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국가통치자와 캄보디아의 역사

정한교 |2007.04.02 13:04
조회 129 |추천 0

국가통치자와 캄보디아의 역사

시아누크 전 국왕

캄보디아의 현대사를 이끈 장본인이라면 전 국왕인 노로돔 시아누크 바르만일 것이다. 그의 정신 왕위 칭호에는 바르만이라는 이름이 뒤 따른다. 고대 앙코르시대의 모든 왕들이 바르만이라는 칭호를 가졌는데 이는 “국민의 보호자”라는 뜻이다.

시아누크 국왕은 1922년생인데 19세 때인 1941년 사이공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 어느 날 프랑스는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왕이 되기 어려운 방계의 왕위계승이었다.

그가 왕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행적이 프랑스가 볼 때 플레이보이의 기질이 다분히 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랑스는 1863년에 보호국이 되어 주기를 바랄 때와는 달리 매사 건건 프랑스에 도전하고 반기를 들어서 프랑스로서는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놀음이나 하는 왕이 필요했다. 그래서 두루 살펴본 결과 학생시절에 성격이 호탕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그가 프랑스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양이와 같이 온순하기를 바랐는데 어느 날 호랑이로 돌변하여 프랑스에 맞서 싸워 독립을 쟁취하기도 했다.

왕으로 등극 후 그는 궁중무용수인 넥모닝을 사랑하게 된다. 1943년에 그녀와의 사이에서 2004년 7월까지 문화부장관이었던 보파데비를 낳고 다음해에는 현재 국회의장인 라나리드를 낳았다. 1942년에 시아누크는 그의 이모인 시소와스풍산모니와 정식으로 결혼 7남매를 둔다.

세 번째 왕비는 노로돔 놀릭인데 가장 가까운 집안 공주이다. 그리고 1949년에 라오스출신의 미녀인 마니반 파니봉과의 사이에 두공주를 낳는다. 다섯 번째 왕비는 현 왕비인 모니크이찌이다. 시아누크는 6명의 부인으로부터 14명의 왕자와 공주를 두었는데 그중 6명의 자녀와 라오스출신인 마니반파니봉이 크메르루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는 가족들을 크메르루지에게 잃은 슬픔이 있었지만 크메르루지와의 사이에 어떤 무엇이 있는가 보다. 1970년대부터 1993년 새로운 캄보디아 왕국이 탄생할 때까지 캄보디아의 정정을 불안하게 만든 것은 크메르루지의 존재였다. 시아누크 국왕은 이 기간에 항상 크메르루지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당시를 지배하던 훈센과는 항상 적이었는데 2004년 10월 양위 할 때까지 적과 동침을 한 상태였다.

그는 캄보디아에서 하나의 정치가로서 때로는 영화제작자로서 예술가로서 다방면에 걸쳐 캄보디아 국민을 계도하고 있었다.

그는 불교계의 대 종정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는데 이미 1947년에는 왕위에 있으면서도 왕궁의 사찰인 실버파고다에서 1년간 승려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즉 불교를 몸소 체험한 왕이었기에 캄보디아의 농민들은 그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아누크 국왕의 후계자인 시아모니

이 나라의 정식 명칭은 캄보디아왕국으로 모든 주권은 왕에게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라고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대개의 입헌군주국은 후계자를 정함에 있어 후손 중에서 세습을 하게 되는데 이 나라는 그렇지 않다. 또한 정치에 있어서 국왕은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권한만 가지고 있다.

