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페트(The forbidden pet) -
어디선가 아련히 들려오는 새소리에 난 고개를 들어 올리고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 피곤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 생
각 없이 오랫동안 눈을 감은 탓인지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을
잔 모양이다.
"음?"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무엇. 회색의 털이 많고, 일반 개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크기가 큰 감이 없지 않게 있었다. -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가? 하고 생각해보지만, 볼을 간질이는
한줄기 바람의 느낌은 현실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선
명했다.
그것의 타오르는 램프의 빛과 같은 날카로운 두 눈은 나의
몸을 향하고 있었다.
'느, 늑대?! 늑대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참 바보 같은 생각이군. 늑대니까 숲에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말이다. - 젠장! 여하튼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순간 내가 몸을 일으키자 조금 움찔거리며 뒷걸음질하는 늑
대처럼 생긴 그 '무엇'. 괜히 적대적인 반응을 하는 것도 안
좋은 판단이겠고, 또 갑자기 달아나는 것도 바보짓이 될 테니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난 머리를 굴러야해 했다.
'일단 침착해야 한다.'
하지만 이 늑대처럼 생긴 녀석이 워낙 '존재감'넘치는 모습
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 내가 백전노장의 용병도 아니
고, 이런 상황에서 겁먹고 주저앉지 않으면 다행이지. '무슨
탁월한 임기웅변으로 늑대를 쫓아내다!'라는 것은 꿈과 같은
소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조금씩 떨려오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고, 난 그렇게 늑대
의 두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맛있는 먹이 감을 바라보는 탐
욕에 젖은 눈, 같은 것은 아니고 그냥 신기하다는 바라보는
눈이라는 느낌이랄까. - 눈빛으로 동물의 생각을 읽는 그런
거짓말 같은 능력은 내게 있을 리 없지만.
'한 걸음도 움직이지 말 것.'
카이츠가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물론 그런 약속 따위보다
야 목숨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아직 조금 여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말이다.
"젠장."
조금 시간이 흘러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상스러
운 말이 자연스럽게 입가를 맴돌았다. 그냥 도망갈까? 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 들이차서, 무엇하나 냉철하게 생각할
여유 같은 것은 개미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지겨워 지는 느낌도 들었다. 무슨 저 녀석이 침을
뚝뚝 흘리며 이빨을 가는 것도 아니었으니.
'모르겠다. 잡아먹든 말든 니 맘대로 해라.'
그렇게 반쯤 자포자기하고 어금니를 꽉 물며 녀석을 노려보
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녀석이 조금 더 날 바라보더니, 그냥 나무 사이로 슥 사라
지는 것이다.
"뭐, 뭐지?"
나 자신도 어리둥절해서, 늑대가 사라진 맨 땅을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 내 모습이 무서워 도
망간 것은 아닐 테고. 신기해서 좀 살펴보다가 흥미가 떨어져
그냥 가던 길 마저 간 모양이다.
순간 힘이 딱하고 풀려서 한숨을 쉬며 그렇게 바닥에 주저
앉았다. 긴장을 꽤 심하게 했던 모양인지 갑작스레 피곤함이
온 몸을 엄습하는 듯 했다.
언제 다시 잠이 들은 모양인지, 카이츠가 살짝 내 어깨를
흔들자 화들짝 놀라 난 몸을 일으켰다.
"아, 미안. 놀라게 한 것 같군."
"괜찮습니다."
조금 가위를 눌린 모양인지 식은땀이 서늘하게 등줄기를 스
치고 지나갔다. 내 굳은 표정을 조금은 근심스레 바라보며 카
이츠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
거짓말할 성질의 것도 아니고 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늑대처럼 생긴… 그런 것이 나타나서."
"늑대라고?"
조금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카이츠가 대답했다.
"깜박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회색 빛의 무엇인가 눈앞
에 아른거리더군요."
"그게 늑대였나 보군."
늑대는 원래 밤에만 활동하는 동물이라고 알고 있는데 왜
점심 무렵, 그것도 마을에 인접한 곳을 어슬렁거리는 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내가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면 그건 분
명히 늑대였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턱에 손을 집으며 고민
하는 듯한 제스츄어를 하는 카이츠. -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
르자 고개를 들어 올리고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음, 대충 짐작 가는 엘프들이 있긴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짐작 가는 엘프? 설마 그것이 진짜 늑대가 아니라 엘프였던
말인가?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자, 곤란하다는 듯 쓴웃음
지으며 카이츠는 입을 열었다.
