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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 첩보전쟁 반세기(5)

박종혁 |2007.07.20 12:06
조회 68 |추천 1

“김정일은 ‘600工數’ 처녀와 결혼”

   “성혜림은 월북작가 이기영씨의 며느리인데, 이기영씨는 며느리에게 ‘배우를 그만두라’고 했다. 성혜림이 이를 거부하면서 이기영의 아들과 이혼했다. 이러한 성혜림을 로동당은 해외 공작 파트 요원으로 내보냈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이 시퍼렇게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결혼 적령기에 이르렀다. 이때는 김일성식 공산주의 사상이 극성하던 때였으므로, 김일성은 공산 사상에 투철한 ‘서민(庶民)’ 여성을 김정일의 배필로 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은 ‘600공수(工數)’라는 별명을 가진 서민 출신의 협동농장 농장원과 결혼했다.

협동농장에서는 농장원이 정해진 하루 일을 마치면 1공수(工數)를 마쳤다고 기록해 둔다. 1년은 365일인데 이중 공휴일에는 일을 하지 않으므로 일반인들은 대개 일년에 300공수를 기록한다. 그런데 이 처녀는 하루에 두 곱씩 일을 해 1년에 600공수를 기록해 ‘600공수’란 별명을 얻었다. 이 처녀는 꽤 미인이었다고 하는데 60년대 후반 김정일은 이 처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북한 사회의 특성상 ‘600 공수 처녀’라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이 여성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다 김정일은 이 여성과 헤어지고 무역원을 가장해 해외에 공작원으로 나가 있던 성혜림을 만난 것이다. 북한이 어떤 사회인데 이혼녀가 최고 권력자의 ‘안방’을 차지할 수 있겠는가. 한국인들은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대학을 다닐 때는 성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지만 직업 공작원으로 초대소에서 밀봉 교육을 받을 때는 미묘한 여성 심리를 이용해 여성을 낚는 법을 배운다. 필요한 경우에는 ‘비아그라급’ 정력을 갖는 방중술도 배운다고 한다. 이러한 비법은 남한에 침투한 후 무역가로 위장해 한국 여성을 유혹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한국 여성과 정식으로 결혼해 가정을 꾸미는 것이 주위의 눈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북한 공작원들이 조선로동당으로부터 “누구 누구를 만나 어떠한 지하당을 세우라”라는 지령을 받고 내려온다고 믿고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만나야 할 사람까지 할당받아 내려오는 사람은 공작원이 아니다. 진짜 공작원은 ‘죽은 나무에서 새싹을 틔우듯’ 지하당이 없는 곳에 내려와 지하당을 건설할 수 있어야 한다.

초대소에서 교육을 반복하는 사이, 공작원은 ‘남한에 내려가 이렇게 공작하겠다’는 공작안(案)을 만들어 제출한다. 자의적으로 남조선 혁명안을 만들기 때문에 한국의 물질적 풍요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60, 70년대까지만 해도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은 대개 남한 출신이었다. 이들은 대개 가족들과 접선을 시작으로 지하당을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공작원들이 죽거나 은퇴하면서, 이러한 공작 방법은 사라졌다. 80년대 들어 새로 채용된 북한의 젊은 공작원들은 남한의 ‘자콤’(자생적 코뮤니스트=자생적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해 지하당을 구축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때마침 80년대에는 주사파까지 생겨날 정도로 공산사상에 경도된 젊은이가 많았으므로, 이 전략은 주효했다.

