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리뷰] 아메리칸 버티고

박상준 |2007.06.01 18:39
조회 49 |추천 0

  미국. 그 현기증 나는 실체가 바로 미국이다. 좋든 싫든 간에 미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이기에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저서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내가 이 책을 보게 된 계기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다. 그 부제가 ‘토크빌의 발자취를 따른 미국 여행기’인 것처럼 1831년과 1832년 사이 신생국이자 새로운 민주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던 미국을 탐험하기 위해 그가 걸어온 발자취, 그리고 그의 저작 ‘미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예측적인 교과서가 되었으며 나 또한 ‘미국학’을 전공하는 미국학도로서 관심 있게 읽었던 책이라 단연 나의 흥미를 잡아끌었다.


  부시 행정부 집권 후, 특히 부시 2기 행정부의 시작과 동시에 전세계적인 ‘반미’의 확산이 이루어졌고 지금 현재도 반미는 그칠 줄 모르고 날로 성행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 또한 미국을 보는 잣대가 반미와 친미라는 극단적 구조로 형성되어 왔으며 최근 몇 년 사이에 반미는 날로 그 세를 확산하고 있다. 이와 같이 미국에 대한 깊은 반감이 날로 확산되는 시점에서 미국 사회와 ‘국가’로써의 미국을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음에 분명하며 또한 깊은 흥미가 있는 작업임에 확실하다. ‘레비’는 170여년 전, 토크빌의 행적을 좇으며 미국 사회를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이어진 15000마일에 달하는 그의 행적은 도시를 좇으며 많은 시민들과 있었던 에피소드를, 그리고 자신의 느낌을 차분하게 소개하고 있다. 출발점인 ‘뉴포트’에서 그 많던 성조기를 바라보던 첫 느낌과 뉴욕에서 시작되어 관타나모로 마무리되는 감옥 답사기, 모형을 모아놓거나 별 가치 없는 것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미국의 별에 별 박물관들을 둘러본다. 또한 뉴욕, 시카고와 같은 번화한 대도시와 지금은 쇠락한 왕년의 대도시 버팔로,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에서부터 그에게 깊은 애정을 남긴 시애틀, 서배너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도시를 여행한다. 그리고 길을 따라 달려온 도시에서 만난 크고 작은 사람들, 이를테면 꿈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인디언들, 유대인을 추월하겠다며 그들의 모방을 선택한 아랍인들, 유대인 공동체, 멕시코의 이주민들, 흑인들, 몰몬교도, 상품화된 기독교의 교인들과 목사들, 사창가의 여인들과 SM, 스와핑 클럽의 중년 신사들, 성소수자들 그리고 우디 엘런, 샤론 스톤, 바락 오바마, 존 케리, 힐러리 클린턴, 새뮤얼 헌팅턴, 프랜시스 후쿠야마, 월리엄 크리스톨 리처드 펄 등과 같은 정계, 학계, 연예계 인사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만나며 관찰한다. 그리고 여행 와중에 느낀 사회정치의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도시. 뉴욕과 시카고. 금융과 거대 기업의 도시. 발 빠른 변화에 함께 발을 맞추며 역동적인 모습을 선사한다. 낙오자는 철저히 감금된 라이커스 아일랜드의 교도소로 보내지거나 철저히 배제된다. 새로운 인력과 기술, 자본은 미국 내, 그리고 세계 어디에서든 유입되고 수입되며 그들의 성장에 동력이 되는 에너지를 발산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도시 버팔로,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 세계적 흐름에 따르지 못하는 제조업의 도시. 철저히 파괴되고 사람들은 떠나며 그들을 필요로 하는 자본과 기업들 역시 철수할 뿐이다. 도시의 죽음. 그리고 많은 시골 촌락의 죽음. 어느 사회보다도 이합집산이 빠른 미국에서 이러한 죽음은 더욱 촉진되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은 크고 강한 것들만 살아남게 되는 것일까.


  사람. 희망을 잃고 정부의 구역 획정에 따라 삶을 터전을 빼앗기고 강제 수용된 인디언들. 그리고 그들을 교묘히 속이며 하나의 인간을 단지 ‘표’로 밖에 인식하지 않는 상원의원. 아메리칸 드림과 자유에 흠뻑 취하며 유대인을 이기고자 그들의 적개심을 누그러뜨리고 유대인의 방식을 좇는 아랍인들, 철저히 자신들의 세계를 수호해가는 유대인들, 멕시코의 국경을 넘는 같은 종족을 상대로 인간 사냥을 하는 이민 2세대 히스패닉(멕시칸)들, 140여년 전의 노예 해방 전쟁 그리고 60년대의 선거권 획득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부족해 보이는, 아직까지도 사람들 마음속의 완전한 평등이 주어지지 않은 흑인들, 새로운 종교에 심취하는 사람들과 종교에 흥미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상업화, 시장화 되어가는 기독교, 옳고 그름 속에서 끊임없이 싸우며 힘든 삶을 보내는 성소수자들, 도시의 조그마한 클럽에서 성에 탐닉하는 혹은 스와핑, SM 클럽에 가입한 중년의 평범한 신사들.


