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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지 않아

구본길 |2007.04.18 01:54
조회 2,014 |추천 8

후회하지 않아 (No Regret, 2006)

 

 

감독

이송희일

 

캐스트

이영훈......수민

이한......재민

김정화......재민의 약혼녀

조현철......정태

김동욱......가람

정승길......마담

 

 

이 영화는 퀴어무비(Queer Movie)입니다

 

  독특한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 중엔, 그 소재 자체의 매력을 과신한 나머지 그에 함몰되고 마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기껏해야 한 줄 가량 되는 소재가 모든 것의 면죄부가 될 거라고 믿는 거죠. 그 한 줄을 영화 한 편으로 만들기 위해 사이사이에 여기저기에서 가져온 클리셰들을 억지로 끼워 넣고서 외치는 겁니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무엇무엇을 다룬 무슨무슨 영화로서 이런저런 장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흔한 일이죠? 원작을 완전히 망쳐놓은 '퇴마록' 이나 '비천무' 는 말할 것도 없고, 독특한 주제를 다뤘다는 것 외엔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긴급조치 19호 ('다세포 소녀' 전까지는 '영화보다 영화평이 더 재미있다는' 유일한 영화였죠)', '여고괴담 3 - 여우계단' 생각도 나는군요. 몇 해 동안 쏟아져 나온 한국 공포-스릴러 영화들을 보세요. '분홍신', '아랑', '아파트'... 특히 성공적이지 못한 몇몇 영화들은 '아니, 그 사람이 범인이었단 말이야?' 한 마디로 요약 가능합니다.

  관객들은 그 소재를 보러 영화관에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야 합니다. 사실 대다수의 관객들은 그 소재가 어떻게 다뤄지는가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어요. 관객들은 '영화' 를 보러 영화관에 가는 겁니다. '후회하지 않아' 에 만만치 않게 독특한 소재를 다뤘던 '타짜' 와 '천하장사 마돈나' 는 이런 사실을 영민하게 잘 꿰뚫고 있었어요. 감독들은 '화투'나 '트랜스젠더' 에 대해 잘 아는 척 하면서 이것저것 늘어놓는 대신에 그에 얽힌 인간 군상들을 독특한 각도로 잡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동성애' 는 조금 다르죠. 워낙 충격적이잖아요. 지금까지 동성애를 전면에 내세웠던 한국 영화는 '로드무비' 가 유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에 익숙하기보다는 호기심을 갖고 있는 2006년 한국에서 본격 퀴어멜로를 표방한 이송희일 감독의 퀴어무비 '후회하지 않아' 는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과연 이 영화가 동성애를 얼마나 '잘' 다루었는가입니다.

 

 

정말 후회하지 않아요?

 

  '후회하지 않아'는 언뜻 스크린에 전이(轉移)된 야오이(やおい)에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곱상하게 생긴 두 주인공들, '호스트바 선수와 재벌 2세(엄밀히 말하면 재벌은 아니죠)' 와 같은 것들은 전형적인 야오이의 플롯이잖아요. 야오이에 익숙하지 않다면 주인공이 둘 다 남자인 순정만화나 트렌디 드라마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연기하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핏, 웃음이 나게 하는 순정만화 대사들을 보세요. "내가 가난해서 싫어요? 돈 많이 벌게. 내가 무식해서 싫어요? 나, 공부 열심히 할게. 내가 더러워서 싫어요? 나 형만 볼게..." "당신은 부자여서 도망갈 곳이 있겠지만, 난 아무 곳도 없어." 각본까지 직접 맡은 이송희일 감독의 문재(文才)를 칭찬하기는 쉽지 않군요.