 

할머니 공작원 정경희 미스터리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할머니 공작원이 ‘정경희(鄭慶姬·사망)’다. 73년 정경희는 한국에서의 장기 공작을 마치고 북한에 돌아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연락부(사회문화부의 전신) 부장이 되었다. 정경희는 지하당 구축과 관련해 대단한 공적을 세웠기 때문에 부장이 된 것인데, 아직도 한국의 대공수사기관들은 정경희가 어떤 공적을 세웠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북한도 우리만큼 콩가루 집안이다. 6·25전쟁 전에 박헌영이 남로당의 위세를 과장했듯, 연락부에서도 과장 보고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김일성은 70년대 초반 대남사업총국(지금의 3호 청사)을 폐지하는 등 대규모 숙청 작업을 벌였다. 이 와중에 정경희가 연락부장이 됐는데, 그 이유는 여성이기 때문에 과장 보고를 하지 않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선실이나 정경희처럼 오랫동안 공작을 한 사람들은 꾀가 나서 제출한 안대로 공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적당히 잘 되고 있다는 보고나 올리고 공작금을 유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공작원이야말로 조선로동당으로서는 가장 위험한 적이다. 정부 부처에도 공무원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조사하는 감사원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북한 공작원 세계에서도 남파 공작원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검열하는 ‘검열간첩’이 있다. 부여간첩 김동식이 바로 ‘검열간첩’이었다. 당성이 강한 혁명가도 검열관이 내려와야 더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조선로동당은 잘 알고 있었다.

공작 계획서가 채택된 공작원은 서해의 남포와 해주 연락소, 동해의 청진과 원산 연락소로 옮겨와, 작전부 요원들과 침투 연습에 들어간다. 작전부는 그 동안 남한 정찰을 통해 수백 군데의 침투점을 확보해 놓는다. 특정 침투 지점은 국정원과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한번 침투한 후 10여 년간 내버려 두기도 하고, 어떤 곳은 수시로 이용하기도 한다. 침투지점이 선정되면 이들은 그곳과 지형이 유사한 곳을 택해 2∼3개월 집중적으로 침투 연습을 한다.

각 연락소에는 대개 5개의 ‘방향’이 있는데, 방향별로 1년 2∼3번 공작모선을 출항시킨다. 5개 방향이 있는 연락소라면 매년 10∼15번 침투를 시도하는 셈이다. 그러나 해주와 남포 연락소는 매우 커서 방향이 1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 원산연락소의 1개 방향은 일본 침투를 담당한다.

일본으로 침투한 공작원은 일본인으로 위장해 한국으로 침투한다. 이러한 인물의 대표자는 지난해 비전향 장기수로 북한에 돌아간 신광수(辛光洙)다. 일본으로 침투했던 신광수는 일본인 신분증을 획득해 이 일본인 명의로 여권을 만들어 한국에 들어온 후 검거되었다. 일본 방향은 조총련과 연계해 대남공작 자금을 마련하는 활동도 한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면 조선로동당은 1년에 연 60회에서 90회 정도 공작원을 남파하는 셈이 된다. 공작조는 대개 2명으로 구성되므로 120명에서 180여 명의 공작원이 한국 침투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침투가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반잠수정에 탄 안내조는 대개 음력 그믐을 전후한 3일 사이에 공작원을 상륙시킨다. 그런데 공작모선이 항해하기 힘들 정도로 날씨가 나쁘거나, 침투 지점으로 선정한 곳에서 한국군이 훈련을 벌이고 있으면 침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76년 남해안으로 침투를 시도했던 한 공작원 출신 귀순자는 “서해를 빙 돌아 일본 규슈 앞바다까지 왔는데, 마침 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항공모함이 제주도 앞바다에 와 있어 침투를 포기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북한을 출항한 공작모선은 한국 영해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를 빙 돌아 한국 영해로 접근했다 빠져나간다. 이렇게 먼 거리를 항해하기 때문에 공작모선은 운항 중 한번은 연료와 식수·식품을 보급받아야 한다. 서해로 출항하는 공작모선은 중국 상해에 있는 북한 기지에서 보급받는다. 동해에서 출항한 공작모선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있는 명태 어장 대화태에 큰 어선을 가장해 떠 있는 배에서 보급받는다.