"누군가 폴리모프한 것 같아. 미숙한 것을 보면 꼬맹이들
중에 하나일 것 같군."
"어떻게 미숙한 지 알 수 있습니까?"
"그냥 살펴보는 정도라면 늑대로 폴리모프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지. 새라던 지, 작은 짐승으로 폴리모프하는 편이 더 나
을 테니까 말이야."
확실히 그의 말 대로다. 늑대같이 눈에 확 뜨이는 것을 선
택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경험이 부족하다는 걸 알 수 있는 것
이다.
"엘프라는 종족이 워낙 장수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지 그래
서 몰라도, 인간으로 따지자면 기숙사 비슷한 곳이 있단다.
인간으로 따지면 거의 지금 네 나이 정도의 또래들이 생활하
는 곳이지. 내 생각에는 그곳의 꼬맹이들 중 하나일 것 같은
데 말이야."
엘프가 드물긴 하지만 그래도 인간과 묘인족을 제외하자면,
대륙에서 제일 넓게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디에선가
들어 알고 있었다. 여하튼 조금 무책임한 면모도 있는 듯 했
다. 아무리 뭐라 그런들 자신의 아이를 남겨두고 여행이라니
말이다. - 내 아버지 같은 경우는 조금 특수한 케이스니 그냥
넘어 간다고 해도.
'아들아, 난 여행을 다녀오마.'하고 휘리릭- 사라져 버린다
는 것은 조금은 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숙사는 어디죠?"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그다지 없는 거 같아서 의
아해했었는데. 기숙사 구경도 할 겸 한번 놀러 가는 것도 나
쁘지 않을 것 같아 난 그렇게 질문했다.
"마을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대충 바라보며 살짝 고개
를 끄덕였다. '그리 멀지 않다면 오늘이라도 한번 가보는 것
이 좋겠다'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며 말이다.
"아, 기숙사요? 에린언니가 다니고 있어서 확실히 알고 있
기는 하지만…."
아직 저녁식사 시간이 되기에 조금은 이른 시간, 세레스녀
석이 입을 열었다. 무엇인가 말끝을 흐리는 것도 같아서 난
다시 질문했다.
"에린언니는 누구지?"
"저희 둘보다 먼저 태어난, 말 그대로 언니죠.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아서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고요."
"꼭 기숙사에서 생활해야 하는 거야?"
"돌봐줘야 할 엘프가 마을에 없는 이상 100%겠죠.'
음, 대충 무엇인가 알 것 같기도 하다. '장수'한다는 것도
나름대로 애로사항이 있는 것이다. - 부모인 이상 자식을 기
르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겠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백
년 동안 자식 교육만 시켜라'라고 말한다면, 비웃어 줄 것이
틀림없다.
"저희 둘도 곧 기숙사 생활을 하겠죠."
이것은 어떻게 보면 악순환 아닌가. 어려서 구속받고 자란
것을 성인이 되어 충족하는 것, 그것이 반복되어 어느새 당연
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
그리 좋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또 마땅한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엘프들의 문화에 내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처지는 못되겠지만.
"흐음."
내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살지 못했기 때문인지 이런 면
에서는 조금 민감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인상을 찡그
리며 끙끙-거리기 시작하는 내 얼굴을 마주 바라보더니, 티레
스녀석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왜 기숙사에 대해 묻는 거야?"
"아, 한번 가볼까 해서…. 뭐 이곳에 관광 온 것은 아니지
만. 그래도 가만히 방에서 궁상떠는 것보다는 여러 군데 돌아
다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조금 얼버무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니
까. 굳이 '그 곳의 어떤 아이가 폴리모프해서 날 몰래 홈쳐보
려다 걸렸어'하고, 말할 필요성은 없겠지.
"그럼 그 기숙사로 안내해 줄래?"
"일단 델리만 님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기숙사
는 외부인 출입 금지라서 말이야."
건성으로 대답하는 티레스녀석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
는, 곧장 쌍둥이들의 방을 빠져나오는 나였다. 늦장 부리는
것보다는 어두워지기 전에 한번 기숙사에 놀러 가볼 생각이었
던 것이다.
보통 집보다 두어 배정도 큰 듯 하긴 했지만, 카이리온 기
사양성학교에 있는 기숙사에 비하면 굉장히 아담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뭐 이 마을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이
정도로도 부족하지는 않을 듯 싶지만.
'마음대로 해.'
