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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비추는 빛.

박민진 |2007.07.12 06:24
조회 19 |추천 0


밀양을 다보고 나서 떠오르는 한편의 영화가 있었다. 지성적인 매력이 빛나는 수잔 서랜든과 명배우 션펜의 연기가 돋보인 이다. ‘데드 맨 워킹’의 의미는 사형 집행장에 입장하는 사형수를 뜻한다. 이처럼 영화는 사형제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를 준다. 즉, 죽인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는 물음을 던지는 영화다. 그렇지만 난 다른 곳으로 눈이 돌아갔다. 수녀와 죄인의 대화에는 구원이라는 깊은 물음이 자리잡고 있었던 탓이다.

 

매튜는 살인자이며 강간범에 나치 추종자이고 인종 차별을 서슴지 않는 사회의 쓰레기다. 그의 입장에서 영화가 조명되기에 보는 이는 자연스럽게 살아남은 피해자 가족보다는 오로지 매튜와 헬렌에게로 집중되어진다. 어느새 우리는 그의 죄를 용서하려고 한다. 과연 누구 맘대로 그런 섣부른 짓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영화는 아주 분노케도 션펜이 신의 구원을 받아서 그가 희망의 발걸음을 걷게 된다. 죽는다는 것이 벌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 무지막지한 죄인도 사람이고, 그도 예수의 용서를 받아 이제 천국의 문을 향해 걸어간다는 영화의 흐름은 납득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남긴다. 신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속에서 용솟음치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난 죄인이 구원을 받아 평온한 마음으로 처벌을 받는 것을 두 눈뜨고 볼 수가 없다. 그는 끝까지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고통 속에 죽어야 한다. 그것은 그의 사명이다. 다른 이의 행복을 깨뜨리고, 고통의 나락으로 내몰았다면 그도 그에 온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 이치가 아닐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분노는 무엇인가? 죄 없이 죽어버린 피해자의 억울함은 어디에 호소하는가? 난 매튜가 사형 집행을 받을 때도 울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도 답답한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감정을 속이더라도 난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머리가 있다. 

 가하는 자와 당하는 자의 마음을 모두 생각할 수 없다. 한 치라도 치우쳐 버리면 한쪽은 깊은 슬픔과 절망에 헤어 나오질 못한다.

 

세상을 보면서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다운 햇살과 사람들 그리고 그 무한한 힘과 온기에 몸을 맡기고 나면 세상 가득한 행복에 겨워 기쁨을 느끼곤 한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길을 걸을 때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땀을 흘리고 운동을 하고 사람과 사람이 깊은 대화를 하며 사상을 공유하는 것은 살아가는 이유와 같다. 과연 그 아름다운 현상은 어떤 물리적인 작용에 의해 생긴 것일까? 그런 물음이 떠오를 때마다 하늘을 보며 세상을 감탄한다. 당신의 위대함을 제창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고 만다. 그 이상의 접근은 피한다. 그것의 신의 영역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억지와도 같다. 그저 모른 척 “그런 거 알아서 뭐해?”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신은 우리 곁에 있다. 당신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친구와의 종교 갈등. 내 주변에는 많은 종교인들이 있다. 친구, 선배, 가족 그렇지만 그들 앞에서는 종교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이유는 한 가지 뿐이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의미를 하느님의 구원에 두는 이와 다른 곳에서 찾는 이의 사상은 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사람 다 거기에 많은 관심을 갖지만 애써 피하는 것은 일종의 암묵적인 합의와 같다.

 

신애는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에 대해 끝없는 물음을 던진다. 나를 왜 버린 거냐고. 원수를 왜 제멋대로 용서한 거냐고 말이다. 신의 구원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 유괴범을 보며 신애는 떨리는 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신의 자비로움은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계속해서 생각한다. 신은 왜 죄인을 자신의 허락 없이 용서했을까? 하늘에 있다는 그 절대적인 존재는 아무런 말이 없다. 아이를 죽인 죄인을 용서해 버리고, 아무런 죄 없는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그런 신이라면 신애는 거부하겠노라 다짐한다. 그리고 그를 배반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 교인과의 성관계, 교회 집회 중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를 틀어버리는 말초적인 수단까지 동원해서 하늘의 그 존재를 부정하고, 배반하려 애쓴다. 감독 이창동은 신이라는 것을 비련의 여주인공을 통해 꺼내놓고, 정면으로 부정해 봄으로서 우리가 일상에서 피해버리는 오류를 건드려보려 한다. 일상에서 예의상 피하는 신이 아닌 우리 주변의 신을 인식해 봄으로서 자신의 마음을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난너한테 안져. 절대 안져."

 

보는 내내 그 존재에 대해서 속 시원히 물음을 던졌다. 영화는 관객에게 묻고 자신에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한다. 신애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모두 빼앗겼지만 세상을 용서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 가슴이 터져오고, 목이 쉬어라 고함 쳤지만 그래도 모두 용서했다. 자신을 배반한 남편을 용서했고, 그의 고향을 찾아서 그를 그리워하고 사랑했다. 신애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자식을 잃었지만 예수를 통해 세상과 죄인을 용서했다. 그녀는 넘어가지 않는 밥 한 숟갈에 힘겨워 했지만 성서를 외우며 자신을 다스렸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신이 해준 것은 오로지 마음의 일시적인 평화였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그 죄 없는 아이를 죽이신 걸까요?”

 

종교가 불편하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가 그 불편함을 가중시킨다. 과연 보이지 않는 신의 의미를 믿어야 하는 것일까? 수많은 물음을 던지는 신에게 답을 할 수 없다. 신애가 하늘을 보며 신을 증오하면서도 힘이 빠지는 것은 내가 지금 주체가 정해진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손을 모으고 목놓아 외치지만 하늘의 그는 그녀의 말에 응답조차 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인들은 그 보이지 않는 것에 인생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점은 우리 개개인의 태도이다. 자신의 신념을 신이라는 존재에 넘겨서는 안된다. 나 자신이 믿고있는 사상과 신념은 결코 빼앗겨서는 안된다. 깊은 슬픔은 살을 도려내듯 아프지만 약을 바를 수 있다. 그러나 내 믿음의 손상은 복구시킬 수가 없다. 머리를 뒤흔드는 사상의 몰락은 인간을 무너뜨린다. 신애가 숨을 못 쉴 만큼 고통스럽더라도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종찬에게라도 의지한 체 살아갈 수 있었다면 단정할 순 없지만,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혼자서 자르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종찬은 그저 거울을 들고 서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녀의 주변인으로서 제 역할을 할 뿐이다.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던 것은 오로지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자리잡은 존재조차 희미한 신의 존재가 종찬이 영원한 주변인이 되어버린 이유였다.

 

에서 인간은 섬이라고 한다. 섬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각자의 객체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창조자가 아무리 위대한들 당신의 섬에서 일어난 일까지 신경 쓰는 수고로움을 범하지는 않는다. 종찬이라는 섬과 신애라는 섬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와도 같을 것이다. 그래도 섬과 섬은 갈고리가 있다. 그들이 갈고리를 이어갈 때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여 줄 수 있고, 사랑이라는 개념이 생겨나는 것이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인생을 사는 이치가 아닐까?

 밝게 빛나는 신비로운 밀양의 빛은 희미한 초점으로 다가온다.

 

잘 생각해보니 영화를 보는 내내 한 친구만 생각했다.

내게 많은 고민을 준 아이.

많이 미안해.

 

www.mjmovie.r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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