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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헉슬리)

민현식 |2007.02.14 04:07
조회 289 |추천 0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


 

 

[1984]를 읽을 때도 그랬지만, 전반부의 지리한 전개는 나의 독서를 매우 힘들게 했다.
3~4장 읽어 내리고 포기하기를 몇 차례...오늘은 드디어 끝장을 보고 말았다.

 

버나드가 레니나가 야만인 구역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하는 장면부터 본격적인 사건은 시작된다.
그 앞 전반부는 멋진 신세계의 사회 시스템 및 사회화 과정(조건화 반사 교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뤄진다.
이 부분에서는 주로 소장과 포스터의 입을 통해 '멋진 신세계'의 모습을 전한다.

 

그러다가 시선의 중심에 버나드와 레니나가 있게 되고
버나드는 야만인 구역에서 '존'을 문명 세계인 멋진 신세계로 데려 온다.
이때부터 이야기의 중심은 존으로 옮겨가고 작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 나간다.

 

작품의 절정은 버나드, 헬름홀츠, 존이 총통과 마주하는 장면이다.
'총통'은 작가의 말하고자 하는 세상을 공감의 자세로 때로는 반어적 표현과 역설적 태도로 보여준다.

작가 헉슬리는 '총통'의 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펼쳐낸다.
그러기에 '총통'의 이야기는 이 작품의 모든 것이라고 말 할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하고 많은 줄거리들이 단순히 '버나드'를 중심으로한 사건에만 초점이 맞춰진 채 깊이있는 사유가 필요하고 작품의 핵심이기도 한 이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의외였다.)

 

그리고 결말부에서는 '존'의 일상을 통해 문명 세계에서 살아가는 야만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기이한 사회 구조를 보여준다.

 

난 책을 읽으며 많은 부분에 생각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다.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은 기본이거니와,
문명국을 영국으로 배경으로 하며 알파 계급을 전형적인 백인 남성과 여성으로 그린 반면,
야만인 구역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인디언과 혹은 그 혼혈'로 그려진 것에 대해 헉슬리의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백인 중심 주의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거나,
(헉슬리가 20세기 초반의 사람이며, 영국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어쩔수 없는 시각이라고 생각은 하나 염려스런 부분이기도 하다.)

버나드의 인물 유형이 소외 당한 자의 비겁함을 보여주는 전형성을 보여준다거나,
'존'을 갈망하는 '레니나'의 모습을 통해 '존'의 입을 빌려 사랑없는 섹스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거나,
마지막 부분에서 '야만인 존'의 생활이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방불케 하는 장면은 단순히 동물원의 범주를 넘어선 모든 진보한 자의 시각으로 타자를 멸시하는 야만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야만인 존'이 스스로 '야만성'을 유지하려는 장면에서는 고행하는 수도자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조건화 이론'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파블로프의 개'나 '스키너의 심리상자'가 떠올랐다.

 

이 책에서 인상 깊은 단어 중 하나는 아마도 '소마'일 것이다.
'소마'는 인간을 우울과 같은 심리적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행복의 마약'이다.
아마도, 이야기를 이 '소마'로 부터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문명세계의 존은 문명세계의 문제를 깨닫고 사람들에게 소마를 먹지 말라며 그들이 먹어야 할 소마를 모두 버려 버린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외친다. '당신들은 이제 자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건 존의 희망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자유 보다는 소마를 원했다.
이미 조건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조건화 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세 시대에는 '신'에 의해 조건화 되어 있었으며, 현대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에 의해.
조건화를 다르게 표현하면, 사고의 한계이자 가치관의 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이상은 상상할 수도 생각할 수도 넘어설 수도 없으며, 주어지고 채득한 것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본능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아마도 '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막스식의 성찰을 하고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조건화-어렸을 때부터-는 바로 이 '돈'으로부터 시작되고 '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정말 '행복'은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인가?의 문제이다.
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포악한 운명의 돌팔매나 화살을 참을 것인가, 아니면 고난의 바다를 향해 무기를 들고 싸워 그것을 제거할 것인가?....참지도 않고 저항도 하지 않고 다만 돌팔매와 화살을 버리고 있을 따릉입니다.'
힘들고 때론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자아의지가 있어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참 행복인지
아니면 이미 조건화 된 틀 속에서 주어진 환경에서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는 무지의 상태가 참 행복인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난, 이것에 대한 대답을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진실을 아는 것이 '행복'일 수 있다. 때로는 그 '진실'이 가혹하다 할 지라도 그리고 그 진실 가운데 본인의 선택할 영역이 제한 되어 있을 지라도 '무지'나 혹은 '왜곡'속에 존재하는 것 보다는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진실을 어떻게 받아드리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고 그 결정의 결과에 따라서 행복이라는 이름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진실'은 행복으로 가는 길이며 그 길이 누구에게는 험난하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쉬운 성취나 만족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의 눈이 감긴채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것 자체로 불행일 것이다.
(그럼에도, 죽을 때 까지 왜곡된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행복하다고 느낀 다면 그 또한 행복일 것이다. 다만, 이건 죽을 때까지라는 전제가 붙어야먄 할 것이다.)

