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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천년의 사랑1편

권호섭 |2007.03.19 13:10
조회 35 |추천 0

 

천년의 사랑

 

                                                        권민혁(호섭)

Prologue 


서기 881년 중국 장안성 궁궐 내(內), 영혜공주 거처



 석양의 붉은 빛이 둥근 창 격자무늬의 틈을 타고 들어 신비의 문양인양 내실 곳곳을 작정 없이 수놓을 무렵....

 

 이진명은 한 손에 검을 움켜쥔 채 조각처럼 굳어있었다.

 

  누구의 피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검붉은 선혈이, 내실로 스며드는 노을빛과 하나 되어 그의 갑주를 더욱 붉게 했고, 창문틈새로 스며드는 추풍(秋風)은 내실 곳곳에 널린 장식 천들을 속절없이 일렁이게 하였다.

 

 영원히 지속될 듯한 정적.....


 그렇게 이진명과 시간의 흐름이 숨막히는 평행선을 그으며 침묵 속에 정지되어 있을 때, 일순간 그 무게를 짐작케 할 만큼의 요란한 굉음소리와 함께 이진명의 검(劍)이 내실 바닥에 떨어졌다.


 이윽고, 한 여인의 시신앞에 무릎을 꿇은 채, 이진명은 잠시 흐느끼는가 싶더니 점차 그의 슬픔은 비통한 곡성으로 바뀌어갔고....

 

마침내 그는 걷잡을 수 없는 거친 호흡소리와 함께 오열하기 시작했다.


“...안돼....안돼...이럴 수는 없어!! 공주....공주.... 말 좀 해보시오!! 일어나시오.....제발.... 눈을 떠보시오.......공주.... 공주!! 흑흑흑....”

  

수십, 수백 번 영혜공주의 시신을 흔들며 목이 터져라 일어나라 외치고, 자신과 공주의 얼굴을 온통 눈물로 적시며, 내실을 비통한 곡성으로 빈틈없이 채워 보았지만, 이미 숨죽인 그녀의 호흡은 되돌아줄 몰랐고, 터질 듯 오열하는 이진명의 슬픔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를 지켜주었던 그의 검(劍) 벽성검(碧星劍)조차도, 더 이상 그를 슬픔으로부터 지켜주진 못했다.

   

   어느덧 이진명의 곡성이 그치고, 다시 내실엔 정적이 찾아들었다. 온 몸에 털끝만큼의 기조차 느낄 수 없이 탈진하고, 공주의 시신도 온기를 모두 잃어 딱딱하게 굳어갈 무렵, 이진명은 눈물을 수습하고 그녀의 목 주위에 감겨있는 붉은 명주 천을 안타까운 눈길로 조심스레 걷어냈다. 그리고, 서서히 공주의 상체를 일으키곤 두 팔로 그녀를 안은 채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비틀 거리며 공주를 안고 넋이 나간 채 궁궐 내실을 빠져나온 이진명은 궁궐 뜰에 이르러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한바탕 피바람이 세차게 몰아친 듯 아직도 흥건하게 고여 있는 두 곳의 핏자욱 앞에 섰다.

  

  그리고, 그 경황 중에도 결코 놓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는지 잠시 공주의 시신을 발밑에 내려놓더니, 이진명은 지친 발걸음을 옮기곤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고(高)”자가 선명히 찍힌 채 반으로 조각난 원형금속 장신구였다.

 

 이진명은 순간, 뭔가를 알아차린 듯 발걸음을 황급히 공주에게로 옮기더니, 꼭 쥔 채 열릴 줄 모르는 그녀의 손가락을 허겁지겁 하나  둘씩 풀기 시작했다.


  이윽고, 드러난 반원형 장신구!


  공주의 손에도 역시 조각난 반쪽짜리 원형 장신구가 있었고, 게다가 그것위에도 같은 글귀는 아니었지만, 서진(西珍)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찍혀있었다. 이진명은 잠시 생각에 잠긴 채, 한참동안 공주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켜 벽성검을 높이 뽑아 들고는 세상이 떠나가라 신들린 듯 웃기 시작했다.


“고(高) 서진(西珍)! 고서진(高西珍)! 고서진(高西珍)...하하하하...네 이놈! 하하하하!”


급기야, 이진명의 광기는 극에 달해, 괴성소리에 놀라 모여 든 자신의 병사들조차 가차 없이 베어버리기에 이르렀고, 이유 없이 몸을 잃은 채 나뒹구는 병사들의 가련한 수급(머리) 앞에서도 이진명의 광기는 결코 멈출 줄 몰랐다.