 

재민

 

  어쨌거나, 수민은 가난하고 못 배운 노동자입니다. 재민은 모든 걸 다 가진 (심지어 약혼녀까지 가진) 재벌 2세고요. 재민은 수민이 일하는 공장 이사의 아들이고 대리운전을 하러 온 수민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러다 수민은 공장을 나와서 게이 호스트바에서 일하게 되고 재민은 그 호스트바에 손님으로 찾아오면서 계속 수민의 주위를 맴돌다가 자기를 돈으로밖에 생각 안 하는 수민에게 집착하다가 주먹질도 몇 번 하고 그러다 같이 잠도 자고...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잠시 보여준 뒤에는 억지로 약혼녀와 결혼하게 된 재민의 고뇌도 보여주고...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종반부의 국면 전환 전까지 영화는 철저히 짐작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동안 영화가 얘기하는 건 '가난한 게이와 부자인 게이가 만나서 사랑을 했다' 가 전부고요. 물론 이 한 문장을 영화로 늘여놓기 위해 사이사이에 별 개연성 없는 다양한 것들이 삽입됩니다. 노동자와 재벌 사이의 계급 갈등도 있고, 돈에 대한 고뇌와 경고도 있고 '서울에서는 말야, 아무도 믿으면 안 돼.', 또다른 짝사랑 이야기도 있어요. (가람의 짝사랑은 후의 국면 전환에 큰 역할을 합니다) 호스트바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를 다룬 씬들은 당연히 왕왕 등장하죠. 볼거리가 많으니까. 재민의 사격장 씬 같은 것들은 정말로 '순정만화 왕자님' 의 포스를 확확 풍기고요. 이 흩뿌려진 사건들이 왜 일어났는지를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머리 아플 테니까. 실제로 별 관계 없이 벌어지는 일들이기도 하죠. 몇몇 씬은 아예 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들이 사랑을 했다' 만 기억하면 됩니다.

 

수민

 

  소재를 너무 과신한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성적(性的)으로 꽉꽉 막혀있는 2006년 한국에서 동성애라는 소재는 자극적이기는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딱 좋죠.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 다루기는 꽤 까다롭습니다. 기실 할 얘기가 많지 않거든요. 이 캐릭터는 게이다. 남자를 사랑해. 그런데 어쩌라고요?

  남자 둘의 사랑을 다룬 영화라면 베드신은 굉장히 강렬해지겠지만 그렇다고 할 얘기가 솟아나는 건 아니죠. 동성애 혹은 동성애자를 다룬 영화들이 성장영화나 멜로영화에 집중되는 이유가 뭐겠어요. 할 얘기가 그것뿐이니까 그렇죠.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게이들이 '주인공의 친구' 정도로만 등장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게이가 주인공이면 이 두 가지 말고는 사실 할 얘기가 별로 없거든요. 설마 게이가 주인공인 공포영화를 찍겠어요? 그건 그냥 공포영화지 퀴어영화가 아니잖아요.

  퀴어무비라면, 성적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다가 결국엔 그것이 자신의 원래 모습인 것을 깨닫게 되거나, 동성과 힘든 사랑을 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둘 다인 경우도 있지만) 골라야겠죠? 이 영화는 후자입니다. '후회하지 않아' 의 두 주인공은 동성애자로서의 자신을 명확히 인정하고 있거든요. 이 경우 게이 캐릭터들을 데리고 멜로를 연출하는 데 있어서 감독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아예 쓸모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퀴어멜로를 찍을 때 필요한 것은 멜로에 대한 감각인 것이지요.

  멜로를 만들 때 많은 감독-작가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순정만화 공식 말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긋지긋한 '불치병'과 '출생의 비밀' 이겠지요. 이렇게 하면 관객들이 울겠지? 캐릭터를 이미 정해진 노선에 따라 고통스럽게 하고, 그러다가 사랑에서 구원을 발견하게 하고... 불행히도 이송희일 감독은 소재의 함정과 멜로영화의 함정 모두에 빠져버렸습니다. 동성애라는 유니크한 소재에 지나치게 의지한 나머지 관객을 몰입하게 할 '이야기' 를 치밀하게 구성하는 데 실패했어요. 그 결과 '후회하지 않아' 의 이야기는 진부한 순정만화의 공식을 따르게 됩니다. 동성애 + 순정만화 공식 = 자연스럽게 야오이와 비슷한 모양새가 나올 수 밖에 없지요.

