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59:9-16
제목: 중재가가 없음을 보시고
작성: 손운산 목사
일시: 2007. 7. 29.
장소: 대학교회
우리는 지난 10 여일 동안 아프카니스탄에서 봉사활동을 벌이다 피랍된 23명의 우리 국민들에 대한 안전과 조속한 귀환을 위한 협상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피랍된 지 열흘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억류된 상태에 있습니다. 인솔자이셨던 배형규 목사님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쓰셨던 분이셨는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남은 스물 두 분들이 빨리 무사하게 돌아오시기만 위해서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문과 방송과 텔레비전이 이 분들과 관계된 소식을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들은 거의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저도 다른 설교를 준비했었지만, 생각과 마음과 기도가 이번 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오늘 말씀도 이번 사건과 관계시켜서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새벽까지 풀려났다는 소식을 기다려 보았지만 여전히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무슨 말씀을 어떻게 드려야 할 지 답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안타깝고 답답함을 그대로 예배로 표현해도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일로 우리 교회들의 선교와 선교방식에 대한 많은 비난과 비판이 쏟아지고 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내는 나라라고 합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약 16,000명의 선교사님들이 150개 국에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분들 가운데는 우리 대학교회의 교우이신 4 분의 선교사님들이 캄보디아에 계십니다. 16,000 명, 엄청난 숫자입니다. 우리 이화 여대의 학부생 전부를 합친 숫자보다 많습니다. 이분들은 우리들이 아는 곳, 혹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오지에 가서 일하고 있습니다. 전도도 하고 고아원을 운영하고 유치원을 설립하고, 병원을 세우면서 정말 수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 말고 여름방학과 겨울 방학에는 소위 단기 선교사라고 하여 일주일 혹은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선교라는 이름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수천 명입니다. 방학 동안에 인천 공항은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 단기 선교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붐빈다고 합니다. 이렇게 수천 명의 단기 선교 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거의 젊은 사람들이고, 대학생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돈 주고 가라고 해도 안 갈 텐데, 자기 돈을 내면서 가서 봉사합니다.
우리 교회들은 그동안 경쟁적으로 선교사를 보내왔습니다. 선교사를 보내고 지원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것처럼 강조했고 자랑거리로 선전하였습니다.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도, 우리 이화대학이 이렇게 존재하게 된 것도 선교의 결과입니다. 90년대까지는 교회의 양적 성장을 교회의 첫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90년대부터는 한편으로 사회봉사에 조금씩 참여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선교사 보내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기업들이 해외로 뻗어나가고 해외에 공장을 세우는 것 이상으로 우리나라 교회는 해외에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믿음 좋은 젊은이들에게 예수님께 헌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교사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선교사들의 숫자가 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선교사 보내기 경쟁이라도 하듯이 교회들마다 선교단체들마다 수많은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선교사를 보내는 일 자체는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아프리카의 오지나 열악한 환경 가운데 있는 곳으로 가서 봉사하고 전도하는 일은 아무나 하지 않고, 아무나 할 수도 없습니다. 정말 헌신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선교지의 문화나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열심히 선교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국이나 러시아의 큰 광장에서 소리 높여 찬송 부르고 전도지를 나눠주다가 제지당하기도 했습니다.
또 땅을 밟으면 그 땅이 거룩한 땅이 된다고 하여 몰려다니면서 땅 밟기를 했습니다. 이 땅 밟기라는 말을 우리 대학교회 교우님들은 잘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어느 선교 단체에서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땅을 밟고 지나가면 그 땅이 거룩해 진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우리 학교의 기독동아리 학생들이 학교 창립기념일 행사로 이화 땅 밟기를 한다고 하면서 찾아왔습니다. “그게 뭐냐? 왜 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이화가 너무 세속화되었고 잘못된 신학과 나쁜 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자기들이 땅을 밟고 지나가면 그런 것들이 물러가기 때문에 이화 동산을 밟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단도 쳐주고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교만한 생각이다. 나는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는 생각이며, 밟고 지나가면 내 것이 된다는 정복의 개념이다. 이화동산은 지난 120년 동안 하나님의 은총이 머문 곳이며 하나님의 은총의 동산이다. 만일 너희들이 이화 동산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거기에 머문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경험하고 싶다면 순례의 심정으로 걸어 다닌다면 좋은 일이다.”