  조금 더 특별한 사람들. 본업은 영화배우이며 영화감독이지만 음악이 좋아 아카데미 오스카 수상 참석을 거절한 우디 엘런, 로스엔젤레스의 빈민들을 보며 화를 삭이지 못하며 자선 활동에 열성적인 샤론 스톤, 뛰어난 언변에 흑인 클린턴으로 불리며 단숨에 주목받기 시작한 반은 흑인, 반은 백인의 바락 오바마, 말이 길어 대통령에 실패한 지적이며 깔끔한 인상의 소유자 존 케리, 남편의 치욕적인 섹스 스캔들 이후 여성의 인심을 산 힐러리 클린턴, 반론의 여지가 충분하며 불확실한 문명충돌론을 제시하고 후쿠야마와 같은 후학들에게 밀린 비겁한 인종주의자 헌팅턴, 진보주의적 염세주의와 이상주의의 좌표로 새로운 정치적 좌표를 추구하는 신보수주의자 후쿠야마, 비관용과 흑과 백의 이원론에 심취했으며 포퓰리스트적이고 천박한 말재주와 하찮은 지식이 빛났던(?) 과격하고 늙은 보수주의자 리처드 펄, 말쑥한 기업가 차림의 이데아를 잃고 헤매는 반전체주의자 윌리엄 크리스톨.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과 다양한 이념적 좌표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여러 태생과 신분 속의 사람들.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수평적, 수직적 스펙트럼의 다양함이다. ‘레비’가 살고 있는 프랑스에서나 혹은 단일민족이라고 외쳐대는 ‘한국’에서나 미국과 같은 다양성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과 같은 다양성을 가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 내에 혼재되어 있는 다양성. 결국 미국이 안고 있는 다양성의 문제는 그것을 화학적 반응으로 섞어낼 수 있는 지의 문제이다. 단순히 물질적 반응에 그치고 만다면 미국 사회는 그동안의 동력을 잃고 큰 혼란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정치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가벼운 에피소드 두 가지. 미국의 비만 문제와 기념 메커니즘. 미국의 비만 문제는 언론 매체를 통해 무수히 접해 봤을 것이다. 사실 미국의 빠른 변화상이 패스트푸드과 같은 음식 문화를 만들어 냈는데 그러한 음식 문화는 또한 비만 문제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비만 문제가 단지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은 - 그리고 내가 사회문제에 넣지 않고 에피소드로 구분한 것은 - 그것이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니며 건강과 다이어트라는 또 다른 상품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레비’ 또한 미국의 비만 정도가 프랑스의 그것과 크게 비교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으며 사실 미국인들은 건강에 대한 염려를 하면서도 패스트푸드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있지는 못하다. 따라서 비만 문제는 기업 논리가 파고든 또 하나의 영역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인 기념 메커니즘. 모형과 그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 붙이는 작업을 지속하는 미국인들. 별로 기념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갖가지 이름의 박물관들. 이는 미국의 역사가 깊지 못한 미국인들의 열등의식, 혹은 그들의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역사와 관련된 하나의 에피소드이지 않나 싶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서 이번에는 사회정치. 미국 내의 사회 문제는 약자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권의 회색지대라 불리는 아부 그라이브나 관타나모와 같은 교도소는 미국의 약자에 대한 사회 시스템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또한 사설 교도소의 등장이 이 문제의 핵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레비’가 둘러본 여섯 개의 교도소를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섬’이다.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관리되고 있는 교도소. 사실 ‘관리’라는 단어는 그나마 감독하고 맡고 있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되고 파괴되어지고 있다는 말이 ‘섬’에 더욱 부합하는 것 같다. 사회계약설에 따르면 국가는 사람들에 의한 계약이기 때문에 국가는 모든 구성원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교도소는 사회적 약자인 그들을 철저히 봉쇄하여 일반 시민과 도시로의 접근을 원천 봉쇄하고 있으며 ‘팬옵티콘’이 도입된 현대적 격리 시스템에서 그들은 내버려진 ‘쓰레기’이며 최소한의 삶만을 살아갈 것을 요구받고 있다. 또한 미국이 사설 교도소를 도입한 것은 국가가 책임져야할 교정 작업을 포기하고 기업의 이윤에 부합함으로써 그들을 외면하고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에 몰입함을 의미한다.

