 시절인 6·25 직후일겁니다. 경신고에서 역도부를 만들어 건들거리는데, 백기완을 만나보라고 말하는 이들이 주변에 많아. 물어보니 초등학교 중퇴 학력으로 당시 김상돈 서울시장 딸아이의 영어 교습을 맡은 실력파래. 요즘의 독서회인 배달정진학회도 이끌며, 이승만 타도 학생운동도 주도한다고도 하더군. 뭔가 허전하던 차에 관심이 가더군."
-그랬더니요.
"만났는데 바싹 말랐어. 아편쟁이가 따로 없는데 웬걸 목소리만은 우렁우렁해. 첫마디가 이거야. `야 배추, 너 힘 좀 쓴다며?`. 딴에 겸손하게 `한 열명쯤은…` 하고 대답했어. 했더니 다짜고짜 내 뺨을 후려치는거야."
-백선생이 한 살 연하였다면서요?
"그건 나중에 알았지. 어쨌거나 하도 같지않아서 뒤돌아서 나왔어. 문제는 그 다음이야. 그가 툭 던졌던 말이 빙빙 도는거야. `사나이가 힘을 쓰면 3천만 민족을 웃고 울려야 하는 것 아니냐?. 너처럼 형편없는 놈과는 상종 않는다`. 며칠 뒤 찾아갔어.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털어놨지."
-1987년, 1992년 대선 출마한 백기완씨 경호대장을 맡으신 것도 그때 인연이겠네요. 사나이 의리가 반세기입니다.
"그렇지. 하지만 백기완과 나는 좀 달라. 그분은 민족운동·통일운동 쪽이지만, 나는 생리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이야. 또 내가 보기에 그분은 권위주의적이고 고루해. 이를테면 나는 젊은이들이 내 앞에서 담배 피우는거 꺼리지 않아." (촌스런 별명 `배추`답지 않게 열려 있는 대목이다. 배추는 피난 시절 베잠방이에 고무신 차림으로 합동학교를 다닌 그를 `배추장수`같다고 친구들이 놀린 데서 비롯됐다.)
-얼핏 카잔차키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이미지가 생각납니다.
"그렇게 말해주면 영광이지. 사실 걸릴 것 없는 대자유인의 삶이 나는 좋아. 내가 알기에 20세기를 가장 독립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았던 인물은 따로 있어. 유명한 자연주의자 스콧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보리)의 주인공요?
"책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 그 좌파 학자가 학교에서 쫓겨난 뒤 자연 속에서 살아. 한데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뒤 서랍 속에서 증권 뭉치를 발견해. 되팔면 꽤 큰 돈이야. 그런데도 미련없이 증권 뭉치를 불 싸질러버려.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냉소 아닐까? 나야 족탈불급이지."
-1960년대 초 독일에서 광부생활을 3년 한 걸로 압니다.
"자청했지요. 내가 비록 영웅호걸은 못되겠지만, 이 한 몸 굴려 깨끗한 밥을 먹자 이거야. 그때 죽어나간 이들도 좀 있었지만, 나야 뭐 건강하니까. 어쨌던 계약기간 끝내고 세상구경 좀 하자 해서 파리에서 7년간 생활했어. 초창기에는 거지생활 비슷하기도 했고, 어학연수도 좀 받았지."
-파리의 한 홍등가 블록을 분양받아 조직생활을 하신 걸로 압니다.
"그건 괜한 낭설이요. 그 뒤 나이 40줄에 귀국해 명동에 패션점 `살롱 드 방`을 열었어요. 늦결혼도 그때 했고. 장안 마나님들이 고객인데, 백기완·김지하·황석영이 들락거렸어요. 요즘 말로 오트 쿠튀르, 즉 고급 맞춤옷이 8천원 하던 시절 나는 서너배 비싼 초고가 정책을 폈어. 옷장사? 엄청났지. 단 씀씀이가 헤퍼 1년을 못 버티고 문을 닫았어요."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부직포 공장 대표이사직도 맡았잖습니까.
"했지.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직원 3천명이었는데, 부도내고 말았어."
-그 뒤 분당의 헬스클럽에서 강사생활도 하시고…. 자, 이제 묻겠습니다. 당신은 협객입니까? 당신의 그런 삶에 후회는 없습니까?
"내 삶은 모두 실패한 건지도 몰라. 상품가치가 없는 거지. 단 내 원칙에는 충실했어. 협객이라? 그건 당신들이 판단할 문제고." (그런 그는 마음에 불덩이를 안고 산다고 털어놓았다. 지난해 말 여의도 진출하겠다는 후배가 술자리에서 "남은 인생 조국을 위해…" 하는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더란다. 이런 거짓말쟁이 봤나 싶어 잠시 손 좀 봐주자 한 것이 그만 후배 팔뚝을 작신 부러뜨려놓았단다. 그 뒤로 술을 끊었다.)
-아시는 정치인들이 꽤 여럿인 걸로 압니다.
"꽤 되지. 하지만 그들 주변에는 얼씬도 않아. 그게 내 삶의 신조요. 빌붙어 살 필요는 없는 것 아냐?"
아직도 `몸 만들기`를 위해 식이요법을 한다는 방배추. 개성 출신 그의 70평생은 대의에 몸 바친 삶은 아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처럼 현대사 주변을 어슬렁거려온 일생이다. 한 자락 위엄은 그 때문일까? 그런 그는 현재 경기도 의왕에서 보증금 500만원짜리 셋집 생활을 한다. 월 150만원 헬스클럽 강사생활도 그만뒀다. "앞으로는 강원도에서 숯 굽는 일을 할까 해." 인터뷰 끝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미술 공부하는 딸이다. 전시회 함께 보자는 전화였다. 딸과 함께 인사동을 걷는 70세 협객의 뒷 모습, 그 분위기를 당신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