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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소설] - 숲의 내부 (7) : 완결

최용진 |2007.05.29 19:36
조회 12 |추천 0


드디어 완결편을 올려봅니다. 요즘 사업을 시작해서 인터넷을 하기 어려워 겨우 올리네요. 처음 쓴 것 치고는 맘에 듭니다. 끝까지 읽어주세요.

지금 [음식점 가미]라는 소설을 쓰고 있는데, 완결하는대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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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멋있게 죽는 법을 상상한다.

우리 학교 운동장 구조는 대강 이렇다. 비교적 넓은 운동장이 있고, 그 주위로 빙 둘러 계단이 있다. 계단 위에는 애들이 지나다니게끔 통로가 나 있어서 등교나 하교 길에 운동장을 가로지르지 않아도 되기에 편하다. 통로 중간 중간에 수돗가가 있다. 더운 여름에 운동장에서 축구라도 하다가 땀에 젖으면 수돗가로 올라가 머리를 적신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진 않지만 축구는 예외다. 목표가 있는 운동은 지겹지 않기 때문이다. 축구를 하다가 수돗가에서 머리를 적시고 다시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오면, 발을 디딜 때마다 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그럴 때면 나는 영락없이 [영웅본색] 따위를 떠올린다. 머리에서 물이 아닌 피를 뚝뚝 흘리며 죽어가는 것처럼 슬프고 비장한 표정을 지어본다. 아이들은 축구가 잘 안 되어 그런 표정을 짓는 줄로 안다. 홍콩 영화의 주인공들은 멋지게 죽는다. 멋지게 죽는다?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이 멋지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총을 맞고, 칼을 맞으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은 그 자체로는 결코 멋있지 않다. 홍콩 영화의 주인공들은 한결 같이 누군가를 지키다 죽어가고(그래서 멋지거나), 이룰 것을 못 이룬 채 죽어간다(그래서 슬프다). 나는 수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비장한 장면을 상상한다. 멋지게 죽고 싶다, 언제든 기회가 오면 멋지게 죽고 싶다. 그러다가 결국, 남을 위해 죽는 것은 개죽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다른다. 그럼 다시 오래 살고 싶어진다. 되도록 오래 즐겁게 살고 싶다. 그제서야 머리의 물기가 마르기 시작한다. 그럼 나는 다시 운동장으로 뛰어가곤 했다.    

 

 

현실은 달라요.

바보같이 죽긴 왜 죽어. 나는 들창코를 구하고도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다.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나는 살아서 누릴 혜택을 당당히 누린다. 겨울방학까지 이제 2주 정도 남았다. 2주간 나는 들창코의 맛난 도시락을 나누어 먹는다. 귀찮으면 주말 숙제를 또 해달라고 말해볼 수도 있다. 다행히도 들창코를 구해준 이후로 껄렁이 놈들의 해코지도 없다. 모든 게 평화롭다. 비장하게 죽는 것도 멋지지만, 그래도 즐겁게 살아있는 것이 백 번 좋다. 가끔 들창코가 귀찮고 부담스럽게 과잉 친절을 보이는 것이 살짝 거슬리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럭저럭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간다.

 

 

현실은 달라요!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방학을 1주일 남겨놓고 급작스럽게 전학을 가게 된 것이다. 간만에 아버지께서 집에 내려오셨다. 아버지는 여느 때와는 달리 초췌한 모습이었다. 삼촌도 왔다. 삼촌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른들의 대화라 끼어들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와 삼촌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서 좋지 않은 일임을 직감했다. 아버지가 잠시 외출한 사이 삼촌에게 이유를 따져 물었다. 삼촌은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아버지가 서울에서 하는 일이 잘 안 돼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대답해주었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하는 일이 뭔데?’ ‘뭐긴 뭐야, 음식점이지.’ 삼촌의 말에 의하면, 음식점이 예전처럼 잘 안 돼서 아버지가 하는 수 없이 사채를 끌어다 썼는데, 그걸 못 갚아서 몇 달간 계속 맘 고생을 하셨나 보다. 사채라는 것이 이자가 엄청나서 몇 부 이자에 기간이 어쩌고, 음식점을 처분했는데도 도저히 어찌어찌, 라고 말을 하는데, 솔직히 나는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삼촌, 그렇게 자세히는 말고요, 나는 그런 것 따위는 알고 싶지가 않다고!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빚을 졌는데 돈을 못 갚아서 도망간다는 거잖아. 아, 그랬구나, 역시 그랬어. 아버지는 음식점을 하는 사람이었어. 국가 기밀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삼촌이 나를 놀린 게 맞았어. 배신감 때문에 어른들이 미워졌다. 창피했다. 껄렁이 놈들한테 실컷 아버지가 이런 사람이라고 떠들어댔는데,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가 빚을 진 것보다 음식점을 하는 사람이었던 게 더 싫었다. ‘그런데 사채라는 게 뭐야?’ 시무룩한 표정으로 묻는 내게 삼촌은, 그건 전에 말했던 일수쟁이랑 비슷한 거라고 대답해주었다.