문득,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대충 한 손을 휘저으며 말하
는 델리만의 모습이 떠올랐다. - 생각 외로 쉽게 승낙해서 조
금 무안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주춤하긴 했다.
여하튼 다시 꼬맹이들의 방으로 돌아가서 귀찮아하는 녀석
들 손을 부여잡고, 기숙사의 앞까지 터덜터덜 난 도달할 수
있었다.
기숙사의 문 근처에는 때마침 누군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고 했다. 내가 인기척을 내자 그 엘프가 뒤를 돌아보며 나와
쌍둥이들을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선생같이 생긴 중년 엘프였다. 그는 천천히 우
리 쪽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네가 이곳에 왔다는 인간들 중 하나인가 보군. 이 기숙사
에는 무슨 볼일이 있는 거냐?"
"아뇨, 단순히 구경을 하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내 또래의 엘프들을 보고 싶어서 온 거였지만
말이다. 그 폴리모프를 한 엘프를 발견한다면 더 좋겠지만,
순순히 자백하지 않는 한 불가능 할 테니. - 사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반쯤 포기하고 있었기에, 큰 생각은 하지 않기로 마
음먹었다. 뭐 내 얼굴을 물어뜯은 것도 아니고, 그냥 구경만
하고 간 것인데. 얼굴이 닳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민감하게
생각할 필요성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음. 뭐 델리만 님에게 허락을 받은 거라면 상관은 없겠
지."
이곳에 오기 전에 델리만에게 미리 허락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 듯, 그 중년엘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따라 오너라."
그의 등을 쫓아서 나와 쌍둥이 기숙사의 안을 향해 걸음을
움직였다.
현관을 지나 걸음을 움직이자 단순하지만 세련미가 느껴지
는 거실이 보였다. 그 중년엘프는 "이곳에서 기다려라."라고
간단하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휙 사라졌기에, 썰렁한 거실 안
에서 나와 쌍둥이들은 멍하니 누군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자야하는데."
티레스가 졸립다는 듯 푸념했다. 어제 초저녁에 잠들어서
오늘 아침에 겨우 일어난 것 같았는데. 참 곰돌이란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잠을 좋아하는 아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얼마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 중년 엘프와 내 또래 정도라고
생각되는 네 명의 엘프들이 접근했다.
아마 생김새는 내 또래라고 해도, 실제로는 거의 백 살 정
도는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 이것도 어느 정도 엘프들과
생활하다 생긴 경험이다. 100%정확하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대충 비슷하다고 할 정도는 될 자신이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내 정중한 인사를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하는 네 명의
엘프들. 그 중에서 한 엘프소녀가 네 옆에 나란히 서있는 쌍
둥이들을 바라보며 당황스레 입을 열었다.
"세레스, 티레스!?"
이 엘프소녀가 바로 쌍둥이들이 말했던 그 에린이란 엘프인
가 보다. 조금은 웨이브 진 금발을 허리까지 기른 단정한 모
습이, 평범한 인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너희들이 왜 이곳에?"
"이 인간 오빠가 기숙사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 둘이
안내해 준거야."
세레스가 대답하자, 그제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에린이란 이름의 엘프소녀.
'쌍둥이들이 자라면 저 모습과 비슷하게 될지도….'
성격이나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지만, 솔직히 생김새는 매우
닮았기에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 물론 쌍둥이들이
저 정도 모습으로 자랄 나이가 되면, 나는 거의 할아버지가
될 테지만. 적어도 상상하는 것은 자유니까 말이다. 이곳에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엘프가 없는 이상 괜찮은 것이겠지.
"무엇을 더 구경하고 싶으냐?"
중년 엘프가 잡생각에 빠진 나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내 또래의 엘프들도 구경했으니, 더 무엇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뭐해서.
"이제 충분합니다."
하고 말하며 쌍둥이들을 손을 부여잡고, 기숙사를 빠져나오
는 나였다.
어디선가 아련히 들려오는 새소리에 난 고개를 들어 올리고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 피곤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 생
각 없이 오랫동안 눈을 감은 탓인지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을
잔 모양이다.
"음?"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무엇. 회색의 털이 많고, 일반 개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크기가 큰 감이 없지 않게 있었다. -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가? 하고 생각해보지만, 볼을 간질이는
한줄기 바람의 느낌은 현실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선
명했다.
그것의 타오르는 램프의 빛과 같은 날카로운 두 눈은 나의
몸을 향하고 있었다.
