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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vre 박물관 설명 N 연혁

정영언 |2007.02.19 02:50
조회 50 |추천 1


루브르는 서구 미술의 상징

루브르 궁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국립 미술관이다. 예술의 도시 파리를 연상할 때면 언제나 그 기본적 상징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창작활동을 업으로 삼는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에게는 일종의 향수마저 느끼게 하는곳이다. 그러나 이같은 루브르의 명성은 예술의 도시 파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왕정과 공화정의 변화무쌍한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도 꿋꿋이 지속된 프랑스의 미술정책이 오늘의 루브르를 이루어낸 것이다. 물론 그 정책의 바탕에는 프랑스 일반 국민들의 미술에 대한 애정이 크게 작용해 왔음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원래 루브르 궁은 중세 이후 많은 프랑스 국왕이 거성으로 삼았던 곳으로서 프랑스 혁명이나 파리코뮌 등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현재는 건물의 대부분이 루브르 미술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으나 그 역사는 1200년에 국왕 필립 오귀스트가 이속에 성채를 축조한 데서 비롯된다. 왕은 여기에 각종 재화와 무기·고문서 등을 수장하였는데, 특히 프랑스와 1세, 루이 13세, 루이 14세가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미술품은 그 중에서도 백미라할 수 있겠다. 프랑스 혁명 4년 뒤인 1793년 국민의회가 그 수장품들을 공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루브르는 정식 미술관으로 발족하게 되었고, 그 후에도 꾸준히 미술품 수집이 계속되어 오늘날과 같은 대(大) 미술관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역사적 변천과정과 더불어 루브르의 소장품도 들고 나는 변동이 있긴 했으나,등록이 완료된 것만 해도 총 20만점이 넘는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엄청난 수집량은 본질적으로 프랑스 절대왕정과 떨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맺고 있다. 당시 프랑스의 지배계급은 고도로 발달된 전제왕정에 힘입어 자국내의 문화 전반을 손쉽게 독점할 수 있었다. 따라서 문화재 및 예술품의 보존능력이 엄청나게 확대되어 유럽 각국은 물론 북아프리카 지방의 예술품까지도 다량으로 획득, 잠재적 문화역량을 풍부하게 한 것이다. 이 잠재역량은 왕정이 붕괴되면서 공화정 및 제정의 여러 격변기를 거쳐 시민생활의 일상적 문화현상으로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결국 그 만개한 예술적 향취를 탐한 유럽제국의 예술가들이 파리를 제 2의 고향으로 삼아 그들의 창작활동을 꽃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루브르가 갖는 의의 또한 새롭게 느껴질 수 있다. 그야말로 근대 서구미술의 상징이요, 고대부터 19세기까지의 유럽과 오리엔트의 선구적 작품들의 총집합인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엄청난 양의 수집품들을 짧은 시간 안에 모두 감상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현장에서 관람할 경우 주요 작품의 소재를 미술관 평면도 등으로 사전에 확인하여 놓은 다음 중점적으로 골라서 감상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물량의 엄청남의 무조건 부러워할 수만은 없는 역사적 비극들을 고려하지 않는 바는 아니겠으나, 예술문화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그같은 유별난 애착은 오늘날 많은 나라로부터 시새움을 받고 있다.

루브르의 연혁

1180∼1223 필립 오귀스트 집정기

1190 - 필립 오귀스트의 후원하에 루브르의 본성(本城)과 방어벽이

현재의 의 남서쪽 모퉁이에 세워짐

1214 - 본성이 왕실의 보물창고, 공문서 보관소, 가구 보관소 감옥 등으로 사용됨.

1364∼1380 샤를르 5세 집정기

1365∼1370 - 샤를르 5세의 후원하에 북쪽과 동쪽으로 성의 확장공사가 실시되어

본성은 완전히 건물들로 둘러싸임. 본성이 때때로 왕의 거처로 사용됨.

1515∼1547 프랑스와 1세 집정기

1527 - 루브르를 왕의 공식적인 거처로 만들기로 결정. 본성은 허물어뜨림.

1546 - 자신의 통치말기에 프랑사와 1세는 피에르 레즈코에게 루브르 재건을 의뢰.

이때부터 17세기 중엽까지 왕의 회화 컬렉션을 퐁텐블로성에 유치.

1547∼1549 앙리 2세 집정기

1547∼1549 - 앙리 2세의 후원 아래 완성. (현재 서쪽익면(翼面)의 남쪽 부분). 장식은 조각가 장 구종이 맡음. 가 현재의 자리에 지어짐.

1559∼1560 - 프랑스와 2세 집정기

1560∼1574 - 샤를르 9세 집정기

1559∼1574 - 현재의 남쪽 부분에서 계속 공사 진행.

1564∼1574 - 카테린느 드 메디치가 필리베르 들로르므에게 파리의 성벽 바깥에 성을 하나 짓도록 의뢰.

(현재 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566 - (지금의 ) 건설공사 시작.

1574∼1589 - 앙리 3세 집정기

1560∼1574 - 앙리 4세 집정기

1595∼1610 - 앙리 4세의 후원으로 공사 시작. 루이 메트조와 자크 앙드루에 뒤 르소 2세가 설계. 새로 생긴 튈르리 성(城)은 와 연결됨.

1610∼1643 - 루이 13세 집정기

1624∼1654 - 이 자크 르메르시에에 의해 설계됨. 이 방이 와 맞붙게 됨에 따라 이 부분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북쪽에도 방이 하나 들어섬.

1641∼1642 - 그랑드 갈르리의 아치형 천정을 헤라클레스의 생애를 나타내는 그림으로 장식해 줄 것을

니콜라 푸생에게 의뢰. 그러나 이 계획은 얼마 후 취소됨.