 

 

비참하다.    

나는 내일 모레면 경남 통영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공교롭게도 우리 집안 일은 좁은 마을에 모두 퍼졌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웬만하면 겨울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방학을 하면서 전학을 가도 될 텐데, 오죽 급하면 방학 1주일 전에 전학을 가겠는가, 비참했다. 전에는 나에게 아무 관심도 없던 다른 아이들이 이제는 온통 내 얘기를 떠들고 다닌다. 국가 기밀기관에서 일하는 것으로 잘못 소문이 났던 삼촌이 알고 보니 통영에서 고깃배를 타는 뱃사람이라는 둥, 이제 내 아버지도 통영에서 같이 배를 타게 될 거라는 둥, 빚쟁이들이 이 곳을 알아내기 전에 도망가게 돼서 그나마 집은 건지겠다는 둥, 나도 못 들었던 정보가 난무한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제법 그럴싸하다. 삼촌은 뱃일이 없을 때마다 우리 집에 놀러 왔던 거구나. 자주도 놀러 오던데. 그만큼 일 없는 날이 많았나 보다. 껄렁이들의 태도는 여전했다. 전에는 삼촌 무서워서 나를 못 건드리더니, 이제는 네 놈 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로 건드리지 않는다. 어쩌면 뱃사람이 국가 기밀요원에 못지 않게 무서워서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들창코가 문제였다.

들창코는 거의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가뜩이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서 반짝반짝 빛났다. 너의 눈은 볼 때마다 귀엽다. 3개월이 넘어도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녀석은 하루 종일 울듯한 얼굴로 수업을 듣는다. 괜찮다니까, 그만해라. 이래서는 누가 전학을 가는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인마. 사실 나는 벌어진 상황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아직 어리니까 어른들의 일에 크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 단지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서 그러는 것뿐이다. 그러니 마음 쓰지 말아라, 귀찮다. 헤어지는 것이 아쉬우냐, 그 또한 괜찮다. 말했듯, 15세 우정은 얄팍하다. 다른 곳에 가면 또 다른 친구를 사귄다. 사귀지 않더라도 예전에 그랬듯, 그냥 혼자서도 편하다. 너 역시 나 없어도 밤비와 호리가 있으니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밤비를 부탁한다, 밤비는 좀 신경이 쓰인다만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네 녀석이 좀 맡아다오. 덧붙여, 네가 베풀었던 친절과 혜택을 포기하는 것 또한 밤비만큼 아쉽긴 하지만 어쩌겠냐, 나는 낯선 곳에 가더라도 또 그럭저럭 잘 지낼 것이다. 개울가가 없다면 또 다른 어떤 구석이라도 반드시 찾아내 혼자 즐길 것이다. 그러니 걱정 마라, 뭐 별거냐. 정리 다 해주니까 고맙지? 하지만 들창코에게 이렇게 직접 말하지는 못했다. 자존심 문제였다. 

 

 

과잉 친절

전학 당일까지 들창코의 과잉 친절은 계속되었다. 전보다 더욱 친절해졌다. 이제는 필요도 없는데 주말 숙제를 해왔다. 일수쟁이 아들 주제에 사채는 나쁘다며 핏대를 세웠다. 사실 굳이 따지고 들면, 들창코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덧붙여 말하면 밉지도 좋지도 않았으며 부담스럽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들창코는 며칠째 눈에 눈물이 그득하다. 녀석답게 별 말을 하지는 않는다. 자존심 문제였다. 대신 도시락 반찬이 호화스럽다. 그전에도 놀랍던 도시락이었는데, 이제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지경이다. 6종이나 되던 반찬이 급기야 8종을 돌파했으며, 칼집이 들어가 있던 비엔나는 완전히 문어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로서야 나쁠 것이 없었다. 잘 먹을게! 그런데 놈이 밥통을 여는 순간 약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완두콩이 밥 위에 하트를 그리고 있었다. 그래, 고맙다만 반찬만 먹을게.      

