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는 주제를 가지고 수일 째 사색을 하고 있지만, 끝이 나지는 않을 거 같아 우선 한마디를 열어 본다. 말 그대로 모든 것에 관련된 주제이기에 그 모든 것을 담자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는 끝이 있을 수 없는 얘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적 구별과 수용에 관해 간결하게 다루어 보고 싶다. 누구나 한 사람 한 사람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없다면 각각의 개성과 정체성도 없다. 동시에, 누구나 모두를 수용하며 살 필요가 있다. 이것이 부족하면 혼자 고립되려는 패배주의자 혹은, 모두를 지배하려는 독제주의자가 된다.
양면성에 관해 짚어보는 이 글의 참 주제는 양면의 적절한 균형 없이는 저울이 기울 듯 무너질 수밖에 없다 즉, 양면, + -를 적절히 유지한 상태여야 0의, 말 그대로 영(靈)의 평화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영의 평화는 모든 사람이 갈구하는 행복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양면성이라고 해서 선과 악을 양면으로 보는 개똥철학을 펼치는 시각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에서는 악을 듣지도 보지도 하지도 등등 말라고 한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선이다. 바로 그 ‘선’에 관한 양면성의 균형이 유지될 때, 참 선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럼 이것을 다시 오늘의 예로 돌아가서 적용해 보자. 구별과 수용에 관한 성경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면, 구별도 선이고 수용도 선이다. “개잡것들을 멀리하라.”는 말이 구별이고, “모두를 사랑하라”는 말이 수용이다. 얼핏 보기에, 두 개의 말씀이 모순이 되는 것 같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뭔가가 모순이라고 느껴질 때, 세상에 우리 인간만큼 모순적인 존재는 없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하는 겸손함으로서, 마음의 눈을 더 열어 자신의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사고의 세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려는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에게 ‘나쁜 친구와 사귀지 마라’라는 말을 하면서, 또 하루는 ‘모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라는 말을 한다면 그 부모가 모순되었다고 지적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단, 그 중 한쪽으로 치우쳤을 때가 문제다. 나쁜 친구와 사귀지 말라는 구별 쪽으로만 치우친다면 ‘무조건 내 자식은 나쁜 아이가 아니다’라는 가족이기주의로 빠지기 쉽다. 그런 상태로는, 자식이 친구와 트러블이 있다면 무조건 그 친구를 탓하려 드는 것이다. 그는 모든 트러블에는 쌍방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잊은 지 오래다. 시작은 ‘자식을 사랑해서’로 했을지 모르나 끝은 ‘남을 증오해서’로 끝난다. 결국 자식사랑커녕 선 근처에도 못가는 악한 행위다. 이것은 그 부모의 이기주의 뿐 아니라, 그 자식의 극악한 이기심을 부추긴다. 자식이 물려받지 않는다면 기적이다.
역으로, 모든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수용 쪽으로만 치우친다면, 이것에 관한 얘기는 별로 한국 사람들 앞에서 하고 싶지는 않다. 너무 많은 한국인들이 이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조그만 나라에서 뒤늦게 세계화를 이제 막 겪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정서적으로 마음이 많이 닫힌 채 살아왔으며, 그런 우리에게는 보다 큰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이 절실하다. 나 자신에게서도 이런 필요를 여러번 느껴왔다.
내 개인적인 일화로 이번 편을 마감하려 한다. 이래봬도 나도 먹고살기 바쁜 사람이다. 최근에 나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긍정적인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긍정의 메시지를 주로 쓴다. 긍정적인 글을 쓰다보니, 거기에 낚이는 댓글들의 모습도 긍정적인 메시지들이 많았다. 그런데, 역시 그럼에도 복병은 있었다. 긍정적인 메시지를 삐딱하게 받아들이거나 꼬투리를 잡는, 이른바 토를 다는 댓글들이 그것이었다. 비관적인 글에 달렸던 비관주의자(악플러)들의 댓글은 뻔한 예상 하에 낚인 고기들이었으나, 이 복병고기들은 한숨 자던 차에 낚싯줄을 건드리는 뜻밖의 손님들이었다. 그 중 예를 조금 남겨보자면,
내가 쓴 글 - 이별 노래는 갖다버려라. 이별 노래를 많이 들으면, 삶이 이별이 된다. 내 어릴 적 체험담이다.(이것은 심리학적으로도 명백히 증명이 되는 바다) 기쁜 사랑의 노래를 들어라. 삶이 기쁜 사랑이 될 것이다 등.
토를 단 글 - 그럼 발라드에 이별노래 하지 사랑노래 하냐? 넌 항상 사랑에 성공했나 보지? 음악을 그냥 음악으로 듣는 거지, 일일이 따져가면서 듣지는 않는다. 이별 노래도 나름대로 그 마음이 담겨있는 진실한 표현이다 등.