  그의 광포한 살육은 저물어가는 노을과 함께 궁궐 뜰을 피 빛으로 붉게, 더욱 붉게 물들여갔고, 어느덧 그를 진압하려 일단의 군사들이 모여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늘 아래 둘도 없다는 벽성검(碧星劒)을 앞세운 이진명은 어느 샌가 그들을 제압하고 퇴로를 열어 공주의 시신과 함께 궁 밖으로 질풍처럼 말을 달리고 있었다.


  슬픔과 광기에 휩싸인 이진명! 그에겐 더 이상 무장으로서의 길도 그 어떤 영화도 다 소용없는 듯 했다. 다만 사랑했던 여인을 그리워하며, 그녀를 향한 집착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진명은 세상의 끝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끝없이... 끝없이....

 

똑같은 이름, 똑같은 약속만을 목 놓아 외치며.....

 

“공주!!공주!! 기다리시오. 내! 꼭 당신을 되살릴 것이니! 꼭!!! 하하하하!”



              



1995년 가을  서울


“어머니! 이 양복 괜찮아요? 오늘 좀 멋있어 보여야 되는데?”

 

“응, 괜찮은데? 어디 가니?”

 

“음.. 그럴 일이 있어요.”


민수는 어머니에게 얼버무리듯 말하고 있었다. 오늘 약속이 스스로 조금은

쑥스럽고 뭐라 딱 하니 단정 지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이었다.


“다녀올게요.”


“그래, 일찍 들어와. 너...  설마 데모 하러 가는 건 아니지? 니가 양복 입으면 난 왠지 불안하더라. 그리고 학점이 그게 뭐니? 공부 좀 하렴.”


“알았어요, 어머니는 꼭 그러시더라.. 데모 이제 안하기로 했잖아요. 공부할게요. 걱정 마세요. 그런데..어머니..”


 민수는 말끝을 흐렸다. 언제나 돈이 필요할 때면 말끝을 흐리는 그였다. 하지만, 어머닌 그의 말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제 들여놓았는지 년도와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옷장서랍을 덜그럭거리며 몇 푼 꺼내 아들에게 집어주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근데...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고 오천원만 주세요.”


“됐어, 다 가지고 가. 오늘 네 얼굴을 보니 그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데모하러 가는 건 아니라 그랬으니..... 누구?  미술 한다는 그 여자애니?”


 연인의 미소처럼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어머니의 시선을 뭔가 들킨 듯 황급히 피하며 민수는 신발을 신고 멋쩍게 웃곤 어머니에게 인사했다.


“에이, 어머닌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으세요. 다녀와서 말씀 드릴게요. 다녀올게요”


2년전, 민수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고 출감한 후 걱정만 늘어나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아들이 밉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달라진 그녀의 감정은 재판정에서 보여주었던 아들의 당당한 모습 때문일 수도 있었고, 어차피 구속으로 자신의 아들의 삶이 평탄하기를 기대하는 건 어려울 것이라는, 몹시도 가슴 아픈 포기에서 비롯된 자포자기의 판단, 혹은 어쩌면, 삶 속에서 느껴왔던 자신의 고단한 인생의 모습이 아들이 주장하는 비틀어진 사회모순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동의의 결과일 수도 있었다.


“어머니, 식사 거르지 마세요.” 다녀올게요.“


  대문조차 없어 바로 길가가 나오는 현관을 나서며 한 참을 걸어간 뒤 뒤돌아 외치며 손을 흔드는 아들의 모습을 어머니는 말없이 쳐다보며 서있었다. 이젠 더 아프지 말았으면 하는 자신의 염원을 아들의 등 뒤에 한없이 쏟아 부었다. 가난에... 모진 세파에....그리움에.... 더 아프지 말기를 ...



1호선 전철역


“인사동에.. 가려면... 음...종로3가 쯤에서 내리면 되겠구나.”


 민수는 잔잔한 설레임에 자신이 얼굴에 미소를 띄고 있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는 오래 전 연락이 끊긴 한 여학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진혜성. 대학 2학년 때 우연히 소개로 만나, 보는 순간 첫눈에 마음이 끌렸으나 자신과는 무척이나 다른 환경과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곤 스스로의 마음을 무 자르듯 정리했었던 진혜성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민수는 서로 잘 맞지도 않고 시간이 흘러 잊혀진 그녀에게 왜 다시 전화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순간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들떠 있음을 느끼곤 조금은 의아해하고 있었다.