 

작가 헉슬리도 그 점에 주목하고 있는 듯 하다.

총통의 입을 통해 헉슬리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진실'을 가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철학, 예술, 종교'이기에 [멋진 신세계]에서는 그런 종류의 것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거기에 '과학'도 끼워 넣는다. 이건 역설처럼 보이나 설명을 들어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순수 과학이나 자연 과학이 모두 '진실'을 찾아가는 학문이다. 총통은 순수과학도였다. 그렇기에 그는 '진실'을 찾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진실의 길을 포기한다. 그래서 '과학'도 통제된다고 이야기한다. 오직 조건화 된 사회의 통제를 위해서만 과학이 존재하도록 한 것이다.

 

헉슬리가 이 책의 기본 개념으로 삼고 있는 '포드 기원'은 대량 생산이 진행되는 산업화 시기이다.
물질만능주의나 풍요사회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포드'를 기원으로 한 것은 참으로 기발하다고 할 수 있다.
[멋진 신세계]는 결국 모든 인간은 '물질화, 부품화'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은 물질화나 부품화의 길을 걷지 않았다고 총통은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과학을 통해 진리를 추구했다고 한다.
매우 의미 있는 부분이기에 전문을 그대로 옮기도록 한다.

 

'~그들은 아무 것이나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과학은 무조건 무한히 발달하도록 허용된다고 상상했었던 것 같아. 지식은 최고의 선이고 진리는 최고의 가치였지. 그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이고도 종속적인 개념이었어. 그런데 그 이후로 관념이 바뀌기 시작했던 거야. 포드님께서는 진리와 미로부터 안락과 행복으로 중요성을 옮기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셨지. 대량생산이 이러한 변화를 요구했던 거야. 대중의 보편적인 행복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바퀴를 회전시키는 것이니까 말이야. 반면에 진리와 미는 그렇지 못하지. 물론 대중이 정권을 잡을 때마다 중요시되는 것은 진리와 미보다는 행복이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제한의 과학 연구가 여전히 허용되고 있었지. 사람들은 여전히 진리와 미가최고의 선인것처럼 말하고 있었어. 9년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말이야. 그 전쟁은 인간의 성향을 바꾸어 놓았지. 비탈저 폭한이 여기저기에서 터지고 있는 마당에 진리니 미니 지식이니 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나? 바로 그때부터 과학이 통제당하기 시작했지.'

 

9년 전쟁이 뭘 의미할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아마도 헉슬리는 '2차 세계대전'을 그렇게 본 것 같다.
헉슬리는 2차 세계대전을 목격하며 인간의 과학 발달과 물신 주의에 냉소를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 냉소를 [멋진 신세계]와 같은 작품으로 표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신세계]는 미래 소설이다.
모든 미래소설에는 공통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그런 세상이 올까?'
어쩌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나는 해 본다. 그것은 앞서 우리는 '돈'에 의해 조건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종언'을 말하는 '후쿠야마'의 시각은 적어도 대한민국 사회에는 맞아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사회이 모델'을 말하고 싶어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나라는 너무더 먼 이야기일 듯 싶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 세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자본주의' 이상의 대안이 없다는 믿음만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과학'이 '돈의 노예'가 되는 사회는 결국 '멋진 신세계'가 될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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