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문창현
|2007.04.23 18:32
조회 51 |추천 2
한번쯤 하루키에 미쳐본 적이 있고, 이승환이나 유희열, 김동률류의 가사에 대책 없이 현혹 당해 눈물 흘려본 적이 있다면, 신해철이나 이소라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녹음해 가며 들어본 적이 있고 신경숙이나 공지영, 이상이나 기형도의 문장을 줄그어 외거나 수첩에 베껴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틀림 없이 글쓰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부류는 대개 이르면 열다섯살에서 부터 열여덟 열아홉, 드물게는 스물 대여섯살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텍스트에 대해 상당한 자족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로 인한 프라이드에 힘입어 문학에 대해 은근한 야심을 품고 있거나 자신의 작문력에 대해 평균 이상의 나르시즘에 빠져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이 쓴 글을 수차례 되읽고 음미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는건 그들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쓴 텍스트를 즐겨 음미하는 행위는 어쩐지 대단히 유치하고 낯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설사 자기에게 그런 버릇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순순히 고백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어느날 바람에 떨어져 나 뒹구는 마른 잎새를 보다가 떠오른 한줄의 문장은 당장 노트나 메모지를 꺼내 기록해두지 않으면 안되는 아주 절실한 것이다. 텍스트란 그들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욕구 분출구이자 위로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러한 부류에 의해 쓰여진 글들은 보통 논리나 이성에 의해 마름질되기 보다는 직감과 영감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조작되거나 덧칠된 것일 확률이 높다. 텍스트를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 위해'라는 상식적인 도구가 아닌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텍스트만이 나의 탈출구이기 때문에'와 같은 언뜻 들어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펜을 드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디든 무엇이든 적어 내려가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이유는 말 그대로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고 느끼기(혹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때, 그저 소박한 습관의 일부로 일기를 기록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혼동하진 말아야 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글쓰기에 이유 같은 건 없다. 각별히 글쓰기를 좋아하지도, 글을 쓰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들이 쓰는 글들은 그저 간단한 일기이거나 일기에 대한 순수한 감정의 기록일 뿐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자들은 그게 무엇이든, 모든 복잡 다양한 감정을 텍스트로 소화해내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 풍부한 감수성을 발휘해 '나름대로 한 문장 한다는' 자들이다.
그들의 문제는 바로 그 '감수성'에 있다. 감수성은 이성이나 논리와 달리 옳고 그름이나 참 거짓의 잣대로 측정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에 그에 의해 쓰여진 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설이나 논설문류의 글들은 얼마나 논리 정연한 사고를 하고 있느냐가 좋은 글과 나쁜글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만 감수성과 같은 영감에 의해 휘갈겨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텍스트들은-에세이나 시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읽는 이 개인의 기호와 코드에 따라 멋지구나 별로구나 하는 것이 가려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텍스트들은 자기반성이나 스스로에 의한 객관적인 고찰 없이 그저 남겨지고 읽혀질 뿐이다. 또한 영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말 그대로 感, 느낌이다. 감수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본능 중에 비교적 무결한 본능이다. 그러나 본능이란 곧 말초적이라는 것과도 같기 때문에 思考에 의해 다듬어지지 않은 아닌 감수성, 그 원초적인 기록은 말초적인 단어와 말초적인 소재에 갇힐 수 밖에 없다. 결국, 순간의 영감에 의해 휘갈겨진 글은 언뜻 보면 순수하기 그지없는 감정의 표출 같지만, 그래서 더욱 강렬해 보이지만, 실은 내용상의 깊이라던가 의미 있는 사색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든, 어디까지나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결과물에 그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 글을 쓰는 자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글을 쓰지만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그들에게 보다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글을 쓴다. 게 중에는, 처음부터 읽는 이들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는 부류도 있다.
