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번의 구타'를 다시 보았다.
10여년 만에 다시 보게된 '400번의 구타'...
Les Quatre Cents coups
de François Truffaut
avec Jean-Pierre Léaud
1959, France
'400번의 구타'는 프랑소와 트뤼포(François Truffaut)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로(이 영화의 대부분의 스토리가 감독의 유년시절이었다고 믿어도 될 것이다), '400번의 구타'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건, 프랑스인들이 사용하는 말 중에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400번은 맞아야 한다', '온갖 실수를 하고나서야 어른이 된다'라는 그런 표현에서 온 것이다.
이 말은 사실 트뤼포 감독이 어린시절 가장 혐오했던 말이다. 이런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트뤼포를 임신한 상태에서 결혼을 했다. 상대는 트뤼포의 친아버지 아닌 사람이었다.
그 때가 1932년, 어머니 나이 18세, 결국 트뤼포는 어머니곁에서 떠나 할머니 아래서 자랐다. 그러나 그가 8세때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그는 계부와 함께 살게 된다. 계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을 뿐더러,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어린 트뤼포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게 되고, 독서와 영화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발작의 소설과 히치콕의 영화를 좋아했는데, 그의 모든 영화에서 이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어쨌든, 학교가기를 싫어한 트뤼포는 친구들과 동네를 쏘다니며 잔도둑질이나 일삼는 불량소년이 된다. 그러나, 결국 도둑질은 꼬리를 잡히고, 계부의 신고로 경찰에 넘겨져 소년원에 수감된다.
이 때, 그의 석방을 도와준 사람이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이라는 당시 유명한 프랑스의 영화 이론가였다. 트뤼포가 기고한 영화평을 보고 그의 천재성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6개월간의 소년원생활을 끝내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트뤼포는 군대에 입대하지만, 또 머지않아 탈영하여 도망병 신세가 되는데, 이 때 또다시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바쟁이다. 게다가, 트뤼포를 계부의 양육권으로부터 법적으로 독립시켜주고 자신의 친아들 이상으로 돌봐주며 영화 이론 교육까지 도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트뤼포는 약관의 나이에 프랑스 전통있는 영화 평론지인 '까이에 뒤 시네마(Cahier du cinéma)'의 평론가로 등단한다.
이윽고, 얼마 후인 1959년에, 그의 감독 첫 데뷰작인 '400번의 구타'의 촬영을 시작한다.
그러나 마지막 촬영이 있던 날, 아버지와 다름없던 앙드레 바쟁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그래서 트뤼포는 이 데뷰작을 바쟁에게 헌정했는데(영화 시작에 문구가 나온다), 이 영화는 동시에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 '네멋대로 해라'), 알랭 레네(Alain Resnais; '히로시마 내사랑')와 함께 '누벨바그의 효시'로 대표되는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53세가 되던 1984년에 프랑소와 트뤼포는 세상을 떠났다.
불량소년에서 세계최고의 감독이 되기까지 그의 인생은 영화 그 자체였다.
영화 '400번의 구타'는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중, 12세부터 소년원에 수감됐던 17세까지의 약 5년간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인물은 주인공 앙투완(Antoine)을 연기한 장-피에르 레오(Jean-Pierre Léaud)라는 한 시골 소년이다. 이 소년은 신문에서 새영화 캐스팅 광고를 보고는 그 즉시 가출해서 파리로 올라왔다. 27세의 새로운 예비감독이었던 트뤼포는 이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스크린 테스트나 오디션도 보지 않고, 바로 주인공으로 발탁해버린다. 너무 가난해서 집을 뛰쳐 나왔다는 소년의 가출 동기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똑같았기 때문. 그리고 소년 레오는 영화사에 영원히 남을 놀라운 명연기로 감독 트뤼포에게 보답했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정말 부모의 자녀에 대한 영향이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