잘못된 생각은 어린 학생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잘못 가르쳐 주었고 선교 단체들이 심어 준 삐뚤어진 사고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 십 명 때론 그 이상의 중동의 이슬람교도들이 몰려와 수시로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엎드려 알라 신에게 절하고, 기도하고, 코란경을 외우고, 땅 밟기 시가행진을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지금 제가 드린 예는 물론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지금은 선교사로 나갈 때는 많이 훈련받고 파송되며,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웁니다. 평생 동안 그 나라에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존경받은 선교사님들이 많습니다. 정말 예수님처럼 그들을 돕고 치유합니다.
교회에는 바울 전통과 예수님 전통이 존재해왔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본 적이 없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적으로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가장 위대한 기독교인, 역사상 가장 탁월한 기독교인입니다. 바울에 대하여 상반된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첫째로 바울이 없었으면 지금 기독교가 세계에 전파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바울이 없었으면 기독교는 아직도 소종파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둘째로 바울이 전한 예수님이 진정한 예수님일까라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바울이 신약 중에서 13권의 책을 썼지만 그것은 예수님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바울은 “너희들이 믿고 전하는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유대교와의 관계 가운데서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기 위해서 주로 성경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서신에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교리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선교 여행을 여러 번 다녔습니다. 바울의 많은 교회를 세웠고 전도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기독교의 전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전통은 좀 다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실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 세상,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강조하셨고 실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이 대접받고, 아픈 사람들이 치유 받고, 억눌린 사람들이 자유와 해방을 얻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데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독교를 확장하는 데 생애를 바쳤습니다.
물론 교회는 바울 전통과 예수님 전통이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즉 교회가 많아지고 기독교인이 많아지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뜻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바울 전통이 더 강조되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이 추구하셨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기 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더 많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보았습니다. 그 결과로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기독교를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 추구하셨던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사랑 실천에 게을리 하였습니다.
불신자뿐만 아니라 이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개종시키려고 하고, 그것이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길이고 그것이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 다른 종교인들과 마찰을 빚게 되고 때론 심각한 갈등을 초래하고 심지어 종교 전쟁까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해외에서 뿐 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지금도 자주 일어나곤 합니다. 몇 년 전에는 제주도에서는 한 집사님이 불교의 법당에 몰래 들어가 망치로 불상들을 다 깨뜨렸습니다. 그 법당 안에는 천개의 작은 불상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을 밤새 부수다가 지쳐서 쓰러지는 바람에 잡히고 말았답니다. 그 때 불교에서는 깨어진 불상들의 사진을 찍어 각 신문사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 큰 충돌이 날까 두려워서 신문사에서 사진을 싣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불교신자들 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순복음 교회나 영락 교회에 불 질러야한다는 이야기도 했다고도 합니다. 우리 교회의 어떤 분에 의하면 최근에 조계사 앞에서 전도지 나눠 주다가 승려들에게 붙잡혀 몰매 맞고 입원까지 한 목사님도 계시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번 아프카니스탄에서의 일을 통하여 우리 한국교회는 많이 반성해야 합니다. 반성은 단순히 선교사를 어떻게 보내고 선교사들이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에 대한 반성 뿐 만 아니라, 우리 교회들의 전반적인 신앙 활동에 대하여 철저하게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는 바울적인 전통보다 예수님 전통을 따라야 합니다. 약자들을 보살피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도 소리 내어 실천하지 말고 아주 조용히 아주 낮은 목소리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그동안 큰 교회당 건물들, 담임목사 세습, 시끄러운 전도, 타인과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 영성의 상실 등으로 많은 비난과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교인수의 감소에서 드러납니다.