 

 

응,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이 영화를 단순히 '스크린으로 옮긴 야오이' 로 완전히 단정짓기는 아직 이릅니다. 이 영화는 야오이의 공식들을 답습하면서도 나름대로 그것들을 파괴하려 노력하고 있거든요. 그러는 도중에 흥미로운 변주가 일어나고요. 예컨대 재민과 수민의 남녀 역할 관계에 대한 것이 그렇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감독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꽤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동성애 관계에서 남성-여성의 역할을 적용시키는 것은 기실 웃기는 농담에 불과할 테지만, 우리는 흔히 동성애자들을 '남성적인' 쪽과 '여성적인' 쪽으로 분리해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야오이에서는 그 역할이 보통의 순정만화와 동등할 정도로 거의 완전히 분리되고요. 여성적이고 수동적인 수(守)와 남성적이고 능동적인 공(攻)이라는 역할 이름까지 정해져 있죠.

 

재민과 수민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에서 이 남녀 역할 관계는 꼬이고 꼬이다 무의미해집니다. 특히 감독이 게이들에게 씌워지는 '여성적이다' 라는 혐의를 벗겨내려 노력한 티가 많이 나요. 욕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주먹질도 많이 하잖아요.

  시놉시스를 읽으면, (특히 야오이적인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가난한 호스트 수민이 여자 역할, 재벌 2세 재민이 남자 역할을 맡을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보육원에서 자란 수민이 아무 것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반면에 모든 것을 다 가진 재민은 그 모든 것들에 끌려다니느라 수동적으로 삶을 사는 소심한 성격이에요. (이 수동적인 성격 때문에 수민이 약혼녀를 만나 청첩장까지 받아오게 만들잖아요) 어쨌거나 처음 만난 수민에게 빠져버린 소심한 재민은 수민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사랑을 애원하고요.

  그러다 재민을 때려눕힌 수민이 불현듯 그에게 키스하면서 시작된 연애에서 그 관계는 다시 바뀝니다. 두 번째의 베드씬에서 재민과 수민의 위치가 바뀐다는 것에 주의하시길. 둘이 같이 섰을 때 재민이 수민보다 훨씬 크다는 것도 기억할만 합니다. 능동적인 수민은 수동적인 재민에게 안기죠. 물론 이 이후에 또 다시 수동적인 재민이 (...) 해서 (...) 한 수민은 능동적으로 (...) 하게 되지만 이 부분은 스포일러일 테니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죠? 중요한 것은, 정말로 야오이스러운 역할을 부여받은 캐릭터들이 그 역할에 안주하는 대신 변화를 꾀했다는 점입니다.

  영화가 그 야오이성(性)을 지워내려 부단히 노력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또 다른 부분은 (호스트바에서의 노출씬을 포함한) 베드씬들입니다. '후회하지 않아' 의 베드씬들은 그 수위가 굉장히 높지만 야오이식으로 결벽하게 미화되지도, '로드무비' 에서처럼 노골적으로 (그리고 이성애적으로) 밑바닥까지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배우들이 긴장했다는 게 좀 보이긴 했지만 (누가 긴장 안 하겠어요) 영화는 서로 사랑해서 섹스하는 둘의 모습을 정제되지 않은 채로 덤덤하게 보여줍니다.

 

후회하지 않아

 

  '정제되지 않았다' 는 점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예컨대 (나쁜 의미에서) 연극적인 순정만화 대사들은, 몇몇 심각한 장면에서 웃음을 나게 하는 건 사실이지만 흔히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련되고 매끈하게 (즉, 느끼하게) 빠지지도 않았습니다.