 

절반 정도는 기상악화로 침투 실패

  정확치는 않지만(정확한 것은 작전부만 알 것이다), 조선로동당이 시도한 침투 중에서 약 절반은 기상악화나 한미연합군의 훈련, 기타 기밀 누설 등으로 중지된다고 한다. 북한 공작원의 침투를 막는 최대 세력은 해안 경비를 서는 육군 향토사단이 아니라 일기 불순을 일으키는 조물주의 조화인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 정도는 침투에 성공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침투 중에서 한국 대공수사기관에 걸려드는 것은 1년에 채 1건도 안 되니, 연간 50~100명의 사회문화부 소속 북한 공작원이 한국을 드나드는 셈이 된다.

사회문화부 소속의 공작조를 한국으로 침투시키기 위해서 작전부에서 항해조·기관조·통신조·안내조를 동원한다. 작전부에서는 사회문화부보다 훨씬 더 많은 인력, 최소한 1000명이상을 매년 동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작전부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자 160명을 매년 선발해도 만성적인 인력 부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해군대학(우리의 해사와 유사)이나 해군전문대학을 나온 사람을 특채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기에 지상에서 이들을 지원하는 지상요원과 이러한 사람들을 길러내는 훈련 요원, 그리고 이들의 지휘관 등을 합치면, 작전부의 인력은 대략 1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작전부보다는 적지만 사회문화부와 통전부, 대외정보조사부에도 상당한 인력이 근무할 것이다. 한 소식통은 “조선로동당의 4개 대남부서에는 최소한 2만여 명이 근무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인력도 인력이지만 4개 부서가 쓰는 예산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의 말이다.

“북한 뉴스를 유심히 보면, 풀리지 않던 일들이 김정일이 현지지도를 가면 단숨에 해결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수십 년 동안 빌빌 거리던 숙원사업을, 김정일이 단번에 해결해 주는 비결이 무엇일까. 정답은 김정일이 통치자금을 풀었기 때문이다.

조선로동당의 1년 예산이 얼마인지는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아마도 김정일 통치자금으로 가장 많은 비율이 할당되고 두번째로 대남공작 사업에 많은 금액이 할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많은 예상이 할당되기 때문에 공작원은 초대소에서 생활하고 전 작전부 요원은 위수구역에서 지낼 수 있는 것이다. 김정일 통치자금 중 상당수는 대남공작부서의 숙원 사업을 해결하는 데 할당되므로 북한 공작원들은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 것이다.”

 

북한 財政을 말리는 대남공작

 한국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북한 공작원이 대공수사요원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은 우리의 역공작이 성공했을 때다. 역공작은 북한 공작원에 포섭된 한국인을 붙잡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대공수사기관은 이 한국인으로부터 언제 북한 공작원이 오는지를 알아내고 약속한 날짜에 만나자는 전문을 치도록 한다. 이렇게 되면 접선이 이뤄지는데 접선으로 북한 공작원 잡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접선은 “동지 그 동안 수고 많았소” 하며 굳은 악수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접선은 ‘언제 어디서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꽁초를 주워서 갖고 가라’는 식이기 때문에, 접선하러 온 사람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접선할 때는 북한 공작원도 접선 정보가 누설되었을 가능성에 대비해 수류탄과 권총 등 온갖 무기를 휴대하고 나오므로 매우 주의해야 한다.

고첩으로 활동하는 한국인을 붙잡아 역공작을 펴 북한 공작원을 검거한 대표적인 사례가 부여간첩 김동식 사건이다. 접선이 약속된 날 경찰 보안국 요원들은 등산객과 신도로 가장해 부여 정각사로 나갔다. 이런 가운데 두 남자가 올라오자 이들은 시험삼아 권총을 빼들고 “꼼짝 마”를 외쳤다. 일반인이라면 의아한 표정을 지을 것이므로 그냥 ‘미안합니다’ 하고 물러나면 된다. 그러나 간첩이라면 이상한 행동을 보일터니 그때 붙잡자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너무 빨랐다. 이들은 순식간에 옆산으로 뛰어올라가 권총을 쏘며 대항했다. 상대의 저항이 너무 빠르면 권총을 겨눈 쪽에서 오히려 당황한다. 두 사람을 놓친 경찰 보안국 요원들은 군과 전경대까지 출동시켜 산을 에워싼 후 한 명은 사살하고 총상을 입은 한 명(김동식)은 붙잡았다.