캄보디아는 세계역사상 보기 힘든 선출직군주제의 나라이다. 이 나라가 이렇게 된 데는 역사적인 사실들이 함께 작용된다. 1431년 앙코르를 포기한 크메르왕실은 타이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그러므로 타이왕실의 뜻대로 왕이 임명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베트남이라는 새로운 강국이 등장하면서 캄보디아는 타이와 베트남의 사이에서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역사가 앙두엉왕까지 반복되다가 앙두엉왕이 자신이 오래 왕위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프랑스대사관에 접촉하여 보호를 요청하다가 이것이 들통이 나 왕좌에서 쫓겨나고 대신 당시에 타이에 인질로 가 있던 아들인 노로돔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노로돔왕도 아버지와 같이 캄보디아의 영토의 일부를 양여 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다. 그리고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후 프랑스황제가 캄보디아 왕을 임명하는 것으로 바뀌어서, 노로돔왕이 죽자 프랑스는 왕의 아들을 두고 그의 배다른 동생인 시소와스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되고, 그 뒤에 시아누크를 왕위에 앉게 된다.

캄보디아의 역사적 개항

이곳에 살았던 초기의 민족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들의 기원도 그들이 언제 어느 지역에 살았다는 흔적도 알 수 엇다. 그들은 아마 동남아시아를 통해서 들어 왔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언어학적으로 몬 아시아족이라 일컫기도 한다.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타이와 베트남은 같은 무렵 그리고 유사한 방법으로 벼를 경작했을 것이며, 소와 물소를 가축화했으며, 금속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와 방법으로 정령을 숭배하고 정령에게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초기정착민들이 약 6000년 전에 이 땅에 살았다는 증거들이 혀냊 출토되고 있다.

캄보디아의 역사에서는 자기들이 기록한 역사가 없이 모두가 중국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후난만 하더라도 이 나라 사마들은 노코 프넘이라는 나라가 있어다고 하지만 아무런 역사적인 기록은 없다.

후난국의 후손들이 나라를 북쪽으로 옮겼는데 첸라국으로 불려졌다. 첸라국의 왕이었던 자야바르만2세가 그때까지 조그만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던 나라를 통일하여 나는 ‘크메르 왕 중의 왕’으로 선포한 년대로부터 크메르왕국(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앙코르시대)이라 부른다.

1431년에 타이에 의해 앙코르가 점령당한 후 1432년 앙코르를 포기하고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가는데 이 시기를 고대 크메르왕국 시대라 이른다. 이 시기에는 총 39왕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왕이 크메르왕국을 세운 자야바르만 2세이다.

앙코르제국 시대에 가장 훌륭한 석조건물인 앙코르와트는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7세가 왕위에 오르기전에 참파국이 크메르를 침공하여 앙코르와트가 파괴되었다. 이 무렵 등극한 자야바르만 7세는 참파국을 복속하고 새로운 수도로서 앙코르톰을 건설하게 된다. 수리야바르만 2세 시대와 자야바르만 7세 시대가 고대 앙코르왕국 시대에 가장 넓은 국토을 가지고 있었으며, 크게 융성하였던 시절이었다.

앙코르 이후 고난의 시대(1432-1863) 앙코르를 포기한 후의 캄보디아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왕의 치적 년대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초기에는 타이의 침공으로 수도를 남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왕위계승권 싸움으로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타이와 베트남의 종주권 다툼으로 인하여 캄보디아 영내에서 타이와 베트남이 6년간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후 노로돔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는 대가로 시엠리업과 바탐방을 타이에 양여하였다.

프랑스 식민지시대(1864-1953) 프랑스는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삼은 것은 1862년에 이미 코친차이나를 식민지로 삼았기에 이 지역을 타이로부터 보호하는 완충역할로서, 다른 하나는 캄보디아 영내로 메콩강이 흐르므로 메콩강을 따라 중국에 이를 것을 기대하고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삼았다.

프랑스가 캄보디아에 대하여 특별히 해 준것이 없었다. 베트남인들을 동원하여 캄보디아를 통치하였으며 주요한 산업자원은 베트남인들이 관장하게 되었고, 캄보디아에게 해 준 것이라면 동양학연구소로 하여금 캄보디아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여 앙코르문화를 재조명하엿다는 것이다. 그리고 1931년 프놈펜과 바탐방과의 사이에 철도를 개설하였는데 이는 바탐방에서 생산되는 쌀을 수송하기 위함이며, 1946년에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헌법을 제정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연방내의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식민지이후 시아누크 친정시대(1954-1970) 시아누크 국왕은 왕의 십자군행진으로 프랑스로부터 독림을 쟁취하였다. 그리고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왕위는 자기 아버지인 수라마리트에게 양위하고 총리 혹은 국가원수 등의 직책으로 정치를 하였다. ‘상쿰’이라는 단일정당으로 정치를 하였는데 캄보디아 역사상 이 시기만큼 안정된 시기는 없었던 것 같다. 농사도 잘 되었는데 매년 200,000톤의 쌀을 해외로 수출, 올림픽스타디움도 이시기에 건설, 톤레샵강에 지금의 일본다리 위치에 다리도 건설하였다.

