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남자
오랜만에 인사동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근처 서점에 놀러 왔다가 날씨도 춥지 않고 해서
그냥 혼자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 여기까지 왔죠.
이 거리는 많이 변하는 듯 하면서도
참 변하지 않네요.
눈에 약간 거슬리는
커다란 커피 체인점을 빼고는
크데 달라진 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더니 우리가 자주 가던
그 전통찻집도 그대로 있습니다.
좁은 나무 계단에 올라
우리가 앉던 구석 자리를 찾아가서
녹차를 한잔 시키고는
새카맣게 써 있는 벽의 낙서에서
그녀와 내 이름을 찾아냅니다.
'2000년 겨울, 우리가 이 곳에 왔다 가다.'
그녀와 내 이름
그리고 그 사이에 그려진 하트 하나.
나는 그 낙서를 한참 바라보다가
펜을 꺼내서 그 오래된 낙서 밑에
다시 한마디를 적었습니다.
'2003년 겨울,
혼자가 된 내가 이 곳엘 다녀가다.'
그여자
인사동 거리의 이 오래된 찻집은,
다락방에 숨겨 놓은 꿀단지
어린 시절의 그림 일기
아빠의 비상금과 엄마의 비밀 통장처럼
그렇게 가끔씩 꺼내 보면
혼자 행복해지는 곳이에요.
바람이 부는 날
얼음이 녹는 날
코끝이 매운 날
가슴이 슬픈 날..
난 이 곳을 찾죠.
"아,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안녕하셨죠."
얼굴을 익힌 주인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차를 주문하고
녹찻물이 적당히 식길 기다립니다.
그 사이 난 버릇처럼
우리의 오래된 흔적을 찾아보죠.
그런데 오늘 우리 이름 밑으로
새로운 낙서가 하나 매달려 있습니다.
이건 분명 그 사람 글씨인데..
오래지 않은 어느 날 그 사람도
이 곳을 다녀갔나 봅니다.
겨울 볕이 스미는 나무창틀 위에,
김이 피어오르는 녹찻잔 속에,
오랜만에 느끼는 그리움 하나가
가만히 내려앉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