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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이 되기까지

신봉길 |2007.06.23 19:13
조회 252 |추천 1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곳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의 면소재지가 있던 탑리라는곳이었다. 전형적인 농촌마을로서 마을앞으로는 제법 넓은 농토와 강이 펼쳐졌고  뒤로는 금성산이 병풍처럼 전개된 참으로 아름다우면서도 넉넉한 느낌을 주는 그런곳이었다. 

 

 그곳의 금성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는 우리나라가 아직 어려울때여서  판자로 만들어져있던 시골학교의 교실은 3학년이 되기까지 책걸상도 없었다. 겨울에는 난로도 없는 교실에서 추위로 오그라진손을 부벼가며 마루바닥에 엎드려 공부를 해야했다.중앙선철도가 지나가는곳이어서 곧장 동네앞을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이웃한 읍내와 더먼곳에 있을 도시와 도시아이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어린마음에 품고 자랐다.

 

 부친은 시골서 정미소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우리 형제들( 나는 4남 1녀중의 남자로서는 막내였다)을 모두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해에 대구로 유학을 보내주셨다. 부친은 빈농의 집안에 태어나 형편이 어려워 중학진학도 하지못한 분이었지만  학식 경제능력 도량등 모든면에서 뛰어나신분이었다. 30대초에 이미 지방의회(경북 도의회)의원으로 당선되실 정도로 지방에서는 신망이 있는분이셨다. 특히 자식들의 교육에 대해 깊은 열정을 가지고 계셨다.

 

 나도 초등학교 5학년때에 대구로 유학 대구초등학교를 다녔다.성격이 매우 내성적이었던 나는 전학한 첫날 학급애들앞에서 나를 어떻게 소개할까 며칠전부터 마음을 졸여야했다. 이렇게해서 나의 도시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이후 나는 대구에서 중학교( 경북중 진학에 실패 2차인 대구중에 진학함)를 마칠때까지 5년을 대구에서 지냈다.

 

 .나는 고등학교는 내심 한국에서 제일 좋다는 경기고등학교를 가고 싶었다. 책상앞에 어느 진학지에서 오려낸 경기고등학교전경사진을 붙여놓고 공부할때마다 쳐다보곤했다. 대구는 이미 갑갑하게 느껴졌고  더넓은 세계, 새로운 세계로 가고 싶은 욕망이 강렬했다.  서울은 모든것의 중심이었고 대구와는 비교할수없을 정도로 발달된 도시로 생각되었다. 더 넓고 큰 세계로 갈수있는 길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여튼 나는 당시로서는 제일 어렵다던 경기고에 응시 합격하였다.

입학시험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중앙선 밤열차를 타고 새벽에 청량리역에 내린것이 나의 서울생활의 첫 출발이었다.

 

 경복궁과 창덕궁사이인 화동언덕에 위치해있던 경기고( 지금은 강남의 삼성동으로 이전)에서의 생활은 정말 challenging한 것이었다.경상도 시골에서 올라온 촌놈에겐 모든게 새로웠다. 많은 친구들을 편견없이 사귀었다.내가 사회에 나온후 social-networking 의 가장 큰 기반이 되었던것이 고교동문이었다.그러나 전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인만큼 학업성적에서 초중등학교같이 톱수준을 유지한다는것은 정말 어려운일이었다.반에서 10등안에 들기가 정말 힘겨웠던것 같다.

 

 경기고를 졸업하면서 서울대상대 경영학과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중학교입시에 이어 입학시험에서 두번째로 낙방한것이다. 물론 실망이 컸지만 1년간의 와신상담끝에 다음해 서울대에 다시 응시 사회계열에 합격하였다. ( 물론 다시 합격해서이긴하지만 나는 대입에 떨어져 1년간 재수를 한것을 인생의 정말 좋은 경험으로 생각한다. 후에 보게 되었지만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더 있었다)  

 

  서울대 교양학부에 등록한 그해봄 나는 서울대 대학신문 수습기자를 뽑는다는 학교신문광고를 보고 시험에 응시 합격하였다.그때부터 2학년이 끝날때까지 2년간 나는 학교신문에 완전히 빠져있었다.동숭동 구 문리대캠퍼스에서 시작된 `대학신문`생활은 관악캠퍼스로 옮겨졌고 나의 일상은 선후배기자들과의 어울림, 교수들과의 교류, 당시 시국에 대한 토론( 당시는 박정희대통령의 소위 10월유신시절이었다)등으로 이어졌다.

