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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기억에 멀어지는 서해교전...

정영호 |2007.06.14 19:15
조회 149 |추천 12

월드컵을 앞두고 온국민이 흥분의 도가니 있을때 ..어느한곳에서. 조용히 산화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해마다 현충일 맞이하여 언론 매개체나 우리들은 형식적인마음으로 나라를 지키신분들을 생각 하였습니다.. 미군장갑차에 치여죽은 학생 2명 있었죠..추모관련 카폐 및 회원은 몇만명 이라죠..그런데  빗발친 총탄속에 불길속에 나라에서 군대에서 60만 병사중에 몇명 죽은 개값으로 치부친 그 귀중한 생명들이   손..발 이 찢겨나가고 온몸 성할데 없이도 끝까지 방아쇠를 놓지 않고  전사 하셨습니다..  나라에선 훈장하나 던져 주면 끝이지만. 자기 신체일부인 자식 형제 남편.이였던..그 분들은   지금까지도 고통을 받고 계십니다..

미망인이 되셨던 한분은   어떤나라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분에게 최소한 예의도 안갖추는 대한민국 정부가 원망 스럽다며..타국으로 이민 가셨던...그런분이 계셨습니다..

이제 15일이면  단 1분만이라도 그분들위해...묵념을 해봅시다..

그리고 군가산점 폐지하라는둥..군발이.뭐고 푸대접하고.. 나라위해 희생 하신분들 유공자 폐지..

하라는 여성부의 주장..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은 그만좀 했으면 합니다..

최소한 그런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이나라의 별이 되어 대한민국이 있는겁니다

제가 정부관리였다면 나라위해 희생한분들  대대손손..특혜를 줄겁니다..

그런 게 못마땅 하다면  국가유공자의 혜택이나 군가산점..비난 하신분들...

당신이 직접가서 희생하시고..나라위해 헌신 하시고 유공자 되시면 불만이 없어지겠죠

 

 

1999년 6월 15일 오전,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연평도해전이 벌어진 지 3년 만에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남북한 함정 사이의 교전이다.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 25분 무렵,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3마일,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일어났다.

교전에 앞서 북방한계선 북한측 해상에서 북한의 꽃게잡이 어선을 경계하던 북한 경비정 2척이 남한측 북방한계선을 침범하면서 계속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남한 해군의 고속정 2척이 즉각 대응에 나서 초계와 동시에 퇴거 경고 방송을 하는 한편, 교전 대비태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징후도 없이 북한 경비정이 갑자기 선제 기습포격을 가해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이 때부터 양측 함정 사이에 교전이 시작되고, 곧바로 인근 해역에 있던 해군 고속정과 초계정들이 교전에 합류하였다. 이어 10시 43분경 북한 경비정 1척에서 화염이 발생하자 나머지 1척과 함께 퇴각하기 시작해, 10시 50분경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상함으로써 교전은 25분 만에 끝이 났다.

이 교전으로 한국해군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6명이 전사하였으며, 19명이 부상하였다.
또 해군 고속정 1척이 침몰하였는데, 북한 측 피해상황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교전 직후 국방부는 '북한의 행위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묵과할 수 없는 무력도발'로 규정하고 북한측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강하게 요구하였으나, 북한 쪽의 답변은 듣지 못하였다.

한국 정부는 이 교전이 북한의 의도적 도발이지만,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 등 북한 최고 지도부의 의도가 개입되지는 않았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지었다. 또 서해교전을 통해 부정확한 현장보고, 계획된 도발에 대한 초기 대응 미흡 등이 해군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추천수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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