크메르공화국 시대(1970-1975) 1970년 3월 18일 론놀은 외유중인 시아누크를 모든 권좌에서 축출하고 귀국을 불허하였다. 그리고 국명을 크메르공화국으로 바꿨다. 초기에는 언론의 자유와 시장경제체제가 잘 되어 국민들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월남전을 캄보디아로 끌고 들어왔으며, 시아누크의 축출로 충성심 강한 농민들이 크메르루지 게릴라가 되어 론놀 정부는 국가관리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민주캄푸치아 시대(1975-1979) 풀롯이 이끄는 캄푸치아공산당 크메르루지가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에 입성한다. “우리들은 당신들과 대화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정복자로서 왔다”라고 하면서 모든 시민들을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시켜 농업을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은 모두 처형하고 학교와 도서는 불사르고 화폐를 없애고 사유재산을 모두 없앴다. 수확한 쌀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무기구입용으로 사용되므로 국민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캄푸치아인민공화국 시대(1979-1989) 헹삼린 체아심 훈센 등이 이끄는 베트남과의 연합군이 1월 7일 프놈펜에 입성한다. 왕궁에 있던 시아누크 왕자는 한때 크메르루지정권의 국가수반이었기에 재빨리 북경으로 탈출하였다. 해방군은 캄푸치아인문공화국을 수립하였으며, 같은 공산당인데 폴폿은 과격공산당이라면 새 정부는 온건한 공산당이라 할 수 있다. 폴폿과 잔당들은 타이 국경으로 도주하여 서방의 도움을 청하였으며 아세안 국가들과 서방의 나라들은 폴폿에게 다시 나라를 맡기라고 한다.

캄보디아 시대(1989-1991) 1989년에는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면서 모든 농토는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한다. 시아누크와 훈센은 파리에서 수차례 만나 평화협상을 전개하여 1991년 10월에 평화를 위한 협정조인을 하였으며, 그리고 12인의 국가최고지도자로 구성된 평의회에서 나라를 통치하자고 한다.

캄보디아 국가최고 평의회 및 운타크 시대(1992-1993) : 1993년 5월에 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1992년부터 운타크 인사들이 입국하여 선거를 치렀다. 운타크는 유엔의 산하 회원 100여국이 참여하였는데 이 선거에서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국가의 체제를 다시 정비하여 나라 이름을 캄보디아왕국으로 했다.

캄보디아 왕국(1993-현재) 1993년 9월 24일은 시아누크가 1955년 자기 아버지에게 왕위를 양여한 후 38년 만에 다시 옥좌에 앉는 영광의 날이기도 하였다. 제일총리에 훈신펙당의 총재인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인 라나리드, 제2총리에 국민당의 부당수인 훈센이 서로 권력을 안분하여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타이 국경에 은신하고 있는 크메르루지 잔당들은 항상 나라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폴폿은 그의 은신처인 오타르메안체이의 초암의 오두막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잔당들은 속속들이 투항을 하고 일부는 체포되었다. 이 시기를 불안했던 왕국시대(1993-1998)라 정의 할 수 있다.

2003년 7월 27일의 선거결과 국민당이 2/3석을 확보하지 못해 또 다시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시기 이후를 캄보디아의 안정을 찾아 가는 왕국시대라 정의할 수 있다.

 

- 꿈과 미래가 있는 캄보디아 101가지 이야기 중에서 -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