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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성훈식 |2007.02.23 02:23
조회 58 |추천 1

읽은 건 몇 개 없지만 알랭드보통 책 중 제일 좋다!! 뒤통수를 계속해서 때려대는 유쾌한 울림.

 

인간은 정말정말정말정말 간사한 동물이다.

 

 

  그러나 프루스트나 호메로스를 오랫동안 접하게 되면, 무섭도록 낯설게 보였던 세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세계와 본질적으로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가 집처럼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곳들의 범위가 넓어지게 된다는 유익함이 생긴다. 이것은 우리가 동물원의 문을 열어, 덫에 걸린 트로이 전쟁이나 포부르 생제르맹의 인물들, 즉 '유리클레이아'나 /텔레마코스'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거나 한번도 우리에게 팩스를 보낸 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근거 없는 편협한 의심을 가지고 다뤘던 인물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연예인등의 유명인사를 친구로 두어본 사람이면 알만한 이야기. 즉, 내가 접하지 않은 세계라고 해서 쫄지 말란 얘기다. 내 세계 또한 비견할 만 하니까, 충분히 아름답고 부러움 살만하니까.

물론, 전제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

 

 

  소설의 가치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것들과 비슷한 정서와 사람들을 표현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의 가치는 그것들을 우리가 묘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빼어나게 묘사할 수 있는 능력, 즉 우리가 명확히 서술할 수는 없었으나 우리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느낌들을 지적해 주는 능력에도 있다.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하기에는  짧은 단어가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을 생각해보라. '너가 그때 거기서 느꼈던 뭉실뭉실한 느낌은 바로 이거야!'  라고 꼭 집어주는 (멋진_) 문인들이 있기에, 영어만큼 삶도 유창해질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은 의식 위에 떠다니는 특정한 물체들을 포착하도록 새로이 조정된 레이더와 같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방에 라디오를 들고 들어온 후에, 조용함이란 오직 특정한 주파수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사실은 처음부터 이 방에 우크라이나의 방송국이나 소형 콜택시 회사의 야간통신에서 나오는 소리의 물결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하늘의 음영, 표정의 변화무쌍함, 친구의 위선, 또는 이전에는 슬퍼할 줄도 몰랐던 어느 상황속에 숨겨진 슬픔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 책은 그 자신만의 발달된 감수성으로 우리를 예민하게 하고 우리의 숨겨진 촉각을 자극하게 할 것이다.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이유는, 들리지 않았던 것을 들을 수 있게 하는 라디오처럼 느끼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ㅡ 내가 구술시험에서 주장한 것 중 하나는(그래서 떨어졌나..?), 경험은 행복의 파이를 키워준다는 이야기. 연애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행복한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파파야 열매에 빨대를 꽃고 한입가득 즙을 빨아 먹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파파야가 주는 행복을 알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셈이다. 즉, 결국은, 파파야를 먹어보고 여자(혹은 남자)에 목매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파파야가 주는 감칠맛, 연애의 기쁨이라는 행복을 누릴 '자격'을 얻는 것이다.

  물론 경험주의의 위험성을 모르는 바 아니니, 여기 한 대화를 첨부하겠다. 시스터액트 (아마 2일꺼다) 에서 어린 소녀의 '수녀님도 사랑을 알아요?' 하는 질문에, 둘째수녀님은 이렇게 답했다.

 "사탕을 먹어봐야지만 그 달콤함을 아니?"

  조금은 어려운 문제.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말고는, 저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존경하는 마르셀 프루스트 선생님, 일부러 어렵게 하지 마시고, 당신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인지 내게 두 줄로 말해주세요."

 

어떤 책들은 어떠한 조건 (나이, 감정의 상태, 연애중, 시간-특히 낮이나 밤이냐) 에 맞추어 읽어야 비로소 그 느낌이 좀 더 잘 다가온다. 어쨌든 중요한건 1900년대 초반에도 두줄요약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

 

"신문 읽기라고 불리는 가증스럽과 음란한 행위는 지난 24시간동안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불행가 재앙들, 5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전투, 살인, 파업, 파산, 화재, 독살, 자살, 이혼, 정치인들과 배우들의 잔인한 감정을, 그런 것들에 신경도 쓰지 않는 우리를 위해 특별히 흥분되고 긴장되는 아침의 오락거리로 변형시키며, 이것은 카페오레 몇 모금과 대단히 잘 어울리게 된다." 라고 프루스트는 썼다.

