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도 벌써 멈춰 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
다소 파격적인 문구로 시작되는 첫 장...시체의 관점이였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보다 다채로운 시각으로써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생물이나 무생물의 개념없이 죽은자, 개, 나무, 금화, 죽음
따위의 관점으로말이다. 독특한 구성...일단 흥미를 끌었다.
그리고 또한 "내 이름은 빨강" 이라는 제목을 듣자마자
나는 피(Blood)가 연상되었다.
붉고 끈적이는 피.. 생명의 근원이자 죽음의 근원..
그 강렬하고 선명한 색채.
읽기 전 이 책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
한 오르한 파묵이라는 터키의 유명작가이며 세밀화를 주제로 추리
를 가미한 역사추리 소설 이라는 것ㅡ 단지 그 것 뿐이였다.
그리고 사실, 앞의 몇 장은 상당히 흥미롭게 읽기시작하다가
조금씩 지루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책 한 권을 골라도 상당히 신중히 살피고 집어드는 나로써는
중간에 덮는 일이 그닥 흔치 않기 때문에 끝까지 읽는데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이 책의 대강의 줄거리는 16세기 이슬람의 세밀화를 중심으로 그로
인해 일어난 살인과 그 범인을 추적해나가는 것이다.
16세기 이슬람 문화권의 세밀화...
처음 접해보는 소재였기에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기도 했다.
기독교인이기도한 나는 상대적으로 이슬람권이나 불교권의 부분에
대해선 스스로의 지식이 상당히 결핍 상태임을 느끼긴 한다.
어쨌든 나로써는 상당히 신선한 소재임에는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배경인 터키는 이슬람 문화권으로써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선에 걸쳐있다. 때문에, 터키는 자연스레 양쪽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정체성의 갈등을 겪게 된다.
이 책이 쓰여진 16세기는 이슬람 고유의 세밀화가 서양의 베네치아
풍의 그림을 접하게 되면서 그 그림을 조금씩 모방하려하는 자와 신
에 대한 모독이며 역겨운 짓이라며 배척하는 자가 대립하기 시작한
다. 어쩌면 이 작품 속의 살인이 발생하게된 원인은 그런 정체성의
갈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 문화권은 유일신을 섬기는 문화이므로 그들은 인물을 그리는 것은 곧 우상숭배라 여겨왔다.
때문에 그 당시에는 기하학적 무늬나 인물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세밀화 정도만을 추구해왔다. 그 내용도 현실의 모습을 담는 것이
아닌, 알라의 말씀에 따른 세상을 그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세밀 화가는 그 그림 속에 자신을 드러내서도 안 되고, 흔적
을 남겨서도 안됐다. 그러므로 그들은 후세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
할 수도 없었고 자신이 돋보이고 싶은 욕구를 억눌러야 했다. 단지,
그들은 그림을 그렸던 자들 중 한 명으로 남을 뿐인 것이다.
또한, 그림은 글 옆에 삽화처럼 실어서 내용 이해를 돕는 역할정도
이었으므로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세밀 화가들
은 평생을 그림에 몰두하다 후에 눈이 멀게 되면 그 것을 눈멈이라
하여 귀히 여길 만큼 크나큰 자부심을 갖고 생활한다. 하지만 16세
기의 이슬람문화권에서의 터키는 유럽식 화풍이 서서히 유입되기
시작하는 과도기였다. 세밀화가 역시 현재의 것을 고수하려는 자와
새로운 것과의 융합을 시도하는 자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또한 융합을 넘어서서 동경하는 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럽의 인물중심의 화풍. 곧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강의 내용들은 등장인물 개개인
의 목소리로 자연스레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단순히 역사적 사실
들만 장황히 늘어놨으면 지루할 법한 내용이지만 살인자를 추적한
다는 약간의 추리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읽는 재미가 조금은 더해
졌다고나할까.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특징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었다.
모두가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내용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축인 카라, 그리고 그의 부인이 된 세큐레, 뛰어난 세밀화가
올리브와 나비와 황새.
읽으면서의 가장 큰 흥미는 무엇보다도 살인자를 색출하여 내는것.
나는 사실, 계속 헤매며 엉뚱하게도 큰 반전을 기대하며 혹시 카라
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했다. 어쨌거나 “나를 살인자라고 부를 것
이다”라는 부분을 읽으며 인물 각각의 성격과 특징들이 나열되는
것을 보고 대체 누가 범인일까 하며 궁금증에 휩싸여가며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다.
화요일이란 또 다른 예명을 갖고 있는 올리브.
그는 재능이 상당한 만큼 자부심도 컸다.
가장 조용하고 예민하지만 가장 음흉하기도 했다.
그는 말 그림을 그리면 본인 스스로 그 말이 된다고 느끼는 만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어 하는 자였다.
일요일이란 또 다른 예명을 갖고 있는 나비.
그는 아름다우며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 그의 외면만큼 그림도 역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는 모든 게 축제처럼 행복하지만
심오한 그 무엇이 없었다.
또한, 그는 칭찬에 약한,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 그림을 그리면 그는 멋진 말 그림을 그렸던 위대한 옛
대가가 되었다고 느끼는 자였다.
금요일이란 또 다른 예명을 갖고 있는 황새.
그는 오직 그림을 위해 맹렬히 탐구하는 자였다. 또한
세부적인 것들을 가장 중요시 했다.
작은 부분을 쉽게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살피는 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욕심 많고, 지나치게 자만하여 다른 이를 쉽게 무시했
다. 하지만 그는 가장 성실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말 그림을 그리면
멋진 말을 그릴 때에만 내 자신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자였다.
또한, 소설 시작부터 죽은 시체로 나오는 엘레 강스는 수요일이란
예명을 갖고 있는 그림에 금박을 입히는 자였다.
살인자는 그가 어수룩하고 멍청하고 세속적인 바보라고 했었다.
그리고 카라의 아름다운 부인 세큐레.
세큐레의 아름다운 미모에 그의 사촌인 카라, 시동생 이였던 하산,
그리고 그의 아버지 에니시테까지.
그녀는 세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며 번민하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 이였다.
물론, 그녀는 현명했으므로 늘 똑똑한 선택을 했지만.
또한, 나는 살인자라 하여 무작정 나쁜 자로 평할 수는 없었다.
그는 혼란해하던 당대 세밀화가들중의 하나를 대표하여 이단자를
처형했다는 생각에. 물 밀 듯 밀려오는 유럽식 화풍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휩쓸리는 혼란한 세대에 서있던 혼란스러운 한 인간 이였을
불쌍한 자라는 생각에. 그렇지만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기에 비참한
그의 죽음에 조금은 수긍했던 것 같다.
솔직히 생소하기도한 소재를 다뤘을 뿐 아니라 지루하기로 정평이
난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아니던가.
아직은 간사한 내 머리가 한번에 흡착해내진 못했지만,
상당히 신선했다고는 할만했다.
또한 그림을 묘사하는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글에 담긴
선명하고 생생한 색채와 동작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생기가 가득한 묘사…….
21세기의 글쓰기로 16세기를 완벽하게 복원해냈다는 평을 얻은 그
인 만큼 과거의 모습들을 그 답게 치밀하고 깔끔하게 써내려갔다는
생각이 든다.
작성일: 2007.05.09 0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