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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헵번의 프로필

김진주 |2007.04.10 10:16
조회 621 |추천 1


오드리 헵번.... 본명 에다 헵번 반 헴스트라.. 귀여운 요정의 이미지로 전세계 영화팬들에게 잊혀지지 않을 감동한 선사한 그녀.. 오드리 헵번의 출생지는 벨기에의 브뤼셀, 태어난 날은 1929년 5월 4일 그녀의 어머니는 네덜란드 명문 귀족가의 외동딸이었으며,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무역업자였다. 고생이란 걸 모르고 풍족하게 자란 햅번은 양친의 이혼으로 어머님 슬하에서 영불해협을 왔다갔다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유럽의 이곳저곳에서 '구대륙의 교양'을 쌓은 그녀가 할리우드로 건너온 것은 1951년. 할리우드는 파리의 어느 까페 한 구석에 앉아서 새침을 떨고 있는듯한 말라깽이 아가씨에게서 유럽의 우아함을 기대했고, 그녀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런던에서 발레를 공부하며 사진 모델과 코러스 걸, 댄서 등의 아르바이트를 했고, 틈틈히 펠릭스 에일머 교수의 드라마 강의도 들었다. 이 수업 덕분에 오드리는 [야생 귀리], [젊은 아내 이야기], [라벤더 힐 몹]과 같은 영국 영화에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1951년에 오드리는 파리로 건너가서 [몬테카를로 베이비]라는 영화에 출연한다. 이때 여성작가 꼴레뜨를 만나면서 행운을 거머쥐게 된다. 이 작가는 오드리의 요정같은 아름다움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작품 [지지]를 뉴욕에서 공연할 때 주연을 맡긴 것이다. 아니타 루스의 연출로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린 [지지]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연극 공연을 보았던 빌리 와일더 감독 역시 오드리 헵번을 대어로 점 찍었다. 훗날 뮤지컬 영화로도 제작된 [지지]의 영화 프로젝트에서도 오드리 헵번에게 주연을 맡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녀가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 유럽의 한 작은 나라에서 온 공주의 이야기를 찍으려 고심하고 있었던 와일더 감독에게 오드리 헵번은 놓칠 수 없는 보석이었다. 52년에 [로마의 휴일]의 촬영이 시작됐고 고등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유럽 상류층이라면 배워야 할 교양을 자연스럽게 몸에 지니고 있었던 그녀는 천진하면서도 우아한 공주 역을 그레고리 펙을 상대로 보여주었고, 그 결과는 이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해에 가장 주목받는 신인이 되었다. 오드리가 거둔 성공은 영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로마의 휴일]에서 선보인 숏커트나 [사브리나]에서 입고 나온 '사브리나 팬츠' 그리고 디자이너 지방시의 작품인 우아한 드레스등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로마의 휴일]에 이어 빌리 와일더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사브리나]에 출연한다. '타임'지는 [사브리나]에서 헵번의 연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헵번의 매력은 매순간마다 분명해지는데, 이는 그녀의 매력이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연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관객의 상상력은 더욱 커진다. 헵번은 분명히 그 사실을 알고 [사브리나]에서 매우 작은 연기를 보여준다." 이때 연극 [온디느]의 공연을 함께한 멜퍼러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두 사람의 나이차는 열두살이었으며, 멜 퍼러에게는 세 번째, 그리고 오드리 헵번에게는 첫 번째 결혼이었다. 어엿한 스타가 된 오드리 헵번의 다음 작품은 남편인 멜 퍼러와 함께 공연한 톨스토이 원작의 [전쟁과 평화]였다. 오드리 헵번은 순진한 여주인공 나타샤 역을 맡았는데, 두 부부의 연기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61년에 만든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그녀에게 네번째 오스카 노미네이션을 가져다 주었다.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이 영화 에서 헨리 밴시니가 작곡한 감미로운 주제가 'Moon River'를 기타로 치면서 노래하는 주인공 홀리 고스틀리 역은 많은 팬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녀의 전성기에 제작된 마지막 화제작은 워너 브라더스사에서 백만 달러의 출연료를 제공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였다. 피그말리온 신화에 기초해 버나드쇼가 쓴 희곡을 영화화한 [마이 페어 레이디]는 시장에서 꽃을 파는 천박한 말투의 아가씨가 한 언어학 교수의 실험 모델이 되어 우아한 레이디로 탄생한다는 로맨틱한 줄거리를 담고 있다. 여주인공 일라이자역은 원래 뮤지컬의 원작이었던 브로드웨이 연극 버전의 주인공인 줄리 앤드류스가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워너 브라더스 사는 오드리 헵번의 지명도를 보고 그녀에게 역할을 맡겼다. 1967년에 멜 퍼러, 오드리 헵번 부부는 이혼했다. 같은 해에 오드리 헵번은 영화 [길 위의 두 사람]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영국 배우 앨버트 피니와 30대 부부로 출연한 오드리 헵번은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 때문에 괴로워 하는 30대 여성의 연기를 실감나게 펼쳤고, 응당 그 해의 오스카를 수상했음직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드리 헵번의 이후 출연작들은 더 이상 순진한 천사가 아닌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멜 퍼러와 이혼한지 2년만에 오드리 헵번은 이탈리아인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와 결혼하지만 두 번째 결혼도 깨어지고 만다. 그 후 스위스에 살면서 두 번째 아들을 낳은 그녀가 다시 영화에 출연한 것은 76년의 [로빈과 마리안]. 숀 코네리가 나이든 로빈 후드를 연기하고, 그의 연인 마리안 역을 오드리 헵번이 맡았다. 이때 네덜란드의 배우겸 제작자 로버트 워더즈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테렌스 영 감독의 [혈통]에 출연하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혼은 그대곁에]에서 천사 역으로 '우정 출연' 해준 것외에 그녀의 연기 생활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이탈리아로 돌아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살면서 유니 세프의 평화 대사 역을 수행하기도 하고,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돕는 자선 행사를 주최하기도 하면서 오드리 헵번 곱게 늙어갔다. 데뷔 시절의 몸매인 170센티미터에 50키로그램이라는 늘씬한 몸매도 유지하면서. 1992년, 소말리아의 어린이들을 위한 그녀의 자선 활동은 전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당시 그녀는 이미 결장암으로 고통받고 있었으며, 같은 해에 그녀가 결국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때, 그녀의 특징적인 캐릭터인 우아함과 천진함을 기억하고 있었던 많은 팬들이 슬퍼하였다. 그녀의 생애는 자신의 첫 성공작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공주 못지 않게 고귀한 추억으로 마무리되었다. cyworld.com/crownjin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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