'느, 늑대?! 늑대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참 바보 같은 생각이군. 늑대니까 숲에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말이다. - 젠장! 여하튼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순간 내가 몸을 일으키자 조금 움찔거리며 뒷걸음질하는 늑
대처럼 생긴 그 '무엇'. 괜히 적대적인 반응을 하는 것도 안
좋은 판단이겠고, 또 갑자기 달아나는 것도 바보짓이 될 테니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난 머리를 굴러야해 했다.
'일단 침착해야 한다.'
하지만 이 늑대처럼 생긴 녀석이 워낙 '존재감'넘치는 모습
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 내가 백전노장의 용병도 아니
고, 이런 상황에서 겁먹고 주저앉지 않으면 다행이지. '무슨
탁월한 임기웅변으로 늑대를 쫓아내다!'라는 것은 꿈과 같은
소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조금씩 떨려오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고, 난 그렇게 늑대
의 두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맛있는 먹이 감을 바라보는 탐
욕에 젖은 눈, 같은 것은 아니고 그냥 신기하다는 바라보는
눈이라는 느낌이랄까. - 눈빛으로 동물의 생각을 읽는 그런
거짓말 같은 능력은 내게 있을 리 없지만.
'한 걸음도 움직이지 말 것.'
카이츠가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물론 그런 약속 따위보다
야 목숨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아직 조금 여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말이다.
"젠장."
조금 시간이 흘러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상스러
운 말이 자연스럽게 입가를 맴돌았다. 그냥 도망갈까? 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 들이차서, 무엇하나 냉철하게 생각할
여유 같은 것은 개미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지겨워 지는 느낌도 들었다. 무슨 저 녀석이 침을
뚝뚝 흘리며 이빨을 가는 것도 아니었으니.
'모르겠다. 잡아먹든 말든 니 맘대로 해라.'
그렇게 반쯤 자포자기하고 어금니를 꽉 물며 녀석을 노려보
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녀석이 조금 더 날 바라보더니, 그냥 나무 사이로 슥 사라
지는 것이다.
"뭐, 뭐지?"
나 자신도 어리둥절해서, 늑대가 사라진 맨 땅을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 내 모습이 무서워 도
망간 것은 아닐 테고. 신기해서 좀 살펴보다가 흥미가 떨어져
그냥 가던 길 마저 간 모양이다.
순간 힘이 딱하고 풀려서 한숨을 쉬며 그렇게 바닥에 주저
앉았다. 긴장을 꽤 심하게 했던 모양인지 갑작스레 피곤함이
온 몸을 엄습하는 듯 했다.
언제 다시 잠이 들은 모양인지, 카이츠가 살짝 내 어깨를
흔들자 화들짝 놀라 난 몸을 일으켰다.
"아, 미안. 놀라게 한 것 같군."
"괜찮습니다."
조금 가위를 눌린 모양인지 식은땀이 서늘하게 등줄기를 스
치고 지나갔다. 내 굳은 표정을 조금은 근심스레 바라보며 카
이츠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
거짓말할 성질의 것도 아니고 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늑대처럼 생긴… 그런 것이 나타나서."
"늑대라고?"
조금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카이츠가 대답했다.
"깜박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회색 빛의 무엇인가 눈앞
에 아른거리더군요."
"그게 늑대였나 보군."
늑대는 원래 밤에만 활동하는 동물이라고 알고 있는데 왜
점심 무렵, 그것도 마을에 인접한 곳을 어슬렁거리는 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내가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면 그건 분
명히 늑대였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턱에 손을 집으며 고민
하는 듯한 제스츄어를 하는 카이츠. -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
르자 고개를 들어 올리고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음, 대충 짐작 가는 엘프들이 있긴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짐작 가는 엘프? 설마 그것이 진짜 늑대가 아니라 엘프였던
말인가?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자, 곤란하다는 듯 쓴웃음
지으며 카이츠는 입을 열었다.
"누군가 폴리모프한 것 같아. 미숙한 것을 보면 꼬맹이들
중에 하나일 것 같군."
"어떻게 미숙한 지 알 수 있습니까?"
"그냥 살펴보는 정도라면 늑대로 폴리모프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지. 새라던 지, 작은 짐승으로 폴리모프하는 편이 더 나
을 테니까 말이야."
확실히 그의 말 대로다. 늑대같이 눈에 확 뜨이는 것을 선
택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경험이 부족하다는 걸 알 수 있는 것
이다.