 

  거봐, 내가 개인적 차원에서 쓴 거랬잖아.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신문을 읽음으로써 파생되는 효과는 정말 제각각인듯 하다. 좀더 관심을 갖게 되어 알아보고 참가하거나, 그것을 알았다는 상태 하나로 뿌듯해 하거나, 혹은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음에 질려버린 나머지 멀리하거나.

그리고 하나 더하면, 신문은 지하철과 매우 잘 어울리는 듯 하다. 행간의 의미는?

 

사물들을 느끼는 것(흔히 그것들을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이 어떤 수준에서는 지식의 습득과 연관되어 있음은 지적할만한 가치가 있다. 삔 발목은 몸무게의 균형에 대해 금방 알려주고, 딸꾹질은 이제까지 알지 못햇던 호흡기의 어떤 문제점을 인식하고 거기에 적응하게 하며, 연인에게 농락당하는 것은 정서적 의존 메커니즘에 대한 완벽한 개론이 된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훨씬 값지다. 단,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자(obsession이래)

 

 

행복할 때 무지한 것은 아마도 그저 정상적인 일일 것이다. 자동차가 잘 움직이고 있는데 그 복잡한 내부 기능에 대해서 배워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헌신을 맹세했는데 인간이 왜 배신하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까닭이 있는가?

 

 

어떠한 반전에 대해 '정말 생각도 못했어!!' 라고 푸념한다면 당신은 정말 행복했었다는 방증. 그럼, 생각지 못한 일을 당하는 것이 나을까, 꾸준히 머리굴려 예상하고 준비하는 것이 나을까? 그 어떤 것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개인별 솔루션은 존재할 듯.

 

 

 

  상투어의 문제는 잘못된 관념을 담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훌륭한 관념들을 피상적으로 조합해 낸다는 데 있다. 해는 해질녘에 불타고 달은 어스레한 빛을 내지만, 우리가 해나 달과 마주칠 때마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이 이 주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첫 번째 말이라기보다는 최종적인 말이라고 결국 믿게 되고 말 것이다. 상투어들은, 한편으로는 단지 피상적으로 스쳐 지나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주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게를 어떻게 묘사하는가는 어떤 수준에선 우리가 그것을 처음에 어떻게 경험하는가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상투어로 말하는 것이 문제라면, 그것은 틀에 박힌 표현들이 포착하거나 알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종류의 비, 달, 햇빛, 감정이 세계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상투어의 사용이란

"현실 자체와는 매우 다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현실 자체로 받아들이는 표현 형태를 통해 우리가 느끼는 바를 나타내는 습관"

이다.

 

언어라는 건 참으로 무섭다.

 

 

어떤 순간에는 삶이 매우 아름답게 보이는데도 삶이 사소한 것처럼 생각되는 까닭은 , 삶의 흔적 그 자체가 아니라 삶에 대해 아무것도 간직하고 있지 않은 매우 다른 이미지들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는 데 있다. ㅡ 때문에 우리는 삶을 멸시하는 것이다.

 

어렵다..여행사진에 찍힌 나를 보고 여행을 추억한다의 느낌?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은 내 가슴에 남았고, 그 가슴은 사진에 담겼으니, 코닥 says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매우 오랫동안, 질베르트의 집에서 차를 마신다는 생각은 모호하고도 비현실적인 꿈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응접실에서 15분을 보낸 후에 모호하고도 비현실적이 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그녀를 알기 전의 기억, 그녀가 그에게 케이크를 잘라주고, 애정으로 대하기 전의 기억이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이 받고 있는 호의의 소중함을 알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는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지 곧 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질베르트가 없었던 때의 삶의 기억은 사라질 것이고 그에 따라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표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질베르트의 미소짓는 표정, 그녀가 대접하는 고급스러운 차, 그리고 그녀의 따뜻한 태도는 결국에는 그의 삶에 매우 익숙한 요소가 될 것이고, 그에 따라 나무, 구름, 또는 전화와 같이 흔한 요소들만큼이나 주목할 이유가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은 참 영악해. 정말 행복은 마음먹기나름 reaaaaaaaally

 

 

 

개인의 매력보다 " 아뇨. 오늘 저녁에는 시간이 없어요." 와 같은 말이 더 빈번히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만약 이러한 대꾸가 마법과 같은 힘을 부린다면, 그것은 노아의 경우에서처럼 무언가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과 무언가를 소유하지 못한 것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고딩땐 이말을 어디선가 듣고 코웃음을 쳤다.

