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슬이 목줄에 걸릴 때까지 흥분하여 앞발로 바닥을 긁어대고 온몸을 떨며 신음한다.
그러고 나면 조용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다 포기한 다음에 오는 절망의 평정이다.
추토라는 사차원 세계의 온갖 위험과 가능성 사이에서 오로지 '본능' 에만 의존한다.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다차원적인 세계상은 추토라에게 아직까지 아늑한 혼동이며,
지식이나 경험, 목적 없이 편안하게 어슬렁거리는 삶을 방해하지 못한다.
추토라는 시간 감각 없이 잘 지낸다.
개 주인은 추측이나 선입견 따위에 방해 받지 않는 개의 무한한 자유를 시샘한다.
추토라는 시간 없이 살고, 공간의 법칙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떤 형태이든 청춘은 늘 신사를 당황하게 하면서 동시에 섬세하게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한다.
젊음은 신사를 사로잡아서 무력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형태일지도 모른다.
젊음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
신사는 기분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날뛰는 추토라를 보면서 소시민 특유의 경외심을 느낀다.
추토라를 생각하면, 그 동물에 대한 기념으로 온 집안 식구들 모두의 손에
흉터가 남아 있는데도 그리운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저려온다.
신사는 추토라에 대한 우울한 기억이 온순하고 매력적인 킹 지미의 모든 장점보다
더 소중하지않을까 은밀히 의심한다.
살아가면서 서서히 경험을 쌓고,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고,때로는 넘어지고, 실망을 대가로 배우면서
우리가 보통 아름답고, 선하고, 고결한 것만이 아니라
억눌리고, 완전하지 못하고, 분노에 차 이를 갈며 싸우는 것,
풍습과 화의가 아니라 오점과 항의를 뜻하는 것도 사랑하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추토라는 헝가리의 잡종개로 신사라 부인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집에 데리고 들어온다.
2마리의 강아지 주인으로서 제일 처음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것은
처음 강아지를 키우게되면서 으끼는 감정과 여러가지 일들의 섬세한 묘사이다.
추토라는 어려서부터 데리고 온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 구속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반항을 하고
신사는 그런 추토라를 자기의 방식대로 훈련을 시키려고 노력한다.
어떻게보면 둘다 정말 성깔있는 인물들이다.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한테는 많이 지루할 수도 있지만,
세세한 표현력 만으로도 읽기가 지루하지는 않았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