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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장로 지지도가 높은 이유[Resting 페이퍼]

구헌서 |2007.04.30 22:20
조회 66 |추천 1

사람들이 누군가를 지지할 때는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그에 대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현재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는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는 것이고 분명한 결과가 드러나기 전에 거품이니 뭐니 하는 것은 별 효과 없는 흠집 내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실 이명박 장로에게는 매력적인 요소들이 많이 보입니다.


첫째로 그가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는 점입니다. 이명박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는데 그는 어려운 형편으로 인해 저학년 때부터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옷감 장수인 아버지를 따라 영덕, 홍해, 안강, 곡강 등 포항 인근의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했던 것입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가난하게 살아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명박 전시장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둘째로 그가 어려운 와중에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부모님을 도와 일을 하면서 모자란 시간으로 공부를 한 그는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 어려운 가정환경이다 보니 집에서 등록금을 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명박을 불쌍하게 생각한 이태원 시장 사람들이 등록금을 융통해주고, 일자리도 주선해 주었습니다. 새벽 통행금지가 해제되자마다 시장의 쓰레기를 갖다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놀면서 대학시절을 보낸 것이 아니라 숱한 고생을 겪으면서 대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한 이명박 전시장의 삶의 태도는 인정 받을 만합니다.


셋째로 그가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5.16 군사정권의 강압통치 시기에 대학생들은 군사정권의 한일회담을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3학년생인 이명박은 상과대학 학생회장에 출마하였고 40표의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 후 6.3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계엄사령부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았고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실제 복역 시간은 반년 정도였는데 1964년 6월 말에 들어간 서대문형무소 생활이 그 해 10월 말에 끝난 것입니다. 그 후로 이명박의 신분은 자유롭지 못했는데 6.3사건으로 내란선동죄라는 전과딱지가 붙었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그가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현대건설의 역군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하였을 때 문제가 발생했는데 인사부장이 면담을 요청하였고 그 면담에서 학생운동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이명박은 입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편지로 자신의 전력을 밝힌 후 사회진출을 막는 당국의 처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한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국가가 가로막는다면 국가는 그 개인에게 영원히 빚을 지는 것이라고 과감하게 써 보낸 편지에 충격을 받은 이낙선 비서관은 청와대 수석회의를 열어 이명박의 현대건설 입사를 허락했습니다. 이 정도의 배짱을 지닌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섯째로 그가 지킬 것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명박이 태국현장으로 발령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태국 고속도로 현장 내부에서 갈등이 고조되던 상황이었는데 어느 날에는 한국에서 온 인부들의 난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군용 단도를 들고 회사 집기를 부수고 있었는데 이명박은 금고를 온몸으로 껴안았다. 그들은 이명박을 구타하기 시작했는데 경찰이 도착해서 금고 있는 곳으로 들어오기까지 금고를 껴안고 있었다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개 경리사원인 이명박이 목숨을 걸고 혼자서 금고를 지켜낸 이 일로 그는 현대건설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여섯째로 그가 경영에 있어 대단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뛰어난 역량 덕분에 고속으로 승진을 했는데 그것은 셀러리맨의 신화가 됩니다. 중기사업소 과장이 된 지 1년 만에 차장을 거쳐 부장이 되었고, 부장으로 진급한 6개월 후 이사가 되었는데 이때 이명박의 나이는 만28세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승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1974년 1월의 정기인사에서 그는 또 전무로 승진했고 그 이듬해에는 부사장에 올랐습니다. 결국 입사하고 나서 부사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겨우 10년이 걸렸는데 정주영회장의 친인척도 아닌 그가 이처럼 고속 승진을 한 데에는 그만큼의 역량이 뒤따라주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이명박은 현대건설의 회장이 됩니다.


일곱째로 그가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1992년 1월 4일 정주영 명예회장은 공식적으로 기자들 앞에서 대선출마의 입장을 밝힙니다.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대국민약속을 번복한 것입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에게 함께할 것을 요구했고 이명박은 그 요구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결별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명박이 현대를 떠나야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명박이 의리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이명박 전시장이 그만큼 소신이 있는 인물이라는 반증이 되기도 합니다. 서울을 하나님께 바치고,대한민국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그의 기도가 꼭 성취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덟째로 그가 국정을 운영하기 위한 훈련이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2002년 6월 3대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으로 당선됩니다. 그는 취임사를 통해 청계천 복원, 지역균형발전, 대중교통 중심의 교통체계 수립 등의 청사진을 제시했는데 그 모든 것을 잘 이루어냅니다. 특별히 청계천 복원사업은 그의 지지도를 크게 높이는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명박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게 된 것입니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큼 비중 있는 곳이고 바로 그곳의 수장으로서 서울을 이끌어간 이명박 전시장이니 국정 운영을 위한 준비로서도 부족함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사실 선거라고 하는 것은 뚜껑을 열어보기까지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명박 전시장이 지지율에 있어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대통령 당선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이명박 전시장 지지 분위기는 거품이라고 평가 절하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요인들과 또 다른 요인들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지금의 이명박 지지현상을 이끌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변화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만 아무튼 이명박 전시장이 인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안희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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