물론, ~한 글이 매력적이라고 평가 받을만한 것이다, ~한 것은 매력의 탈을 쓴 쓰레기일 뿐이니 잘 구분하라, 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읽는 이가 아니라 쓰는 이다. 부끄러운 것은 아무도 모르게 자신이 쓴 글의 조회수를 올리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노트 혹은 온라인에 '뜨겁게' 남긴 텍스트가 자기애에 갇힌 조악하고 비생산적인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자신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일이다. 겨우 그런 무의미한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多讀을 가장하거나 다른 문장가들의 문장을 교묘하게 재구성하기를 망설이지 않는 일이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누구나 동등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심지어 '간편하게' 텍스트화 하여 공유 할수 있는 세상이 되면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예전엔 미처 몰랐던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발견했을 것이다. 답답한 심정을 온라인에 풀어내면서 자신을 정화하는 행위는 예전부터 꾸준히 일기를 써 온 사람이 아니라면 새삼 매력적으로 다가올 만하다. 그러나 글쓰기 버튼을 눌러 쓰기를 마친 뒤 '등록' 혹은 '완료' 버튼을 누르기 전에 부디 그것이 과연 공개할 만한 것인지,자의적으로 심각하게 왜곡되었거나 과장, 부풀려진 부분은 없는지, 정말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맞는지, 어딘가 남의 것을 자신의 것처럼 탈바꿈 시켜 놓은 부분은 없는지, 오로지 읽는 이에게 매혹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거짓을 말하진 않았는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내 게시판에 내가 글 올리는 데 남들 눈이 무슨 상관이냐고, 제발 순진한 얼굴을 하고 물으려 들지 마라. 당신이 '등록' 버튼을 누른 순간, 당신의 글을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모르는 척, 잊은 척 하지 마라. 다른 사람의 시선 같은 건 상관없다고? 그 대답이 쿨 해 보이는가? 그것은 당신의 착각이다. 그 대답이 얼마나 불안하고 볼품없는 변명인지는 다름 아닌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건 지극히 소수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사실 문장을 즐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독서량이 풍부하고 세상과 삶에 대한 통찰력이 남다른 사람들이다. 그들의 글이 현란할 때는 명분이 있고, 어려울 때는 이유가 있다. 다짜고짜 감각어나 한자어를 남발하여 자신의 지적 수준을 과시하려 드는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동기가 불순한 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얼치기들은 더욱 빨리 발견된다. 자신이 공작의 깃털을 단 까마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김명은 (http://www.cyworld.com/ofev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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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매우 공감되는 글. 적어도 초반부에 말한 부류에 속하는 지라, 지난 시절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서 방황하던 정서적 갈등의 글들은 한순간 꽃을 위한 비료가 되어버렸다. 생각해보면 제대로 된 꽃송이 하나 피우지 못한 썪은 비료. 유리를 깨뜨려서 손을 베어봐야 아프다는 걸 깨닫는 사람처럼 좁은 세상에 갇혀 살아온 듯 하다.
분명 누구나 한 번 쯤 게시판에 글을 쓰면서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을거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이지? 스스로를 향해 끊임없이 반문해보지만 역시 한 가지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쓰는게 좋다는 것. 그래. 그건 분명 나만의 세상에서 바깥을 향해 분출된 감정이다. 온갖 종류의 감정의 표출. 결국 내가 간과한 것은 글을 읽는 사람이 내가 아닌 타인이라는 사실이다. 중학교 때 노트에 빼곡히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붙이며 글을 쓰던 행위는 추억을 기록하는 일기이자 시간을 기록하는 수단이었다. 그게 순수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쓰고 있는 글은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읽혀지는 의도되고 조작된 글이 아닌가. 그 어떤걸로도 소통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거리에 침을 뱉 듯 무책임하게 내뱉던게 이 게시판에 올린 글이이 아닌가. 거대한 전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훝어보며 흡족한 미소를 띄우던 나르시스트와 도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한동안 여태껏 써온 글에 대해서 자책스런 후회감 마저 밀려온다. 휑한 방구석에서 무색의 벽을 보고 마주 하고 서있는 듯 하다. 인터넷이 아무리 쓰레기가 넘쳐 나는 곳이라고 해도, 공간의 낭비라는건 새하얀 도화지 위에 점 하나를 찍는 것보다 못하다. 누군가가 겸손치 못한 우월감과 잘난 맛에 써내려간 글이라고 비난한다해도 이렇다할 변명 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휘황찬란하게 그림을 그려놓고 추상화라고 우겨대도 사람들이 전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불행한 화가처럼 글을 썼으니깐.
나는 사진을 마구 찍어대는 디지털 카메라 보다는 한 장 이라도 정성들여 조심스럽게 셔터를 누를 수 있는 수동 카메라가 더 정이 가는 사람이다. 글 또한 수동 카메라와 같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쓸 때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써내려가야만 한다. 한때 시인 이상을 동경하며 미친듯이 생각나는대로 글을 쓴 적이 있었지만 내가 쓴 글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글이 난해하고 어려운게 아니라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붕어 한 마리 잡아놓고 어탁을 떠서 홀로 감탄하면 무얼하나. 다른 사람들 눈엔 그저 작은 물고기 뿐인데.
나의 눈 보다는 대중의 눈이 더 정확할 것이다.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은 진리다. 겸손의 미덕이 필요하다는게 아니라 한 번 쯤 이라도 글을 쓰는 이유를 생각해보자는 거다. 오늘 김명은 씨의 글을 읽은 후에 반성의 사유를 가졌다기에는 부족함이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앞으로 글을 함부로 쓰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텍스트의 남발은 이제 더이상 없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