1643∼1715 루이 14세 집정기

1659∼1665 - 루이 르 보가 의 북익부(北翼部)와 남익부(南翼部) 지음.

1661∼1670 - 르 보가 2층에 있는 가 화재를 당한 이후

을 지음.

1664∼1666 - 르 보와 프랑스와 도르베이가 의 상당부분을 변조, 확장시킴.

1667∼1670 - 루브르 동쪽 정면의 열주 (列柱)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계획된 새 정면부에 의해 가리워짐.

1674 - 1678년부터 1789년까지 베르사이유성이 왕실의 거처가 됨으로써 루브르의 모든 작업은 중단됨.

일종의 미술관으로 조직되면서 왕실의 회화 컬렉션은 루브르와,

바로 붙어있는 로 옮겨짐. 점차 그림들이 왕실의 여러 거처로 분산 소장됨.

1715∼1774 루이 15세 집정기

1725~ - 가 주관하는 공식 전람회가 루브르의 에서 열리고

이때부터 '살롱'이라는 말이 생겨남. 이 살롱들은 1343년까지 존속됨.

1754~ - 자크 앙즈 가브리엘이 3층의 개조작업을 맡음.

1755 - 왕실 컬렉션에 있는 그림들의 일부를 뤽상부르궁전에서 일반에 전시.

1755∼1774 - 와 열주(列柱) 주변의 거주지역 철거.

1774∼1792 루이 16세 집정기

1774 - 앙지비예 백작이 건축감독이 됨. 그랑드 갈르리 안에 미술관을 만들기 위한 계획 착수.

1777 - 그랑드 갈르리를 가득 채웠던 왕궁의 설계도와 모형들이 완전히 일소됨.

1784 - 왕의 컬렉션 관리책임자였던 휴베르 도베르에게 미술관의 구성책임을 맡김.

의 천장에 조명기구 설치. 루이 16세, 튈르리 성에 거처를 정함.

1789 - 프랑스 대혁명 폭발.

1791∼1792 - 혁명 이후 왕실 컬렉션으로 변신. 교회, 수도원, 귀족들로부터 미술품 압수 시작.

새로 생긴 한 미술가협의회가 미술관 개장을 위한 준비작업을 계속 진행.

1793 - 개장. 이 베르사이유 성 안에 세워짐.

1796∼1807 - 나폴레옹 전쟁 중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노획,

약탈한 엄청난 양의 미술작품이 루브르로 유입됨.

1800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튈르리 성으로 이사.

1802∼1815 - 비방 데농이 미술관 감독이던 1803년, 미술관의 이름을 으로 개칭.

1804 - 나폴레옹, 황제로 즉위.

1806 - 튈르리 성으로 통하는 입구에 세움. 페르시에, 퐁텐느가 설계.

1810∼1814 - 리볼리가(街)를 따라 루브르의 북익부(北翼部)가 페르시에와 콩텐느의 설계로 건조됨.

1814∼1824 - 루이 18세 집정기

1815 - 워털루 전쟁 이후 나폴레옹 전쟁 중 노획되었던 적품들이 모두 본국으로 송환됨.

그 대부분이 이탈리아 회화인 약 1백점의 회화만이 남아 현재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음.

1818 - 현존작가들의 작품만을 전시하기 위해 가 생김.

이것은 나중에 으로 변함.

1827 - 남익부(南翼部)에 개장.

1848∼1870 나폴레옹 3세 집정기

1848 - 제 2공화정 정부는 루브르를 과학과 예술에 헌신하는 '인민의 궁전'으로 만들기 를 결정.

복원 및 재장식 작업이 뒤방에 의해 수행됨. 외젠느 들라크르와가 의 천정화를 위뢰받음.

1851 - 새로운 방들이 문을 염.

1852 - 하우스만 남작이 튈르리 성과 루브르 사이에 있는 낡은 거주지역의 철거를 명함.

1852∼1857 - 루이-튈뤼 비스로티와 헥토르 르 퓌엘에 의해 새로운 루브르를 축조.

두개의 궁전이 북쪽에서 여러 건물들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면서 중앙의 과

조우하여 안뜰이 생김. 의 양쪽에 새 익부(翼部)가 건조됨.

1861∼1870 - 르 퓌엘에 의해 과, 그랑드 갈르리의 서쪽 끝부분에

새로 축조됨. 장식은 장-밥티스트 카르포가 담당. 남익부(南翼部)로 통하는

기념비적인 3중 아치가 설치됨.

1871 - 콤뮨시절(3월∼5월) 미술관의 제반업무를 귀스타브 쿠르베, 오노레 도미에,

펠릭스 드라크몽을 포함한 일군의 미술가들이 담당. 튈르리 성은 화재를 만나게 되고,

남은 건물 뼈대는 과 개선문이 개선되는 1883년에야 철거됨.

1895 - 가 재력있는 유력인사들을 중심으로 자치적으로 조직됨.

나중에 가 설립됨.

1895 - 가 조직됨.

1927 - 미술관 책임자 앙리 베르느에 의해 컬렉션 재조직 계획이 시작됨.

그랑드 갈르리의 장식은 휴베르 로베르의 설계도에 따라 진행됨.

1945~ - 전쟁 중 소개(疏開)되었던 작품들이 되돌아오고, 전시실도 다시 문을 열기 시작함.

1953 - 조르쥬 브라크의 "새"가 메리-요셉 블롱들의 작품(1882년)에 대체되어 천정에 설치됨.

1961 - 19세기 미술 갤러리들이 3층에 개장됨.

1969∼71 - 에 있는 전시실들과 가 개장됨.

1971 - 다큐멘터리 전람회가 최초로 시도됨.

1895 - 상속세 대신으로 미술품을 기증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률이 통과됨.

 

 

http://www.louvre.fr/llv/commun/home_flash.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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