"엘프라는 종족이 워낙 장수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지 그래
서 몰라도, 인간으로 따지자면 기숙사 비슷한 곳이 있단다.
인간으로 따지면 거의 지금 네 나이 정도의 또래들이 생활하
는 곳이지. 내 생각에는 그곳의 꼬맹이들 중 하나일 것 같은
데 말이야."
엘프가 드물긴 하지만 그래도 인간과 묘인족을 제외하자면,
대륙에서 제일 넓게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디에선가
들어 알고 있었다. 여하튼 조금 무책임한 면모도 있는 듯 했
다. 아무리 뭐라 그런들 자신의 아이를 남겨두고 여행이라니
말이다. - 내 아버지 같은 경우는 조금 특수한 케이스니 그냥
넘어 간다고 해도.
'아들아, 난 여행을 다녀오마.'하고 휘리릭- 사라져 버린다
는 것은 조금은 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숙사는 어디죠?"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그다지 없는 거 같아서 의
아해했었는데. 기숙사 구경도 할 겸 한번 놀러 가는 것도 나
쁘지 않을 것 같아 난 그렇게 질문했다.
"마을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대충 바라보며 살짝 고개
를 끄덕였다. '그리 멀지 않다면 오늘이라도 한번 가보는 것
이 좋겠다'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며 말이다.
"아, 기숙사요? 에린언니가 다니고 있어서 확실히 알고 있
기는 하지만…."
아직 저녁식사 시간이 되기에 조금은 이른 시간, 세레스녀
석이 입을 열었다. 무엇인가 말끝을 흐리는 것도 같아서 난
다시 질문했다.
"에린언니는 누구지?"
"저희 둘보다 먼저 태어난, 말 그대로 언니죠.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아서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고요."
"꼭 기숙사에서 생활해야 하는 거야?"
"돌봐줘야 할 엘프가 마을에 없는 이상 100%겠죠.'
음, 대충 무엇인가 알 것 같기도 하다. '장수'한다는 것도
나름대로 애로사항이 있는 것이다. - 부모인 이상 자식을 기
르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겠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백
년 동안 자식 교육만 시켜라'라고 말한다면, 비웃어 줄 것이
틀림없다.
"저희 둘도 곧 기숙사 생활을 하겠죠."
이것은 어떻게 보면 악순환 아닌가. 어려서 구속받고 자란
것을 성인이 되어 충족하는 것, 그것이 반복되어 어느새 당연
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
그리 좋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또 마땅한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엘프들의 문화에 내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처지는 못되겠지만.
"흐음."
내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살지 못했기 때문인지 이런 면
에서는 조금 민감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인상을 찡그
리며 끙끙-거리기 시작하는 내 얼굴을 마주 바라보더니, 티레
스녀석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왜 기숙사에 대해 묻는 거야?"
"아, 한번 가볼까 해서…. 뭐 이곳에 관광 온 것은 아니지
만. 그래도 가만히 방에서 궁상떠는 것보다는 여러 군데 돌아
다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조금 얼버무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니
까. 굳이 '그 곳의 어떤 아이가 폴리모프해서 날 몰래 홈쳐보
려다 걸렸어'하고, 말할 필요성은 없겠지.
"그럼 그 기숙사로 안내해 줄래?"
"일단 델리만 님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기숙사
는 외부인 출입 금지라서 말이야."
건성으로 대답하는 티레스녀석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
는, 곧장 쌍둥이들의 방을 빠져나오는 나였다. 늦장 부리는
것보다는 어두워지기 전에 한번 기숙사에 놀러 가볼 생각이었
던 것이다.
보통 집보다 두어 배정도 큰 듯 하긴 했지만, 카이리온 기
사양성학교에 있는 기숙사에 비하면 굉장히 아담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뭐 이 마을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이
정도로도 부족하지는 않을 듯 싶지만.
'마음대로 해.'
문득,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대충 한 손을 휘저으며 말하
는 델리만의 모습이 떠올랐다. - 생각 외로 쉽게 승낙해서 조
금 무안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주춤하긴 했다.
여하튼 다시 꼬맹이들의 방으로 돌아가서 귀찮아하는 녀석
들 손을 부여잡고, 기숙사의 앞까지 터덜터덜 난 도달할 수
있었다.