  

  미국의 사회보장제도. 사실 ‘레비’는 미국의 보장제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깊은 언급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단지 그가 만난 사람들이 그들이 속한 주 정부와 기관, 사적인 단체를 통해 보험을 받고 있는 것으로 대신하는데, 미국의 극빈민층은 미국 인구의 1/10이 조금 더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략 3000~4000만의 인구가 극빈민층에 속하며 그들은 제대로된 교육, 의료 보험 등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2007년도 예산안을 보면 미국의 국방비는 더욱 증가되었으나 빈민층에 대한 복지비용은 10%가량 감축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적 약자의 위험으로부터 무방비한 노출을 의미한다. 극단적 빈곤의 증가 그리고 이를 통한 사회 해체와 분열. 미국은 인지해야 한다. 무엇이 더욱 낮은 비용을 요구하는지. 사회 내 가속화되고 있는 분열과 해체 비용의 증대를.


  두 번째는 정치문제. ‘레비’는 2004년 미국을 방문함으로써 미국 대통령 선거전의 열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전당대회에 참석함으로써, 그리고 많은 정계, 학계, 시민사회계 인사를 만나봄으로써 양당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두 번의 선거에서 패하면서 민주당은 수세에 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찾은 궁여지책은 돈이다. 세상에! 돈을 해결책으로 내놓다니. 패배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며 새로운 이념과 정강을 만들어 내야할 정당이 공화당보다 더 많은 기부금만을 찾고 있는 한심한 노릇이란. - 2006년 중간 선거는 공화당의 이라크전 수렁으로 민주당이 어부지리 했다고 본다. - 반면에 공화당은 여당답게 활발한 이론에서 출발하는 다양한 정강과 정책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뭔가 잘못 가고 있다는 것. 우선 반전주의자인 ‘레비’나 ‘나’ 또한 이라크전이 그 대표적 실책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이 고집쟁이 꼬마 ‘부시’는 오히려 이라크에 더욱 더 자금과 노력을 쏟아 붇고자 한다. - 물론 민주당이 양원을 장악한 지금에는 그게 쉽지 않겠지만. - 덕분에 미국은 사상 최대의 반미 감정에 휩싸였으며 ‘예방전쟁’과‘부시 독트린’으로 명명되는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외교정책으로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다. 신보수주의자와 부시가 결합한 ‘도덕적 과잉’이 진일보해야할 세계를 한발 후퇴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외교정책의 딜레마!


  ‘반미주의’에 대해 반반미주의자인 ‘레비’는 충고하고 있다. “반미주의란 그게 올바르게 작동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이 이것에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반미주의란 미국에 대한 타자의 열등감과 미국을 바라보는 다른 국가들이 신경을 밖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속임수이며 국가간의 깊은 관계 속에서 나올 수 있는 것임을.” 개인적으로는 반미가 미국의 무절제한 힘을 비판하는 동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데에 그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위와 같은 레비의 의견에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렇다면 이제 결론으로 나아가서 미국의 ‘현기증’은 과연 해소될 수 있는 것인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미국은 분명 ‘카트리나’가 가져다준 재앙을 통해 대비 능력의 부족과 그 속에서 나타난 인종문제, 빈민 문제 등에서의 취약성을 그대로 노출했다. 또한 토크빌이 이미 그의 저서에서 지적했듯이 민주주의 최대의 약점이라던 엘리트 중심의 효율성과 다수를 통해 이뤄지는 정당성 사이에서의 고민은 미국이 그간 보여준 외교정책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또한 다수의 폭정과 같은 토크빌의 지적은 이라크 전쟁 개시 전 미국인들의 70%가 전쟁에 대한 찬성을 했다는 점에서도 분명 예측적이고 정확한 분석이었다. 그러나 토크빌이 더욱 높이 산 것은 미국 내 계급의 타파와 평등과 자유에 대한 높은 관심과 지지, 학습에 대한 열정, 구체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자유와 평등을 찾아 떠나온, 그리고 그러한 사상을 민주주의의 기본으로 받드는 미국인들의 다양한 인적, 사상적 바탕은 다양성이라는 이름하에 새롭고 참신한 의견과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한다. 오히려 책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의 다양성이 많은 문제를 야기하면서도 역설적으로는 그 해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신대륙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직업군, 문화를 이루지만 이러한 다양성은 다시 ‘미국’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구조 속으로 편입한다. 이는 예전에도 그래왔고 현재에도 미국 내 아랍인, 아시아인, 흑인, 백인, 히스패닉 모두 미국에 대한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들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실수를 통해 배우는 학습 능력도 매우 뛰어나다. 그리고 다양한 사상과 이념을 수용하는 정치적 관용과 민주주의 시스템을 미국을 우월하게 만든다. 따라서 미국을 ‘제국’, ‘악’, ‘혼란’, ‘신경증’과 같은 하나의 개념으로 어우르기에는 미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는 곧 미국이 어느 국가, 사회보다도 다양성을 인정하고 또한 그들을 공존하게 하며 한편으로는 그것들을 하나로 묶는 통일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 당면한 도전들을 해결해 나갈 필요한 모든 유인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은 긍정의 사회인 것이다. 미국에 대한 ‘레비’의 차갑지만 사랑스러운 시선이 느껴진다.

 

2007.2.12 아홉번째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