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성기 "빛의 화가:모네" 전시회 관람기
'수련' 이 백내장 앓은 뒤의 작품이란 말에 '전율'
'매너리즘에 빠지지 마라' 는 예술가의 교훈인 듯
배우 안성기의 가족은 미술 가족이었다. 부인과 큰 아들이 모두 미술을 전공했다. 안성기는 환한 미소와 함께 “가족과 함께 미술전을 본 지 오래됐다. 꼭 한번 다시 전시회를 찾겠다”고 약속했다. 임재범기자 happyyjb@sportshankook.co.kr
최근에는 방학을 맞이한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안성기가 서울시립미술관에 모습을 드러내자 구름같은 팬들이 모여들었다. 안성기는 국민 배우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부드러운 미소로 팬들의 관심을 응대할 줄 알았다. 혹여 다른 이들의 관람에 방해가 될까 조심스럽게 전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안성기가 전시회를 찾은 25일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 가 개봉하는 날이기도 했다. 올들어 가장 바쁜 일정 중에도 안성기가 ‘빛의 화가’ 모네를 만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수려한 작품에 빠지려 짬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빛의 화가와 함께 행복한 미소로 느릿느릿 걷는 여유를 만끽한 안성기의 소감을 들어봤다.
언제인가부터 영화계 대소사를 챙기는 일이 잦아졌다. 자연히 가족과 함께 미술관을 찾는 여유와는 멀어지게 됐다. 마지막으로 전시장을 찾은 것이 지난해 가을이었으니 오랜 동안 각박하게만 살아왔다.
한국 영화계가 총체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와중이라 더욱 마음이 쪼들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와중에 전이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부드러움과 강렬함을 넘나드는 색감과 터치에 매료되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좀처럼 짬이 나지 않았다. 결국 시간을 쪼개 고른 날이 내가 출연한 의 개봉일이었다.
영화 개봉을 앞둔 배우의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을 누가 상상조차 할 수 있겠냐마는 오늘이 아니면 모네를 만날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발길을 옮겼다.
덕수궁 곁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서울시립미술관은 움추려든 내 마음에 고요한 평안을 허락하는 듯했다. 덕수궁 돌담길이 주는 운치에 젖어 눈을 슬그머니 감을 무렵, 미술관을 둘러싼 수목의 내음이 지친 내 일상에 청량감을 안겨주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 자체가 한폭의 수채화를 연상시켰다. 모네전은 녹음이 짙어가는 푸르름 속에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오랜 친구처럼 날 푸근하게 맞이했다.
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배웠던 기초적인 미술 지식만을 간직한 나에게도 끌로드 모네의 예술적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는 당대 미술사에 대변혁과도 같은 인상주의를 고집스레 이끌어갔다.
전시장 입구에서 나를 처음으로 맞이한 (1914~1917)은 그림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멀리서 바라봤을 때는 부드러운 색감이 한동안 그림에 빠져들게 했다.
가까이 다가서니 강렬한 붓터치가 정열적으로 살다간 예술가의 숨결을 새겨놓고 있었다. ‘허허’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모네의 인상주의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이 중심이다. 빛에 따라 달리 보이는 사물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다. 모네는 첫 작품부터 나같은 미술 문외한에게도 인상주의가 이런 것이겠구나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모네는 86세의 일기를 마감할 때까지 총 2,000여점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모네는 인상주의가 막을 내릴 무렵 하나의 모티프를 같은 시각에서 빛의 변화에 따라 그리는 시리즈 작품에 몰입하게 됐다.
이중 200여 작품을 남긴 연작은 모네가 보여준 작품세계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나 역시 미술학도였던 집사람과 현재 미국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있는 큰 아들 녀석에게도 이에 대해 간간이 들어왔던 터라,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내 발길을 가장 오래 붙들어 놓은 것은 이다. 첫눈에 ‘수련’의 모습이라고 알아차리기에는 혼란스럽도록 어지러운 붓놀림이 인상적이었다.
색채와 터치만을 사용해 형상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극단적인 이미지가 화폭에 담겨 있었다. 흔히 볼 수 없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작품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자 눈이 생명인 미술가에게 치명적인 백내장을 앓고 난 뒤의 작품이라는 설명이 뒤이었다.
순간적인 전율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이런 예술에 대한 열정이 고흐나 고갱까지 영향을 미치는 역작을 가능케 했구나’라는 감상은 설명을 듣지 않아도 유추할 수 있었다.
‘모네가 백내장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추상주의도 수년 아니 수십년이 지난 후에야 등장했겠지’하는 짐작도 가능케 했다.
예술가에게 시련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진일보시키는 필수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자, 평탄하게 좋은 작품을 만나오며 행복하게 배우생활을 했던 내 자신이 작게만 느껴졌다.
과 함께 또 다른 연작으로 사랑을 받아온 , 국내에 첫 선을 보이는 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2층과 3층으로 이어지면서 5개 테마로 전시된 대표작 60여 점은 국내 최대 규모의 ‘모네 회고전’이란 말을 실감케 했다. 특히 물의 작가로 불리우는 모네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네는 세느 강변에 자리한 아르장테이유와 베테이유, 푸아시 대서양 연안의 에트르타 푸르빌, 옹플뢰르를 지나 런던의 템즈강, 네덜란드의 튤립밭, 지중해의 앙티브, 아드리아해의 베니스까지 물가에서 작품세계를 이어갔다.
노후를 마지막 열정으로 불태웠던 지베르니의 정원 연못도 마찬가지였다. 물가에 비춰진 빛을 통해 사물을 관찰하고 적당하게 모방하지 않고 독특한 감각으로 재해석해서 표현했다.
모네가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린 것은 물론 백내장의 시련을 극복하며 추상주의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도 이런 과정이다.
이런 작품세계를 가까이, 혹은 멀리서 찬찬히 감상하며 모네가 근대 미술의 말기를 풍미한 미학의 선구자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고집스러운 예술가임을 새삼 느꼈다.
모네는 40세가 되기까지 지독한 가난과 싸워야 했고 노년에는 백내장으로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인상주의 신념에 충실하기 위해 매일 수 십개의 캔버스를 들고 야외에서 빛의 변화에 따른 반사현상을 포착하기를 반복했다.
어떤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고 한길을 걷어갔던 한 예술가의 집념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라고 배우의 길로 걸어가라고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모네와의 만남은 의 물결처럼 잔잔한 여운으로 가슴 속에 고이 남겨졌다. 먼 훗날 돌아봤을 때 지쳐있던 내 일상에 소박한 여유를 누렸던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