  분명히 이송희일 감독의 문재는 대단한 것이 못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려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날것으로 내놓은 점은 이 영화에 나름의 생동성을 부여합니다. 이 영화의 대사들은 김수현처럼 배우의 모든 것을 하나 하나 통제하는 각본이 아니라, 그 배우에게서 나오는 말들을 그러모은 데서 나왔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욕이 이렇게 어색하지 않게 들리는 영화도 흔치 않을 거에요.

  연기도 그렇습니다. 이송희일 감독은 박찬욱 감독처럼 연기자에서 미장센까지 하나 하나 틀어쥐고 극을 이끌어 나갈 능력은 없지요. 어설프게 배우들을 통제하는 대신 감독은 원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캐릭터들을 맞췄습니다. 작은 영화인 탓에, 배우들에게 관객들이 곧바로 떠올릴 만한 어떤 이미지가 없었다는 점도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이영훈의 커리어는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에 한 번 출연한 것이 전부고 이한도 TV 드라마에서 종종 보이긴 했지만 비중있는 역할을 맡는 스타는 아니었으니까요. 다행히도 배우들은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 연기했고요.

  심지어 큰 영화에서도 주인공을 제외한 인물이라면 (가끔 불행히도 주인공까지 그런 경우도 있지만) 국어책 읽는 어색한 연기를 보여주는 건 꽤 흔한 일입니다. '행인 3' '소녀 2' 처럼 비중이 작은 역할일수록 더 그렇죠.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의 연기자들은 살아 있습니다. 호스트바 마담 아저씨는 정말로 마담 같고, 가람은 정말로 가람 같아요. '수민의 대사를 읽고 있는 이영훈' 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 수민' 처럼 느껴져요. 쉽지 않은 캐릭터를 선택한 연기자들의 노력이 피부로 와 닿습니다. (영화에 대한 호평으로서) 수민과 재민은 정말 '게이같아요'. 굳이 유난히 여성스럽게 행동하지 않아도 그들의 연기엔 일정 부분 '진심' 이 담겨 있습니다.

  이 영화가 디지털 방식으로 제작되었다는 것도 짚고 넘어가야겠군요.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지나치게 밝거나 지나치게 어두운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깊이 없는 거친 디지털 화면엔 2D 화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독특한 느낌이 있습니다. 특히 자주 등장하는 '서울의 밤'이나 국면 전환 이후의 '야만의 밤' 에서 이 거친 느낌은 바스락거리는 미묘한 감성으로 살아나지요.

 

후회하지 않는대요.

 

 

야만의 밤, 그리고 후회하지 않아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야만의 밤' 이었다고 하더군요. 아까 말했었죠? 종반부에 국면 전환이 있다고. '야만의 밤' 은 그 국면 전환에 관한 겁니다. 여기서 그 내용을 구구절절히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영화는 그 국면 전환에 큰 무게를 싣고 있거든요. 다만 실제로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은 꽤 슬퍼요. 아무리 노력해도 영화 내내 펼쳐진 순정만화 스토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거겠죠. 위에서 언급한 '소재의 함정' 에 다시 빠졌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앞에선 '동성애' 를, 결말 부분에선 '야만의 밤' 을 과신한 거죠.

  멀티 엔딩인가? 싶을 정도로 많은 결말을 (반전이라고 말해도 되겠지만 너무 약해요) 나열하는 영화의 최종 결론에 대해서는 이렇게 힌트를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하나, 이 영화는 일반적인 퀴어무비의 결말과는 다른, 그러나 우리에겐 이미 낯익은 결말을 취하고 있습니다. 둘, 이 영화의 제목은 '후회하지 않아' 이지요. '야만의 밤' 이 아니라.

 

약혼녀. 알고 보면 이 영화의 제일 큰 피해자는 약혼녀일 겁니다.

