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수수께끼와 같다. 모르고 있을 때는 절대로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낙담하지만, 답을 듣고 나면 이거야 원 별거 아니었잖아, 허탈하여 또 낙담하게 되고 만다. 수수께끼 같은 인생이니 그렇게 살아가면서 수수께끼 같은 인물 하나쯤 만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예를 들어 1980년대 후반 우리집 근처 포장마차에 출몰하던 잠옷 여인이 그러하다.
당시 하릴없어 쏘다니길 좋아하고 혼자 술마시길 좋아하고 밤마실에 능수능란했던 스무살의 나는 집앞 포장마차에 종종 들르고는 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아무리 보아도 잠옷의 실루엣에 가까운 옷을 걸치고 나타나서 소주를 마시는 한 여인과 자주 만났다. 아무리 적게 보아도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잠옷 여인과 나는 우동 한 그릇이라는 짤막한 안주를 가운데 두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대부분 만취 상태에서 집앞의 포장마차를 마지막 거점으로 삼는 나는, 잠옷 여인과 나눈 대화를 대부분 기억하지 못했다. 난 다음 날이면 그 수수께끼 같은 잠옷 여인의 얼굴조차 떠올리지 못하며 낙담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조금 말짱한 상태에서 예의 그 포장마차를 찾았고, 언제나처럼 잠옷 여인은 이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여느 날처럼 함께 소주를 나눠 마셨지만 여느 날처럼 그냥 헤어지지는 않았고 결국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녀는 혼자 살고 있었고 한 번의 결혼과 이혼 이력이 있었으며, 아이도 있었지만 함께 살지는 않았고, 직장에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약간의 몽유병 증상을 지니고 있다고 했으며 간혹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포장마차에 앉아 있는 채로 깨어난다고 했다. 나는 잠깐 그녀의 실체를 보고 놀랐지만 육개월에 걸친 잠옷 여인과의 만남 중에 대부분은 그녀의 잠결과 나의 취중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낙담했다.
어째서인지 그날 이후 잠옷 여인을 만나지 못했지만 내게 그녀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이곳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 속, 혹은 요시모토 나라의 그림 속에 있는 아르헨티나 할머니처럼 말이다.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살아 있다. 절대 마음속에서 미리 묻어서는 안 된다.”
소설 속의 나 미쓰코는 엄마를 잃었고 나 미쓰코의 아빠는 아내를 잃었다. 지근거리에 있던 누군가가 죽는 것은 삶에 큰 공동이 생기는 것만 같은 것일까. 부녀는 아마도 그러한 구멍을 느꼈을 것 같다. (사실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 속의 많은 인물들은 대부분 그처럼 생의 구멍에 헛발을 디딘 것처럼 느껴진다.)
“겨울 하늘과 삼 층짜리 낡은 건물과, 울창한 숲 같은 정원. 메마른 식물의 달큰한 냄새와 톡 쏘는 고양이 오줌 냄새가 섞인 겨울 공기가 이곳에서만 결계 같은 역할을 하면서 싸늘하게 빛나고, 살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아, 고요하다. 발을 들여놓고 보니, 모든 것이 아주 평화롭다... 아빠가 왜 여기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아빠는 어느 날부터 마을에서 이상하기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빌딩의 주인이며 아르헨티나 할머니라고 불리우는 유리씨와 함께 살고 있다. 처음에 나는 그러한 아빠의 행동에 의아함을 표현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르헨티나 빌딩에 들어선 다음, 이상하게 아빠를 이해하게 된다. (뭐 사실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 속의 많은 인물들은 이상한 일을 이상하게 잘도 이해한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런 이상한 이해를 독자인 나 또한 이해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죽는 사람은 죽지만 살아 남은 사람은 어쨌든 살아가야 하는 것... 엄마의 죽음,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유리씨의 죽음, 그 이후에도 남은 사람들은 아이를 키우거나 자신의 인생을 성장시키면서 어쨌든 살아가야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남은 이들은 죽은 이들을 기리면서 유적을 만들어가는 것... 너무 짧아 아쉽지만 요시모토 바나나 특유의 기운은 그대로 전달되는 소설이다. 간간히 요시모토 나라의 독특한 그림을 살펴보는 것은 덤으로 붙여지는 재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