토에 토를 단다면 - 여러 댓글에서 읽어보지도 않고 쓴 흔적들이 많다. 발라드에 기쁜 사랑노래 아주 많다.(글만 읽어보지도 않고 쓰는 게 아니라, 노래도 들어보지도 않고 없다고 하는구나) 그래 난 항상 사랑에 성공한다. 그래서 니들도 성공하길 바라는데, 니들은 줘도 안먹는 구나. 나도 음악을 그냥 음악으로 듣고, 이건 따지는게 아니라 좋은 음식 나쁜 음식을 구별하는 거다. 니가 싼 똥만 먹고도 넌 살 수 있다면 너는 예외다. 진실한 표현이 아니라고 한 적 없다. 기쁨도 진실이고 슬픔도 진실인데, 니들은 왜 맨날 슬픔을 택하고 질질 짜거나 잔뜩 찌부려붙이고서도, 기쁘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느냐. 밥통아.
이렇듯, 쓰레기들을 사용한 재활용 놀이가 가끔은 재미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재미있는 것들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재활용 놀이가 꼭 해야만 하는 놀이 정도는 아니다.
조금은 다른 예로, 수용이 필요해 보일 때도 있다. 많은 목사나 교사, 대통령이나 가장 등 리더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과정으로서, ‘다른 사람이 그들의 문제를 짊어지고 나를 찾을 때’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문제를 공감해주며 결정적인 해결의 어시스트가 되어주는 것처럼 선하고 복스런 일도 세상에 잘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가능한 나의 도움을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세계로 뻗쳐나가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세상에 모든 사람의 모든 문제를 공감하며 해결책을 제시해 줄만한 사람은 대략 없다는 사실이고, 그렇다면 그 어느정도를 도와주는 지에 관한 ‘선(線)’을 잘 아는 것이 곧 ‘선(善)’인 것이다.
자신들의 문제를 나에게 들고 온 사람들은 반갑게 맞이할 일이다. 하지만 그들 중 몇몇을 보면, 모든 사람과의 인생상담을 할 수 있는 인간이란 세상에 없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그저 공감해 주기를 바란다. 역으로,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해주기 보다는 그냥 조용히 들어주는 것만으로 큰 위안이 된다는 상담자 입장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자신의 큰 범죄(슬픔)를 공범(공감)해 주기를 바란다면 어쩔 것인가? 조용히 들어줄 것인가?
문제는, 슬픔을 공감해 주는 것으로 큰 위안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도, 슬픔의 공감으로 슬픔이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슬픔을 공감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쁨을 공감하는 것이다! To share the happiness is only way to share the sadness! 나는 내가 큰 슬픔의 눈물을 흘릴 때, 같이 눈물 흘려줄 친구는 필요가 없었다. 내가 슬플 때 필요한 친구는 그 슬픔보다 더 큰 기쁨으로 그 슬픔을 날려버리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친구였다. 입장을 바꿔 나도 그들에게 같이 눈물을 흘려줄리 없다(기쁨의 눈물 제외). 그들의 슬픔에 필요한 것은 큰 기쁨으로 슬픔을 날려버리는 일이다. 누가 나에게 슬프다면서 찾아오면 나는 “기뻐하라!”고 한다. 그래서, 들으면 잘된 것이고 안 듣는 사람에겐 딴데가서 함께 슬퍼할 사람이나 찾으라고 하는 것이 서로에게 나을 것이다. 실제로 모든 슬퍼하는 사람의 문제는,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닌, 스스로 슬픔을 선택하고 있는 것에 있다. 스스로 이별노래를 선택해서 즐겨 듣는 것처럼, 플레이버튼을 누른 것은 자신이면서 그 노래가 슬프다며 눈물 흘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점점 더 많은 사람의 더 큰 슬픔에도 그보다 더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상담자가 될 수 있도록 성장해 나가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나도 조그만 나라의 한국인으로서 마음을 크게 넓히고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수용의 정신을 키울 필요가 있다. 하지만, 긍정적인 말을 하는 글에조차 따라붙은 부정적인 메시지(특히, 본문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자들의 비성실적인 ‘악플을 위한 악플’)나 상대방의 말을 듣지는 않고 같은 말만 반복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는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개잡것들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사람마다 그 고유의 인성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은 소수와 각별하게 잘 지내며 사는 게 그 사람에 맞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보다 많은 사람과 무난히 잘 지내며 사는 게 그 사람에게 맞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그 자신의 복제인간도 그에게 알려줄 수 없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가장 중요한 해답은 다른 그 어떤 사람도 알려줄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나라는 인간 하나를 만든 신이 나로 하여금 직접 그에게 물어서만 답을 찾을 수 있게, 모든 인간은 그렇게 되어있다.
ps.
내가 쓴 글이 길다는 댓글을 적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봤는데, 직접 본인이 쓴 글을 A4용지에 출력해 봐라. 얼마나 나오나. 반 페이지 나오면 길다고 그럴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