 

  '후회하지 않아' 는 작은 영화입니다. 심지어 브로슈어도 없어요. 제작비는 1억원 가량이고 배우와 스태프들은 50만원의 개런티를 받았죠. (물론 흥행수익에 따라 더 지급되는 러닝 개런티 방식이었죠. 50만원만 받은 건 아닙니다) 순정만화 이상의 스토리 라인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지만, 감독은 대신 이 영화가 작은 영화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작은 영화' 에서만 가능한 것들을 시도했습니다. 다루고 있는 이야기 자체는 얄팍하지만, 그것이 영화 속에서 구체화되는 모습은 상당히 생생해요. 의도적이든 우연한 것이든 그 정제되지 않은 느낌은 새롭게 다가오지요.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겨우 전국 아홉 개의 영화관에서 개봉한 '후회하지 않아' 는 12월 3일까지 34,722명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본 게 12월 20일이고 아직도 상영중이니 어쩌면 4만 명도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예산이 워낙 적었으니 이미 손익분기점은 훌쩍 뛰어넘었을 테고... 이정도면 저예산 독립영화로서는 신화적인 수치입니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기 힘들 거에요.

  물론 ('좋은 영화, 나쁜 영화' 에서 말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가 내게도 좋은 영화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특히 퀴어무비라는 특징상 34,722명이라는 숫자를 달성한 데 '특정 관객' 들의 힘이 컸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지요. '소재' 의 힘도 워낙 강력했고요.

  하지만 결코 영화 자체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후회하지 않아' 는 많은 사람들이 저예산 독립영화에 대해 가지고 있던 관념, 즉 방에 틀어박혀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손목을 긋는 주인공, 현실과 환상을 뒤섞은 듯한 미장센, 뚜렷하지 못한 스토리 라인... 등을 한 방에 날려버렸습니다. 진부하다는 말은 곧 익숙하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익숙하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관객들에게 익숙하게 다가간 최초의 독립 영화인 '후회하지 않아' 는, 아마도 오랫 동안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

  오프닝 타이틀부터 엔딩 크레딧까지 이 영화가 줄곧 던지는 메시지는 낯설지만 익숙하고, 진부하지만 새롭습니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영화는 계속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사랑하라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고요. 후회하지 않을 만큼.

 

 *20061221

 

 

그리고 남은 이야기

 

1. 야오이(やおい) : '야마나시(やまなし, 山無し)', '오치나시(おちなし, 落ち無し)', '이미나시(いみなし, 意味無し)'의 앞 글자를 딴 말. '클라이맥스도 결말도 의미도 없는 만화'라는 뜻으로, 일본 특유의 동성애 만화 장르를 일컫는 말이라고 해요.

 

2. 퀴어(Queer) : 사전적 정의는 '기묘한' '기분 나쁜'이란 뜻이지만, 이성애자들이 경멸적으로 혹은 동성애자들이 스스로 풍자적으로 가리키는 속어가 되었다고 합니다. '퀴어 무비' 는 동성애-혹은 동성애자를 다룬 영화가 되겠지요.

 

3. 이한은 요새 브라운관에 얼굴을 많이 비추더군요.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다고 보면 되겠죠.

 

4. 이송희일 감독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커밍아웃한 게이 감독이라고 하지요.

 

5. 영어 제목이 'no regret' 일 줄이야...

 

6. 복숭아 프로젝트의 이병훈씨가 음악 감독을 맡았습니다. OST도 발매되었더군요.

 

7. 역시 영화의 꽃은 여우(女優)입니다. 남자들만 나와서 우중충하던 영화에 김정화씨가 등장하니 (문자 그대로) 화면이 밝아지더군요. 원래는 약혼자 역할에 문소리씨가 우정출연하기로 했었는데 스케쥴 관계상 김정화씨가 대신 했다고 하죠. 김정화씨도 조만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이런 사적인 감정...)

 

8. (그래 봐야 다 남자들이지만서도) 노출 수위가 심합니다. 민망함 조심하시길.

 

9. 지금 기사를 보니 관객 5만명을 돌파했다고 하는군요. 5만명이라니... 축하합니다!

추천수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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