 

 2학년이 되었을때는 졸지에 학생편집장으로 임명되었는데 덕분에(?) 당시 서슬이 시퍼렀던 안기부에 불려다니기도 했다. 또 대학도서관앞 광장을 가리켜 `관악의 아크로폴리스`라는 글을 쓴 일이 있는데 나의 글이 계기가되어 그곳이 `아크로폴리스광장`이라는 지명이 된것도 잊을수없는 추억이다. 하여튼 나의 인생에 가장 기억이 남는 시기였다.나는 이때를 또 이때 함께 어울리며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추며` 서로 사랑을 나누었던 남녀학생기자들을 잊을수가 없다.

 

 2학년 1학기를 마쳤을때 과배치가 시작되었다. 사회계열에는 법대 상대 정치과 외교학과 인류학과등으로의 진학이 허용되었는데 나의 그간의 성적으로는 법대에는 아예 들어갈수가 없었고 나머지학과들에는 아슬아슬하게 들어갈 정도의 성적은 되었다. 그런데 상과대학에 진학하면  평범한 셀러리맨으로 인생이 자리매김될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고 정치학과는 잘못하면 데모나 하다가 감옥에나 가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있었다.

 

 하여튼 타협으로 외교학과를 지원 들어가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나의 인생행로가 이쪽으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수있다.과오리엔테이션시 외교학과를 소개한 노재봉교수(후에 국무총리)가 `야망`과 `낭만`을 유달리 강조했던것 같은데 외교학과와 `야망`의 이미지가 웬지 어울리지않았던것 같은 기억이 남아있다.(나는 어린시절 외교관이라는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기때문에 여늬사람들같이 어릴때부터 외교관이 꿈이었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할수가 없다) 

 

 2년간의 대학신문생활을 끝내고 3학년이 된후 나는 한동안 심하게 방황하였다. 대학신문이 모든것이었던 나에게 갑자기 찾아온 무소속(?)의 생활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외교학과의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외무고시공부를 하거나 유학준비등을 하고 있었다. 나혼자만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다. 특히 대학신문시절 고시공부등을 애써 평가절하하는 분위기에서 지냈던 내가 갑자기 표변해서 외시공부에 뛰어드는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나는 현실을 냉정하게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성공에 대한 큰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나를 키워준 고향과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위해서도 꼭 성공해야했다. 평범한 길로 들어서서 소시민의 일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당시 생각할수있는 방법은 두가지중 하나였다. 유학을 가서 장기전을 꾀하는것이 하나였고 또 하나는 고시에 합격하는것이었다. 그러나 유학문제는 그간의 학점이 시원찮았던데다 경제적문제도 있어서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에 뛰어들수있는것은 고시공부였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된데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도 컸다.나의 맏형님은 경북중고를 나와 서울법대에 진학하신 수재였는데 사법고시만은 뜻대로 되지않아 아버지의 아쉬움이 컸다. ( 지금과 달리 당시는 1년에 20여명정도 밖에 뽑지않았다.) 나는 고시에 합격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나는 외시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외시는 어학의 비중이 큰데다 시험과목도 외교학과에서 평소 전공과목으로 공부하는 국제법 외교사같은 것들이 들어있어서 준비하기가 쉬울것 같았다. 또 평소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강한 열망과 동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고루한 생활이 될것 같은 사시와 행시보다는 외시가 더 적성에 맞을것 같았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3학년때 외시 1차시험에 합격하고 4학년때 2차시험에 합격하는 목표를 세웠다.그리고 1차시험과목에 집중 공부를 했다. 1차는 4지선답형으로서 2천여명이 응시해서 2백5십명이 합격했던것 같다.외교학과동기중에는 1,2차시험준비를 함께하다가 뜻밖에 1차에 불합격 아예 2차시험장에 가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1차시험은 그냥 될줄로 알고 방심하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다.