기숙사의 문 근처에는 때마침 누군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고 했다. 내가 인기척을 내자 그 엘프가 뒤를 돌아보며 나와
쌍둥이들을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선생같이 생긴 중년 엘프였다. 그는 천천히 우
리 쪽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네가 이곳에 왔다는 인간들 중 하나인가 보군. 이 기숙사
에는 무슨 볼일이 있는 거냐?"
"아뇨, 단순히 구경을 하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내 또래의 엘프들을 보고 싶어서 온 거였지만
말이다. 그 폴리모프를 한 엘프를 발견한다면 더 좋겠지만,
순순히 자백하지 않는 한 불가능 할 테니. - 사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반쯤 포기하고 있었기에, 큰 생각은 하지 않기로 마
음먹었다. 뭐 내 얼굴을 물어뜯은 것도 아니고, 그냥 구경만
하고 간 것인데. 얼굴이 닳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민감하게
생각할 필요성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음. 뭐 델리만 님에게 허락을 받은 거라면 상관은 없겠
지."
이곳에 오기 전에 델리만에게 미리 허락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 듯, 그 중년엘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따라 오너라."
그의 등을 쫓아서 나와 쌍둥이 기숙사의 안을 향해 걸음을
움직였다.
현관을 지나 걸음을 움직이자 단순하지만 세련미가 느껴지
는 거실이 보였다. 그 중년엘프는 "이곳에서 기다려라."라고
간단하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휙 사라졌기에, 썰렁한 거실 안
에서 나와 쌍둥이들은 멍하니 누군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자야하는데."
티레스가 졸립다는 듯 푸념했다. 어제 초저녁에 잠들어서
오늘 아침에 겨우 일어난 것 같았는데. 참 곰돌이란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잠을 좋아하는 아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얼마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 중년 엘프와 내 또래 정도라고
생각되는 네 명의 엘프들이 접근했다.
아마 생김새는 내 또래라고 해도, 실제로는 거의 백 살 정
도는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 이것도 어느 정도 엘프들과
생활하다 생긴 경험이다. 100%정확하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대충 비슷하다고 할 정도는 될 자신이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내 정중한 인사를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하는 네 명의
엘프들. 그 중에서 한 엘프소녀가 네 옆에 나란히 서있는 쌍
둥이들을 바라보며 당황스레 입을 열었다.
"세레스, 티레스!?"
이 엘프소녀가 바로 쌍둥이들이 말했던 그 에린이란 엘프인
가 보다. 조금은 웨이브 진 금발을 허리까지 기른 단정한 모
습이, 평범한 인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너희들이 왜 이곳에?"
"이 인간 오빠가 기숙사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 둘이
안내해 준거야."
세레스가 대답하자, 그제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에린이란 이름의 엘프소녀.
'쌍둥이들이 자라면 저 모습과 비슷하게 될지도….'
성격이나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지만, 솔직히 생김새는 매우
닮았기에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 물론 쌍둥이들이
저 정도 모습으로 자랄 나이가 되면, 나는 거의 할아버지가
될 테지만. 적어도 상상하는 것은 자유니까 말이다. 이곳에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엘프가 없는 이상 괜찮은 것이겠지.
"무엇을 더 구경하고 싶으냐?"
중년 엘프가 잡생각에 빠진 나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내 또래의 엘프들도 구경했으니, 더 무엇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뭐해서.
"이제 충분합니다."
하고 말하며 쌍둥이들을 손을 부여잡고, 기숙사를 빠져나오
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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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 빨리 글 올리고 밥을 먹어야..
제 목: 38회 - http://chungeoram.com/zero/view.php?id=f_angryman&no=38
이 름 배진국 제 목 금단의페트 - promise - (58)
vol.058 promise
"에린언니 이쁘지 않아?"
"아, 그렇군."
뭐 엘프 치고 얼굴이 단정하지 않은 케이스는 보기 힘든 것
이 사실이었지만. 확실히 쌍둥이들의 언니라고 하는 에린이란
엘프는, 그런 엘프 중에서도 확연히 눈에 뜨일 정도로 예쁘게
생긴 것 같았다. 그런 것에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 나조차 가
슴이 뜨끔했을 정도니.
"후훗."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그런 날 바라보며, 세레스녀석이
조금은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하는 것 같았기에 조금 분노가 솟
구쳐 올랐다.
저런 꼬맹이녀석 말에 발끈해서 화를 낸다는 것도 좀 뭐 해
서, 대충 안 본 셈치고 무시했지만 말이다. - 쉽게 보인다는
것도 싫긴 했지만. 일일이 신경 쓰며 화내는 그런 피곤한 성
격이라 오해받는 것은 죽어도 사양이니.