“왜지? 왜 이렇게 들뜨는 거지?”


민수와 혜성은 그렇게 3년만의 해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 장미 한송이만 주세요.”


미전에 갈 땐 꽃을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예전 혜성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네,2천원입니다.”


 민수는 나머지 팔천원을 가지고 그녀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잠시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이며 바쁘게 미전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로 이동 중이었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남자 친구는 있을까? 날 반가워할까?’


  등등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그는 부지불식 갤러리 안으로 접어들었다. 이윽고, 캔버스를 여기저기 옮기며 조금은 분주한 듯 발걸음을 좌우로 내딛다 살짝 내려온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혜성의 눈길이 민수에게서 멈췄다. 순간, 두 사람간의 시선은  시간이 정지한 듯 한동안 멈춰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너... 민수야! 왔구나! 반가워. 야.. 너 여전히 멋있다?”


순간 민수는 잠시 말을 잊은 채 서있었다. 재회의 감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더욱 아름다워진 그녀의 외모에 넋을 잃은 것일까?


아니었다. 민수는 그녀를 보는 순간 놀랍게도 그녀와 헤어진 이후 단 한순간도 그녀를 마음속에서 놓아 본적이 없었던 자기 자신을 깨닫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빠져있었다.  


“..그래.... 그리움이었어.”


“ 뭐...뭐라고?”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혜성이 놓치지 않자 민수는 황급히 자신의 마음을 서둘러 감추려 했다.


“아니... 아니야.... 뭔가 생각이 나서... 아무튼, 혜성아 정말 반가워, 넌.. 여전히 예쁘다. 어때 졸업은 한거야? 아직 국내에 있었구나?”


 혜성은 3년 전 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을 갈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민수는 그 말 때문에 그녀를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 단정 짓고 서둘러 자신의  마음 밖으로 그녀를 몰아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민수로서는 학비조차 조달하기 힘들어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학기 휴학을 해야 하는 처지였고 더구나 막시즘에 심취해있어 사회에 대한 시각이 부유층에 대해 곱지 않았다. 민수는 당시 그녀의 유학이라는 말에 적잖이 거부감을 느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혜성을 다시 만난 민수는 더 이상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막시즘에 대한 사상적 해이함 때문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가난한 그의 환경이 부유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던 더 더욱 아니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운명적 이끌림.... 잊으려 하면 할수록 민수의 마음속으로 거세게 밀려드는 그녀에 대한 이끌림.... 그로서는 이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을 이제 운명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자리를 근처 커피숍으로 옮겼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만큼 지나간 얘기에 웃으며 때론 심각한 표정으로 두 사람은 3년 만에 해후를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민수는 그 순간이 꿈만 같았고 그녀를 밀어내려 애썼던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수없이 많은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민수의 눈엔 오직 혜성의 모습만이 들어올 뿐이었다. 미소 지을 때 마다 실눈이 되어버리는 애교 있는 눈매, 시원하게 내리뻗은 코, 체리베리 같은 입술... 말할 때 마다 묻어나오는 상대에 대한 배려... 웃음소리 끝에 걸려나오는 비음과 흉성... 민수는 하나 하나 그녀를 다시금 기억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다시는 밀어내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그러나 그의 다짐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혜성은 민수의 마음을 읽은 듯 쓸쓸히 그를 바라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3일 뒤에 유학 가.”


그 순간 민수의 생존방식은 보안경비시스템처럼 스스로의 표정을 제어했고 그의 음성의 색깔을 오히려 차분히 위장 시켰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래..? 잘 됐네? 어디로 가는데... 미국? ”


“응..”


“그래, 널 위한 투잔데 잘 다녀와야지.”


  혜성의 감정은 민수와는 달랐다. 그녀는 여전히 민수가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사랑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사회를 바꿔보겠노라 학생운동에 뛰어든 민수가 막연히 아름다워 보였으며 또한 그의 열정이 대견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산층 가정의 전형적인 안정성에서 기반한 그녀에게 있어서 민수는 위험하고 위태로운 존재로 인식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민수의 생각처럼 서로 걸맞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혜성조차도 그런 민수를 다시 만나고자 했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민수는 어떻게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애써 바로잡으며 어느덧 홀로 인사동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어차피 그는 혜성과 이루어 질 수 없다며 스스로를 위로 했지만,대책 없이 커버린 그리움을 어찌 해야 할지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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