 

 몇달뒤 있었든 2차시험에는 그냥 시험장의 분위기를 연구하는 정도로해서 두어시간 앉아있다가 나왔다. 당초부터 2차시험준비는 전혀 안돼있었기 때문에 당연한것이었다.다만 2차시험장의 그처절(?)하고 삭막하던 분위기 ,산중 어느 절간에서 몇년간은 공부만하다 속세로 나온것 같던 일부 노숙한 수험생들의 모습등이 기억에 남는다.

 

 이어 4학년이 되어 2차시험을 치를때까지 1년여를 나름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공부는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나 학교도서관에서 주로 했는데 잠은 충분히자고 맑은 정신으로 집중해서 공부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2차시험에 응시했는데 결과는 낙방이었다.그해 과동기생중에 일찍부터 시험준비를 했던 몇명은 합격했던것 같다.

 

 물론 실망이컸다.대학신문등 일찍부터 사회의식에 눈뜨고 나름으로 그간의 대학생활에 대해 자부심이 컸던 나로서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한눈팔지않고 고시공부에 몰두 합격한 친구들이 역시 현명한 친구들이었다하는 생각이 들면서 괜히 학생활동이니뭐니하면서 잘난체(?)하고 다녔던 스스로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여튼 졸업은 다가오고 군대문제등 발등에 떨어진 문제들을 해결하는게 급선무였다. 우선 입영연기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해야했는데 대학원시험도 만만찮은것이었다. 4학년 졸업반의 12월인가에 외교학과대학원시험을 쳤는데 나를포함 외교학과출신들은 거의 합격을 시켜주었다. 그중 다수는 외시공부를 계속하기위한 것이었는데 교수님들도 그것을 알았을것이다..

 

 1978년 새해가되어  2월말에 졸업식을 했다. 일단 대학원에 진학하게 됐지만 마음이 착잡하지 않을수 없었다. 군대문제 직장문제등 모두가 불확실했다.

 

 그해  2월인가에  외시 1차시험을 다시 쳐서 합격했다. 1차시험은 한번 합격하면 그다음해까지 유효했는데 3학년때 합격한 1차시험은 유효기간이 이미 지나 새로 쳐야했던것이다. 

 

  이어 5월인가에 2차시험이 있었다 다행히 대학원은 수업시간이 많지않아 시험준비에 집중할수가 있었다.나는 그동안 해오던데로 주로 기숙사에서 공부를 했다. 당시 나는 관악캠퍼스인근 신림동의 사설 기숙사같은곳에서 살았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원룸 아파트같은곳이었는데 룸마다 별도의 화장실이 있었고 나머지 좁은공간에 1인용침대와 책상이 겨우 들어차 있었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 침대옆의 책상으로 옮겨앉아 하루종일 꼼짝않고 공부하는 식이었다.식사를 할때만 잠깐씩 바깥으로나왔다 들어갔다. 잠은 충분히 잤는데 하루 7시간은 잤던것 같다. 그리고 식사를 위해 들락날락한 시간 또 간혹 친구들을 만나거나 하기위해 시간을 보낸것등을 빼면 책상에 붙어있었던 시간은 하루 평균10시간 전후는 되었던 것 같다.어쨋든 이때 나는 굉장히 집중해서 열심히 하였다.하루하루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정신적으로는 굉장히 외로웠다.그래도 나는 꼭 성공해야한다는 집념을 가지고 버티었다. 당시 나는 누가 지금 나의 이 고독한 분투를 알아줄수있을까하는 메모를 자주 남겼던것 같다.

