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평론가 김사민씨가 묵가 잡지에 기고한 글을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김양동 교수에게 던지는 공개질의2 - 4회
4. 인장은 예술성이 없는가?
그렇다면 인장에 해당되는 옥새는 예술성이 없을까?
김양동 교수는 그 가치가 적다고 평가한다. 그는 같은 글에서 ‘조선시대 관인(옥새는 관인에 해당된다)들의 인문은 대부분 9첩전이고, 인변은 넓으며, 자획의 굵기는 일정하여 도안적’이라며 ‘그러므로 관인은 관리로서 가질 수 있는 권한의 표시일 뿐 예술적 가치는 적다고 하겠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김양동 교수는 를 기술하면서 우리 인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옥새문화를 철저히 배제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필자가 개념정의가 제대로 되지 않은 글이 가질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그의 개념정의로 보면 옥새는 인장이며, 예술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김양동 교수는 도록에서도 인장을 다루면서 옥새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옥새가 ‘예술적 가치가 없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는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그로 인해 우리 인장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다.
궁중예술의 꽃, 옥새
그렇지만 옥새를 폄하하려는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신통치 않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 옥새는 예술성이 부족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옥새는 기능성과 예술성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국립민속박물관 신광섭 관장은 옥새에 대해 ‘왕조시대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궁중예술의 꽃’이라고 평가하고, ‘옥새에는 서예, 회화, 조각, 전각, 금속공예 등이 망라된 종합예술 그 자체’라고 밝히고 있다.
전 국립중앙박물관 정양모 관장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은 견해를 밝힌다. 그는 “왕조시대 최고의 상징물은 왕권을 상징하는 옥새였다. 왕조시대를 상징하는 예술품 가운데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보고는 당연히 옥새가 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현대의 국새 역시 마찬가지다.
옥새는 과거의 궁중유물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계승할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이는 1999년 제작된 나라 옥새(국새)가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2007년 새롭게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입증된다.
또한 정부 주최로 지난 해 12월 말 열린 새 국새 모형 공모전에 내로라하는 전각가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것으로 볼 때도 그렇다. 김양동 교수는 공모에 응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옥새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에도 제작되고 있는 우리의 전통문화이며 계승해야할 충분한 사유가 있다.
1999년 새 국새를 제작한 정부도 ‘국가의 보물이자 예술품으로 후손에게 길이 남겨 줄 수 있는 민족문화유산이 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고, 2006년에도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 민족 문화유산으로 영구히 남을 수 있는 새로운 국새 제작을 위해’ 국새 모형을 공모한다고 밝혔었다. 정부도 관인에 해당하는 국새가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민족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을 공인한 것이다.
우리나라 전각은 옥새전각에서 출발
전각이란 용어가 중국에서 처음 나타났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논란의 소지는 있다. 김 교수는 주량공(周亮工)에 의해 전각이란 용어가 시작되었다고 밝혔었다.
그런데 광해 8년(1616년) 기사에 ‘지난해에 공성왕후를 추숭한 옥보(玉寶)를 전각할 때에 자숙(慈淑) 단인(端仁) 경렬(敬烈) 공성(恭聖) 이라고 새겼습니다’라는 구절이 전한다.
주량공이 4살 때의 일이다.
(명사(明史) 문원전(文苑傳)에 문팽(文彭)이 문가병을 전각했다(文嘉?工篆刻)는 기록이 있지만, 전각이란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전각이란 용어는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먼저 사용되었거나, 최소한 중국과 동시대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보다 150여 년 전에도 전각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예종 1년(1468년) 1월 24일 경상좌도 절도사 한치의(韓致義)가 임금에게 “발병부(發兵符)는 전각(篆刻)한 문면(文面)의 가운데로 나누어 우부(右符)는 영진(營鎭)에 내려주고, 좌부(左符)는 대내(大內)에 간직했다가….”라고 상서한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에서는 이 용어가 ‘옥보(옥새와 어보)를 전각한다’는 말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옥보전각’은 ‘옥새 뉴를 제작하고 인문을 전각한다’는 옥새 제작의 뜻이다.
태조 이성계의 에도 옥새(보인)의 전각 제작을 ‘보전각(寶篆刻)’ 또는 ‘옥보전각(玉寶篆刻)’ 이라 하고 있다.
조선시대 의궤에 기록된 ‘전각’ 역시 옥새의 제작을 말한다.
조선 초중기부터 조선의궤에 옥새 인면의 새김 작업을 ‘전각’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효종) 등에 옥새보인을 ‘전각(篆刻)’한 기록을 비롯하여 각 왕조 의궤에는 ‘전각’이라는 용어가 발견된다.
‘옥새전각’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옥새나 금장, 관인이나 동장, 옥인 등을 포함한다. 즉, 왕과 국가의 상징성에 드높은 사상을 담고 있는 상태가 곧 ‘옥새전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전각은 서예의 한 분야로서 문자(文字)를 새긴 부분만이 강조되어 제작된 것이다.
작가의 개성이나 품격을 문자에 이입하고 자신의 표현형식만을 위주로 하는 차이가 있다.
[다음연재글]
5. 옥새는 폐기되어야 할 유산인가?
6. 국립고궁박물관의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