지금은 무릎을 친다.

 

이것은 물리적 소유가 단지 이해의 한 구성요소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원할 때 바로 드레스덴에 갈 수 잇거나 카탈로그를 보고 나서 바로 옷을 살 수 있다는 게 부자의 좋은 점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재산으로 자신의 욕망을 그렇게 빨리 충족시키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 할 수 있다. 그들은 드레스덴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그곳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 탈 수 있고, 옷을 보자마자 그것을 옷장 속에 넣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덜 헤택받은 사람들이 감수해야 하는, 욕망과 기쁨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경험할 기회가 없다. 이러한 시간적 간격은 겉으로는 못마땅한 일이지만, 셀 수 없이 막대한 이득을 준다. 사람들이 드레스덴의 그림들, 모자들, 실내복들, 그리고 오늘 저녁에 시간이 없는 어떤 사람에 대해 알게 하고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시간적 간격의 중요성

빨리끓으면 빨리 식는 이유이기도해.

냄비는 되지 말지어다

 

 

남성 이성애의 경우로 압축해 설명하면, 상황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좀더 자유로운 인간이 되려면, 남성 이성애와 동성애 그리고 여성 이성애와 동성애 이렇게 네 가지로 사랑의 감정을 분류할 수 있어야 할 듯 하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곧 익숙해질테니

 

  프루스트는, 우리가 삶을 해석하는 작업 전체를 쉽게 책에 맡기고픈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은 책들이 우리가 느끼는 어떤 것들을 자각하게 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했다....예를 들면 그들은 위대한 화가가 그린 농촌지방의 한 부분에 특별히 애착을 느끼게 될 것이고, 이것으로 그 화가를 이해했다고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림의 정신과 대조적으로 그림 속의 대상에 집중할 것이다 ㅡ 반면에 프루스트의 미학적 입장의 본질은 "그림의 아름다움은 그 안에 그려진 것들에 달려있지 않다"라는, 언뜻 보기에는 간단하지만 중대한 역설에 담겨있다.

  몽테스키우는 발자크가 소설 "카디냥 대공부인의 부인들"속의 대공부인에게 입혔던 것과 같은 옷을 입은 여자친구를 우연히 보게 되면 감탄할 것이다. 왜 이러한 유형의 즐거움이 우상숭배적이었을까? 몽테스키우의 열정은 그 옷을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발자크의 이름에 대한 존경과 전적으로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우에게는 그 옷을 좋아하게 된 자신만의 이유가 없었고, 발자크의 미학적 시각 원칙을 흡수하지도 않았으며, 이 특수한 대상에 대한 발자크의 이해에 내재하는 일반적인 교훈을 포착하지도 못했다.

  우리가 방문해야 할 것은 일리에 콩브레가 아니다. 프루스트에 대한 참된 경의란 그의 눈을 통해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을 통해서 그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닐 것이다.(짝짝짝짝)

  이것을 잊으면, 우리는 엄청난 슬픔에 빠질 수 있다. 어떤 장소가 흥미로운지 아닌지가 위대한 예술가들이 발견했던 바로 그 장소냐 아니냐에 달려있다고 느낄 때, 수천개의 다른 풍경과 경험의 영역은 흥미롭게 될 가능성을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 (독서를) 학문 분과로 만드는 것은 단지 '자극'에 불과한 것에 너무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독서는 정신적 삶의 문턱 위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정신적 삶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구성은 내가 해. 지금처럼.

 

심지어 가장 훌륭한 책들조차도 결국에는 내팽개쳐야만 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책처럼.

추천수1
반대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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