 

 당시 2차시험은 논술형으로서 여섯과목정도(?)였던것 같다. 그중 3과목을 언어로 택했다. 경제학등 논술과목은 자칫하면 낙제점수가 나올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또 논술과목은 60점을 받기가 쉽지않았는데 언어는 잘하면 70-80점도 가능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영어는 평소 틈틈이 해오던 실력으로 버틸수밖에 없었고 불어도 고등학교부터 계속 해오던 터였다. 문제는 스페인어였는데 아무 기초가 없던 나는 1년여 거의 독학으로 준비를 했다. 외대 스페인어과 교수들이 만든 책을 교재로 공부했다. 발음을 배우기위해 몇달정도 종로2가에 있던 학원에 다니면서 남미이민준비를 하던 아저씨들과 같이 배운것이 전부였다.그래도 스페인어는 불어와 같은 라틴계의 언어여서 독학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여튼 그해 5월 2차시험에 나는 합격하였다.그해는 처음으로 외무고시합격인원을 50명으로 늘린때였다.( 그전까지는 20-30명정도 밖에 뽑지 않았음) 그점에서도 나는 운이 좋았다.이은 3차면접시험에도 통과하였다. 3차면접까지 통과한 사람은 48명이었다.갑자기 내인생의 여러 난제들이 확 풀린것 같았다.나는 인생의 중대한 고비에서 일단 희망하던 곳으로 한단계 도약하는데 성공했던것이다. 

 

 나는 그해(1978) 가을 광화문뒤 `중앙청`( 일본 총독부건물로 한동안 국립박물관으로 쓰였으나 김영삼정부당시 일제의 잔재라하여 철거됨)  안에 있던 외교부청사로 첫 출근하였다. 외교부사무실은 일제가 총독부건물로 지었던 건물로서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한 사회초년병에게 자부심을 주기에 충분했다.외무공무원으로서의 나의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외무고시를 준비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두가지정도가 생각이 난다.무릇 다른 시험준비도 마찬가지겠지만 시험공부는 얄미울정도로 현실적이고 현명(?)하게 하여야 한다는것이다.현명하다는 말은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하루에 3-4간 밖에 자지않고 공부했다와 같은 말은 믿지 않는다. 최소 1년이상의 장기전에 돌입해야하는데 하루 몇시간 밖에 자지않고 건강이 버틸수 없는것이다. 또 절간같은곳에 들어가 도를 딱듯이 하는 공부의 효율성도 믿지 않는다. 잠을 충분히자고 건강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면서 도서관이나 독서실 같은곳에서 주변과 경쟁의식을 느끼며 하는공부가 가장 효율적이라고 본다.

 

 또 고시공부도 최대 2-3년이내에 끝낼수있도록 집중적으로 하는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사람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것이다. 4-5년씩 긴장을 계속유지하면서 공부를 한다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한것이다.평소 꾸준히 관련된 공부(예를들어 어학공부등)를 해나가다가 일정한 시점 1-2년간에 집중적으로 공부하는것이다.

 

 내가 굳이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자면  고시공부는 밑빠진 독에 물을 붙는것과 같아서 바케스에 물을 가득담아 어느 시점에 한꺼번에 쏟아부어야 독이 찬다. 조금씩 계속 부어서는 찰수가 없다. 나는 2차시험장에서 고시공부를 5-6년은 하면서 산전수전을 다겪은것 같은 원로(?)들을 보면서 기가 죽기도 하였는데 그분들이 실제 합격하는예는 잘 듣지 못했다. 

  

 무었이 나를 외교관이라는 직업으로 이끌었는가?  하나는 새로운 지식 새로운세계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과 더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은 열망이었던것 같다. 그것이 나를 경상도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계속 더큰 세계로 나가게했고  또 외교관이라는 직업을 통해 뉴욕 동경 북경등 세계의 중심으로 나가게 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성공과 출세에 대한 열망이었을것이다.시골서 자라면서 주변의 어려운 친인척들과 친구들을 보면서 꼭 성공해서 이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주제넘은(?) 열망을 가졌다. 남자들에게는 때로는 이런 원시적인 권력에 대한 욕망이 그사람의 행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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