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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의 추억

권영환 |2007.03.16 13:23
조회 22 |추천 0


(사진은  3 인조 9 인조 조를 짜서 부정 선거에 동원 된 사람들)

 

 

1960 년 3월  15일은  요즈음 모양으로  따뜻하지 않았다 .진눈개비가 날리고 쌀쌀한 바람이  귓전을 때리었다 .

우리 선거사상  길리 기억에 남을 날이 었다 .

왜냐하면  제4대 대통령과 제5 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독선에 빠저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였던 자유당 정권에 염증을 느끼고  이탈된 상태에서 선거를 치루었기 때문이다 .

이승만 정부는 독재와 오만으로  국민들의 삶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장기 집권에만 관심이 있었고 자유당 정권은 오로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슨 방법이라도 동원하여  선거에서 압승을 하여야하는 절박한 초조감을 가지고 있었다 .

권력과 음모로면 무엇이든지 해낼수 있다고 생각 해낸 것이었다 .

그러나그러한 자유당 정권의 계산은  크나 큰 오산이었으니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진리를 훗날 4.19혁명으로 증명되었다 .

3.15부정 선거를 앞두고 내무부장관 (지금의 행자부 장관) 최인규(崔仁圭)는  부하 공무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리었다 .

"모든 공무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 하여야 한다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 있어서는 자유당 입후보가 기필코  당선 되도록  선거운동을 하라 "
공무원들에게 공공연 하게 선거 운동을 하라는 지시였다 .

공무원들은 선거 운동을 못하게 되어 있는것을 묵살 해버리고 내린 명령이었다 .

이같은 훈령은  정계에 큰 물의를 일으키었다.

1959 년 10 월 최인규는 국무회의 6 인위원회의 의결을 거처  각부서별 지방별로 공무원 친목회라 는것을 조직하고 공무원은 물론 일반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공공연히 선거 운동을 지시하였다 .

그는 1959 년 11월까지 전국을 순회하며 선거에 자유당 후보를 당선시키도록 지시 하였다 .

3.15 선거가 가까워지자 최인규는 군수들 까지 선거에 패배하면 사표 받겠다는 사직서를 미리 받아 두었다 .

최인규는 내무부 차관 이성우, 치안 국장 이강학, 지방국장 최병환 으로 하여금  차례로 지방 자치 단체장을 서울로 불러 들여 어떠한 비상 수단을 써서라도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부통령에 당선 시키라고 지시 하였다 .

최인규는 지난  날 신익희후보에 대한 추모 투표로 보아 승산이 없을 것이라는 것에 위기를 느꼈던 것이다 .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투표 전략을  은밀히 지시했다

1. 40% 사전 투표를 해둘것

2.3 인조 9 인조  조를 짜서 투표 하게 하되 감시 조장 을 두고 투표 할때는 자유당 선거 위원에게 보이고 투표 하게 할것

3.야당 참관인을돈으로 매수 할것

등이었다 .

이에 곁들여 치안 국장 이강학은 전국 경찰국장 회의를 열고 소위자유당완장부대를 만들어 투표소 100m밖에  배치하여 야당측 유권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라고 지시하였다 .

또 투표함 수송 도중  투표함을 사전 투표함과 바꿔 치기 할것 . 개표할때 여당과 야당 표를 바꿔 놓기, 또는 표를 바꿔치기 하기 ,개표 완료후 집계표를 조작 하기등  자유당 이승만과 이기붕에게 83%가나오도록 하라는 지시였다 .

이같은 엄청난  음모는 한 하급 공무원인 경찰관에 의하여  사전에 폭로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당과 자유당 정부는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 떼었다.

이런 가운데 1960 년 3월 15일 드디어 일제히 선거가 실시되었다 .

그 결과  총유권자 1100만명 가운데 1050만명이 투표하여 94%라는 투표율을 보였는데 이승만은 88% 이기붕은 78% 로자유당 후보가 압승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

이에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3.15 선거를 불법 선거라고 하면서 선거 무효를 주장하게 되었다.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 알려진 사실로서

1.선거를 앞당겼기 때문에 헌법 정신에 어긋 나는조기 선거 이다

2.야당 인사 등록을 방해했다

3. 유령 유권자를 조작했다 .

4. 공무원들을 조직적으로  이 선거에 개입 시켰다 

6 사전 무더기표 를 투입했다

등 이 밖에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 지적 하고 나섰다 .

이리하여 이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데모를 시작으로 대구 ,부산,광주,등 도처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전국으로 번지었고 부정선거 후유증은 전국이들끓었던것이다

장기 집권에  눈독을 들인 3.15 부정선거는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키었다 .

이제 전국은 반 자유당을  외치고 일어선  민심을 돌이 킬수 없는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

그것은 역사의 엄숙한  심판이었다 .

4.16 민주 혁명의 발단은  이러한 선거 부정에서 부터 출발 하였던것이다 .

1960년 4월 19일은 살아 있는  겨례의 함성이  하늘 높이 울려퍼진 민권 승리의 날이었던것이다 .

대구 ,마산,부산, 광주, 서울, 이렇게  전국적으로  불 붙어 일어 나는 학생 데모로  하루 하루 치열 하면서 "3.15 부정선거 다시하라"라는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

4월 18일 고대 학생 데모대가 자유당 깡패들에게 습격을 당하여 학생들이 피투성이가 되었고  경무대(지금의청와대) 앞에서는 경찰의발포로  수많은 학생들이 쓸어지었다  이무렵  서대문 이기붕 집에서는 수천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어 연좌 데모를 벌리고 "부정선거 다시하라"라고 외쳤다 .

이기붕은 이때 집에서 우울하게 이 광경을 보고있었다  .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내놓겠다" 하야 성명을 10시에 발표하였다 .

이기붕은 앞일이 캄캄하였다 .

그는 26일  새벽  부인 박마리아와  아들 이강욱을 데리고 경무대로 향하였다 .

28일 이승만 박사는 이제 대통령이 아니니  경무대를 떠나  돈암장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

이기붕은 당황 하였다 .

결국 이날 새벽 5시 45분 경무대 26호실에서  자살을 결행 하였던 것이다   무조건 이승만만  따르던 이기붕은 비참하게 저세상으로 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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