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 10월 4일 : 국회,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 10월 16일 : 부산민주항쟁. 부산대, 동아대생의 '정권타도' 교내시위 및 시민 합세한 가두시위 전개
· 10월 18일 : 마산민주항쟁. 학생시위와 관련하여 부산 비상계엄령 발표
· 10월 26일 : 박정희 대통령 피살, 전국 비상계엄령 선포
· 11월 19일 : 전국 대학 휴교 해제
· 12월 6일 : 10대 대통령에 최규하 선출, 긴급조치 9호 해제
· 12월 12일 : 12·12군사반란 발생, 신군부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
1980년
· 2월 29일 : 윤보선, 김대중 등 정치인 687명에 대한 복권 조치 단행
· 3월 13일 : 대통령직속 자문기관으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 발족
· 4월 14일 : 최규하 대통령,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임명
· 4월 30일 : 계엄사령관 지휘관회의, 노사분규, 학원소요 등 폭력 엄단키로 결의
· 5월 6일 : 학원자율화 입영훈련철폐 요구하며 대학가 가두시위 전개
· 5월 14일 : 광주지역 대학생 등 1만여 명 가두진출, 도청광장에서 '민주화 성회' 진행
· 5월 15일 : 서울역 광장에서 학생, 시민 20여만 명이 운집하여 계엄철폐, 민주화 요구
· 5월 17일 : 비상계엄 전국 확대
· 5월 18일 : 5·18민중항쟁 발발
여러분들께서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1970년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80년 광주는 70년대의 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본다는 것은 70년대의 성격과 특징을 더듬어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사회에서 1970년대는 고도성장의 시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수출과 성장 양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장의 이면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성장의 이면을 더듬어 보아야 한국사회의 본질과 80년 광주를 옳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① 성장과 고통의 70년대
한국의 70년대는 박정희식 고도성장시대입니다.
박정희식 고도성장은 성장과 고통이 정비례하는 기형적인 성장이었습니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민중들의 고통도 그만큼 가중되었습니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농촌은 더욱 황폐화되었습니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외세와 외국자본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커져갔습니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자립적 능력은 더욱 약화되었습니다. 박정희식 고도성장은 대외종속형 경제구조를 낳았습니다. 대외종속형 경제구조는 끊임없는 국부의 해외유출을 수반합니다. 그 결과 경제구조가 부실해지고 경제 불황이 주기적으로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70년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한국의 경제는 70년대 말에 이르자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중공업에 대한 과잉 중복투자로 인하여 수많은 기업이 부실기업으로 전락하고 경제 불황이 깊게 한국경제를 드리웠습니다. 대수술이 없이는 한국경제는 빈사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경제 불황을 배경으로 하여 민중들의 민주화 투쟁과 생존권투쟁은 격화되고 유신반대의 함성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제 불황이 80년 광주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② 민주주의의 암흑시대
한국의 70년대는 소위 ‘유신시대’입니다.
유신, 그것은 민주주의의 죽음이며, 유신시대는 중세기적 암흑시대입니다. 모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완전히 부정되었습니다. 허가없이 3인 이상이 옥외에서 집회를 하게 되면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감옥으로 갔습니다. 대학구내에는 경찰의 기동순찰대차가 일상적으로 진주해 있었으며, 전투경찰병력이 상시적으로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어떠한 유신헌법과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발언도 긴급조치위반죄로 적발되고 처벌되었습니다. 감옥들은 긴급조치 위반 정치범들로 가득 찼습니다. 정부에 대한 그 어떠한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중세기적 암흑시대. 이것이 1970년대의 한국사회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중앙정보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국민들의 눈과 귀는 가려졌으며, 입은 재갈로 꽉 물려졌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의 시대, 이것이 70년대 한국정치의 현실이었습니다.
③ 민주화의 성장과 박정희의 죽음
또한, 한국의 70년대는 새로운 민주화 운동의 입니다.
인간은 자주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 어떠한 힘도 인간이 자주성을 말살할 수 없습니다. 자유롭게 세상의 참된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과 의지는 그 어떠한 탄압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법입니다. 억압과 착취는 반드시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법입니다. 한국의 70년대가 그것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70년대는 민주주의 암흑시대이자, 민주화 투쟁이 새롭게 자라난 민주투쟁의 시대입니다. 전태일 열사분신이후 이 땅의 노동자와 농민 청년학생, 도시의 서민들은 생존의 권리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던져가며 투쟁을 펼쳤습니다. 전태일 분신사건, 광주대단지 사건(현재 경기도 성남시에 서울시 철거민들을 이주시켜놓고 아무런 대책도 세워놓지 않고 내 팽개쳐 놓은 것에 대한 분노로 시민폭동이 발생한 사건), 민청학련사건, 인혁당사건, 동일방직 사건 등등 수많은 투쟁의 기록들로 넘쳐난 투쟁의 시대였습니다.
또한, 우리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위대한 힘을 보여주었던 4.19 혁명의 성과를 군사쿠데타를 통해 군화발로 짓밟고 유신통치로 전 국민을 억압하던 박정희가 79년 10월 26일 그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고 한국사회에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렵게 찾아온 ‘민주화의 봄’은 또 다른 군부독재자인 전두환과 노태우에 의해 다시금 군화발에 짓밟히게 되었습니다.
④ 미국의 세계전략과 전략적 요충지인 한반도
한반도는 당시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서유럽과 함께 수레바퀴의 하나가 될 정도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동북아에는 사회주의 강국인 소련, 중국, 북한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미국에 맞서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모스크바와 동유럽이 형제국으로 똘똘 뭉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 주둔하게 된 미군은 어느 나라에서도 누릴 수 없었던 특혜를 이 땅에서 무상으로 누리게 됩니다.
미국에게 전략적 요충지며 그들의 이익이 완벽하게 실현되고 있는 황금의 땅 한국에서 광주시민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정권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전개하자 이에 놀란 미국은 그들의 ‘전략과 이익’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전두환에게 한국군의 투입을 승인하고 미국 항공모함을 보내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한국사태는 인권문제가 아니고 동북아에서 안정유지를 바라는 미국의 이익에 관한 문제였다.”
-5월 31일 미 고위정책 재검토회의-
“사이공 함락 후 아시아에서 미국의 우방이 맞이한 최대 위기며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다.”
-5월 27일 워싱턴 포스트-
미국의 세계전략은 75년 베트남전 패배, 캄보디아 혁명, 미국의 안방인 남미에서 칠레, 니카라과 혁명, 아프니카스탄에 소련군 진주 그리고 결정적으로 79년 이란혁명으로 미대사관이 점거되면서 큰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런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국의 ‘세계전략과 이익’에 엄청나게 중요한 한반도에서 시민들의 무장항쟁이 일어나자 질겁하게 됐으며 군사적으로 적극 개입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