"흐음."
예쁜 것은 예쁜 것이니까 말이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저번 축제 때, 자룬왕자와 춤을 추던
공주님이란 사람과 비슷한 정도? 내 눈이 100% 주관적이라고
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첫 인상에 확연히 가슴에 '무엇인
가' 와 닿게 하는 그런 케이스는 굉장히 드문 것이다.
요즘 들어서 쓸데없이 눈만 높아지는 것도 같아서 저절로
한숨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 조금은 변명 같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주위 환경 탓이 크다. 식당이나 학교에서 알고
지내는 아이린 씨나 엘리, 리체녀석도 정말 단정하게 생긴 편
인 듯 하고. 방학마저 엘프들 천지인 곳에 와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눈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궁시렁거리며 무엇인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내 얼굴을, 세레
스녀석이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
"내 주위에는 잘난 녀석들뿐이구나, 하는 생각."
"베리오빠도 꽤 귀엽게 생겼는걸. 너무 그렇게 좌절하지 말
라구."
윽, 저 녀석에게 귀엽다는 소리를 듣다니…! 화를 내야 하
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넘어가야 하는 것인가. - 생각 같아
서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남자가 소심하게 그런
것 가지고 화를 내냐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니.
사내녀석이 귀엽다는 말을 듣는 건, 어찌 보면 안 좋은 것
아닌가. 특히 자신보다 정신연령이 어린 녀석에게 그런 소리
를 듣는 다는 건 말이다. - 여자아이라면 몰라도 남자에게 귀
엽다는 칭호는, 내가 고전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서 인지 몰라
도 참 듣기 거북했다.
"헤헷, 난 거짓말 안 하니까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져도 될
꺼야."
딜레마에 빠진 나를 그렇게 다시 한번 좌절의 수렁으로 몰
아넣는 녀석의 결정타.
"티레스는 어떻게 생각해?"
세레스녀석만 보는 눈이 이상한 거야, 당연히 난 이렇게 생
각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인간이란 종족에 대해 동경을 가
지고 있었던 엘프니까 말이다. 적어도 평범한 사고방식을 가
지진 못했으니, '그렇구나'하고 납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응…. 귀여워."
"… …."
저 녀석이 하도 졸려서 지금 정신이 약간 오락가락한 것이
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수긍하며 빠르게 걸음을 움직였다.
"같이 가-! 귀.여.운 베리오빠-."
헛것을 듣고 있는 거다. 아니 설령 저것이 환청이 아니라고
해도 저 녀석들이 날 가지고 노는 것이다! - 아니, 설령 그것
이 사실이라고 해도 난 절대 믿지 않을 테다. 저런 근거 없는
잡소리에 흔들릴 내가 아니다.
… 그렇게 암시하듯 수없이 중얼거리며, 저녁식사를 하기
위한 걸음을 빠르게 움직이는 나였다.
"눈이 많이 차분해 졌구나."
"그런가요? 별로 달라진 것 같진 않은데."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하자, 언제나처럼 미소지은 얼
굴로 대꾸하는 카이츠 씨.
"아직 자신이 느낄 수는 없을 테지."
"으음, 그런가요…."
뭐 특별히 눈에 뜨이게 변한 건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래도 어느 정도 몸이 가벼워 진 것은 사실이었다.
기르디녀석이 육체적인 강함을 추구한다면 하면, 카이츠는
무엇인가 정신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할까. 여하튼 조금은 그
런 느낌이 들었다. - 지금은 확실히 뭐라 말할 수는 없겠지
만, 역시 강함이란 것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개인차가 있는 것
같았다.
'벌써 꽤 시간이 흘렀군.'
어느새 이 숲에 온 지도 열흘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엉뚱한
곳에 텔레포트해서 고생할 때만 해도 식당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지금은 뭐 돌아간다고 해도 그만, 가지
못한다고 해도 그만인 듯 하다.
"시아라는 아이는 언제 돌아온다고 했지?"
"아마도 내일인가…. 그런 것 같군요."
이틀 전인가, 시아녀석이 한밤중에 내 방에 찾아와서 이렇
게 말했던 것 같다.
'잠시 며칠 간 다녀올 곳이 있어요. 위험한 곳이 아니니 걱
정하지 마세요.'