여기서 생기는 궁금증은 ‘그렇다면 북한에는 우리 쪽에 협조하는 고첩이 있을까’란 의문이다. 북한에도 내심 한국 쪽으로 마음이 기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7·4공동성명 이후 대북 공작원을 파견하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북한을 드나드는 중국 동포를 통해 북한 정보는 구해도, 북한에 고첩을 심어 놓는 공작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러 계층의 북한인이 북한을 탈출해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북한 정보는 그리 부족하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은 남조선 고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대형사고가 일어나면 북한은 항상 “남조선 고첩이 일으켰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탈북자들은 “그러한 발표가 있지만 남조선 고첩을 잡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북한은 대남공작에 많은 예산은 소모할 뿐 아니라 대남공작을 하다 죽거나 붙잡힌 공작원의 가족을 끝까지 보살핀다. 북한의 각 행정기관에는 혁명 유가족을 돌보기 위해 ‘11과’라는 기구를 별도로 설치해 놓았다. 한 대공 수사관은 “비전향 장기수가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남한에서 소외된 채로 사느니 평양에 가서 대우받고 살겠다며 그들은 출옥 후에도 전향을 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너지는 대공수사국

  조선로동당의 대남부서와 대남공작 분석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남북통일을 전제로 한 군축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앞서 지적했듯 북한은 군축 회담에 적극 임하면서 동시에 막강한 대남 공작조직을 동원해 남한 흔들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 주한미군을 상징적으로만 감축시키되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감군하자고 주장해 대외적으로는 명분을 쌓은 후, 테이블 밑으로는 남한 내의 지하당을 움직여 ‘혁명 만조기’를 만들려 할 것이다.

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는 여러 지하당을 거쳐 한민전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구국의 소리’ 방송은 지금도 한민전이 평양에 파견했다는 박광기 대표에 대한 이야기를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혁명 만조기에 대응할 한국의 대공수사관들은 무력하기만 하다. 첫째 이유는 그들에게 있다. 86년 경찰청 대공(보안국의 전신)은 박종철군을 고문치사했다. 그로 인해 사회적 비난이 높아지고, 그들의 근거법인 국가보안법 개정이 거론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조차 보안법 개정을 지지할 정도가 되었다.

한 대공 수사관의 지적이다. “80년대의 운동권 학생과 북한 공작원은 엘리트라는 공통점이 있다. 대공수사관들은 이들의 지식을 따라가지 못했다. 논리적으로 압도하지 못하니까 먼저 두들겨 패서 기를 꺾은 후 조사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 그 참담한 결과가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이다. 이제 대공수사관은 ‘네 죄를 네가 알렷다’며 고문하는 식의 수사를 탈피해야 한다.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고 그저 총이나 잘 쏘는 수사관은 더 이상 필요없다. 대공 수사관들은 공부를 해야 한다.”

둘째 이유로는 대공수사를 대표하는 국정원이 정치 싸움의 소재로 전락한 데 있다. 구여권이 96년 총선과 97년 대선에서 안기부 자금을 썼다는 검찰 조사는, 국정원을 극도로 위축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북한 공작원을 잡기 위한 역공작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 수사관이 나올 수 없다.

전직 국정원 간부는 이런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국정원의 국내 파트가 정치 정보를 수집하는 한, 국정원은 정치 싸움의 소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데도 대공수사력을 온전히 지켜내려면 국정원의 북한 및 해외 파트를 국정원에서 떼어내 별도 기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대공수사기관의 월권만 비난하기에는 남북간의 역학관계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제는 북한과의 교류를 늘리는 유화정책과 함께 남조선혁명을 모의하는 자들을 차단하는 정책을 병진해야 한다. 이것이 군축회단에서 북한의 공세를 막고 우리 주도의 통일을 이루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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