 

 

결말은 대수롭지 않다.

사실, 딱 여기까지가 내가 말하고 싶은 전부이다. 그 이후의 일은 대수롭지 않다. 학교의 모든 수업이 마치자 선생님은 나를 앞으로 불러냈고, 덤덤하게 전학 소식을 전했다.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별 반응이 없었다. 들창코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래도 녀석은 대견했다. 눈에 눈물이 가득했으나 끝내 떨구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참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를 나와서 들창코와 마지막으로 걸었다. 우리는 말이 없었지만 약속이나 한 듯, 숲으로 향했다. 숲은 이제 완전히 앙상하다. 해가 넘어가면서 숲이 검은 어둠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숲이 완전히 캄캄해지기 전에 얼른 밤비와 호리를 보고 와야겠다. 숲에 들어서자 들창코가 가방에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내가 너한테 선물한 책이잖아?’ 들창코는 이제 다 읽었으니 나에게 주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묵묵히 책을 받아 들었다. 어느새 들창코는 참았던 눈물을 한 두 방울씩 뚝뚝 떨구고 있었다. 오늘따라 숲은 엄숙하다. 슬픔의 도살장은 이제 다른 의미의 슬픔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어느 면으로 봐도 그 슬픔은 엄밀히 나의 것은 아니다. 슬픔은 전적으로 들창코의 권리이다. 그런데 나는 다른 의미로 조금 슬프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숲의 다른 여러 곳도 둘러보았을 텐데, 이제 와서 새삼 아쉽다. 슬픔의 도살장에 이르자 호리가 이미 나와있었다. 마치 나를 배웅하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밤비가 보이질 않는다. 나는 큰 소리로 밤비를 불러보았다. 들창코도 따라 불렀다. 하지만 몇 번을 목 놓아 불러도 밤비는 소식이 없다. 그제서야 나의 울음보가 터졌다. 쪽 팔리게시리, ‘밤비야!’를 크게 외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밤비 때문인지, 집안일 때문인지, 들창코 때문인지, 아니면 들창코 아버지 때문인지. 어쨌든 한 손에 책을 들고 울고 있는 모습이라니, 내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들창코를 바라보게 되었는데 녀석은 예상외로 울음을 그치고 큰 두 눈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여태 안 그랬던 내가 울고 있으니 마냥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 경이함 때문에 녀석의 울음이 멈추었나 보다. 뭐야? 순간 울음이 멈춰 버렸다. 흥이 깨졌다. 밤비도 못 보고 들창코에게 추한 모습이나 보이고, 숲의 마지막 방문은 여러 모로 손해가 막심하다. 이런 생각에 한동안 침묵했다. 들창코도 내 눈치를 슬슬 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숲은 적막이 흘렀고,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 별로 남은 것이 없다는 생각에 씁쓸했다. 내일이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통영까지 내려가는 길은 꽤나 우울할 것 같았다. 길이라도 막혀 긴 시간 지체한다면 [우울과 몽상]이 더 오래되겠다는 마음에 아득하기까지 했다. 한참의 어색한 침묵 끝에 나는 조용히 들창코에게 ‘돌아가자.’라고 말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밤비 따위는 쉽게 잊을 것만 같았다. 나는 정말 이제 아무 감정도 없다. 집안 일이 잘못 된 것도, 밤비를 두고 떠나는 것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한바탕 울어서 그런가, 마음은 되려 차분히 정리가 되었고, 오로지 내일 내려가는 길이 짜증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자 조금 피곤해졌다. 숲을 빠져나가 집에 갈 길이 귀찮게 느껴졌다. 들창코가 슬픈 눈으로 ‘내려가면 꼭 편지해, 주소는 그 책에 적어놨어.’라고 말했다. 난 귀찮아서 그런 짓 못해, 라고 말하려다 그만 두었다. 책이 손에서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이게 끝이다.

그냥 돌아가는 길에 통나무 다리에 이르자, 먼저 건너는 들창코를 발길로 차버렸다. 들창코는 통나무에서 균형을 잃고 개울로 떨어졌다.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들창코 옆으로 살짝 던졌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으며, 한달음에 숲을 빠져 나왔다. 밖으로 나와보니 해는 떨어졌고, 이미 사방이 어두워진 상태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숲을 바라 보았다. 한참 보다가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빛을 잃고 캄캄해진 숲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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