어디를 가는 것이라고 말 하지조차 않았는데 걱정하지 말라
니. 물론 나도 같이 동행하려고 했으나 예상외로 녀석이 화내
며 반항한 덕분에 결국 말싸움까지 하게 되었다. - 녀석의 고
집이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억세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응, 그래 잘 다녀와'하고 순순히 보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결국 델리만에게 어느 정도 사정을 들은 후에 녀석을 보내
줄 수 있었다. 예전에 녀석에게 심한 말을 한 것도 사과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다시 말싸움을 해서 사이가 더 벌어진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속이 깊은 아이니까 나중
에 잘 말하면 괜찮아 지겠지'하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휴…."
시아녀석만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지는 듯 했
다. 녀석이 무엇인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
었지만, 요즘 들어서 그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말이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나는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주지 못하는 나 자신
이 한심했다.
'나 같은 존재는 죽어도 상관없다'라는 말 따위를 하고 있
는 시아녀석은 정말 싫다. 설령 남들이 비겁하다고 욕 할 지
라도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주었으면 하는 것이 내 진심이었
다.
녀석과 나는 근본적인 가치관부터 다른 것 같다. 착하고 순
수한 것도 좋지만 자신을 위해서 어느 정도 이기적으로 행동
하는 것이 나는 더 바른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면 몰라도 자신의 앞가림조차 하지
못하면서 남을 도우려 한다는 것은 바보짓이다.
'이래서 내가 친구를 사귀기 힘든 거일지도.'
뭐 내 인생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니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순 없겠지만, 그래도 수동적으로 남에게 맞춰서
사는 건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다.
"잘 되겠지."
무엇인가 착잡한 기분에 한숨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
는 나였다.
빠르게 시간이 흘러, 시아녀석이 돌아오고 다시 며칠이 지
난 어느 날 아침. 쌍둥이들이 방의 문을 열고 들어와, '델리
만 님이 불러'라고 귀찮다는 듯 내게 말했다.
사실 나와 시아를 돌봐주는 한 여자 엘프가 있는 듯 했지만
말이다. 급한 볼일이 생겼을 때 나에게 말을 전해주는 임무는
쌍둥이들의 몫인 것이다. - 간혹 이렇게 아침에 졸린 눈으로
전달사항을 말하는 녀석들이 조금은 불쌍하기도 해서. '뭐 나
중에 이곳에 다시 오게 된다면 조그만 선물이라도 들고 와야
겠다'라고 생각하는 나였다.
여하튼 그 노인네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대충 옷을 갈
아입고 털레털레 걸음을 움직였다.
간만에 몸을 조금 움직인 까닭에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삐거덕거리며 성화였다. 하지만 기분만은 상쾌했다.
사실 어제부터 조금이지만 카이츠에게 검술을 배울 수 있었
다. 그냥 기본 적인 동작일 뿐이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
다는 천국이라고 말할 만큼 좋은 게 사실이었다.
"음, 왔군."
노크를 한 후 문을 열고 들어가자, 델리만이 보던 책을 한
쪽에 치우더니 날 바라보며 주름살 가득한 입을 열었다.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는가?"
"네, 괜찮습니다."
내 에로사항을 알기 위해 부른 것은 아닐 테고, 이 늙은이
가 성격답지 않게 얼어죽을 안부냐. 뭐 인사치레지만 나를 걱
정해주는 것이니 고맙게 여겨야겠지만 말이다. 조금 뜸을 들
이더니 곧 한숨쉬며 입을 여는 델리만.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도 좋다."
"네?"
그 곳이라면, 다시 수도에 있는 식당에 돌아가도 된다는 이
야기인가. 방학 내내 이 숲에서 지내는 것을, 마음속으로 거
의 확정하다시피 했기에 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싫은가?"
"아뇨, 이렇게 일찍 보내줄 것이라 생각지 못해서."
"볼일도 다 끝난 것 같은데, 더 붙잡아봤자 뭐에다 쓰겠
나…."
하긴 나 같은 녀석 더 오래 잡아둬 봤자 쓸모 없는 것이 사
실이지. 뭐 힘이 센 것도 아니고, 특별히 쓸모 있는 일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 조금 자학적인 것도 사실이지
만, 적어도 난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할 만큼 바보는 아니
다.
"네, 그럼 오늘 돌아가는 것입니까?"
"마음대로 하게. 언제든 돌아가고 싶으면 내게 찾아오면 되
니까."
귀찮다는 듯 대충 대답하고는 한 쪽에 치워두었던 책을 집
어 드는 델리만.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문을
열고 방을 빠져나가는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