종교별로 보면 불교 신자가 전체인구의 22.8%로 가장 많으며, 다음으로 개신교와 가톨릭 순이다. 1995년부터 2005년 까지 10년 동안 종교인구가 가장 많이 증가한 종교는 가톨릭이다. 가톨릭 신자는 현재 514만6천명으로 10년 전인 지난 95년의 295만1천명보다 74.4%가늘었다. 그런데 유독 개신교 신자는 876만 명에서 861만6천명으로 1.6%가 줄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의 약자들을 보살피고 이 땅에 평화를 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종교나 문화를 존중하고 그들을 향한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종교들 사이의 경쟁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자기 종교 이외의 종교를 타종교 혹은 잘못된 종교로 보기보다 이웃종교로 보고 존중해야 합니다. 비교종교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독일 태생인 영국의 뮬러(Max Muller, 1823-1900)는 “외국어를 모르는 자는 자기나라 말도 모른다.”라는 괴테(Goethe)의 말을 종교에 적용하여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관점에서 “예수만 아는 기독교인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다”라는 말도 성립됩니다. 나아가서 다른 종교들과 협력하여 이 시대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테러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어떤 종교적 이유라도 생명을 파괴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텔레반들이 누군가에 대하여 자료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말만 들었던 그들이 누구인가?
1979년 이후 구소련의 침공에 있던 아프카니스탄은 미국 지원과 구소련의 붕괴로 1989년 구 소련이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내전 상태가 되어 더욱 혼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런 혼란 가운데서 1994년 학생 혹은 구도자라는 의미인 텔레반이 결성되는데 25,000 명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텔레반은 1996년에 아프카니스탄을 집권하였으나 독재정치를 하여 국민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샀습니다.
2001. 9.11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은 주범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카니스탄에 있다고 보고 그 해 10월에 최신 무기를 앞세우고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여 탈레반 정권을 몰아냅니다. 탈레반 정권은 축출됐으나 미국의 침공 이래 6년이 지나도록 빈 라덴을 잡지 못했으며,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살상한 것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그동안 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죽임 당했으며,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배출되었습니다.
미국은 탈레반을 축출하고 반 소련 독립항쟁 지도자였던 친미파 하미드 카르자이를 아프간 새 대통령으로 내세웠으며. 치안유지군(ISAF)이라는 이름으로 다국적군까지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나 탈레반을 제거하는데 실패했습니다. 민심은 떠났고 차라리 텔레반 정권 때가 더 좋았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연합군은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의 생업인 아편농장을 다 갈아엎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탈레반에게 호의를 갖기 시작했고 동시에 탈레반이 세력을 규합했고, 아프칸 현 정부와 연합군을 몰아내기 위한 자살테러를 감행하여 2006년에만도 4,000명이 죽임 당했습니다. 탈레반은 2006년부터 외국인을 납치하고 그들을 인질로 삼고 자기들의 포로와 교환을 주장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지난 19일에 23명의 우리나라 봉사대들이 피랍되었습니다. 작년에는 한국의 어떤 선교단체에서 2,000여명의 몰려가 평화대행진을 하려고 하다 정부의 만려와 아프칸 정부의 불허로 행사가 취소되기도 했었습니다. 아프칸의 앞날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혼돈되어 있으며 언제 평화가 올지 참으로 암담한 상태입니다. 현재도 우리나라의 수많은 민간 단체들이 그곳에 가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한탄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상태에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설명은 공평이 없고 공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폭력과 불의로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희망 없는 캄캄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삶 자체는 죽음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호소하고 외쳤으나 아무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우리 모두가 곰처럼 부르짖고, 비둘기처럼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지만 공평이 없고, 구원을 바라지만 그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다고 했습니다. 14-15절에 그래서 공평이 뒤로 밀려나고 공의가 멀어졌으며, 성실이 땅바닥에 떨어졌고, 정직이 발붙이지 못합니다. 성실이 사라지니, 악에서 떠난 자가 오히려 약탈을 당합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어서 부상당한 곰처럼 부르짖고, 비둘기처럼 슬피 운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하나님도 슬퍼하셨다고 했습니다. 아프카니스탄, 그 사막, 물과 음식과 거처 할 것도 없는 척박한 땅, 그런 상태에서 내전으로 하루에도 수 백 명이 죽임당하고 난민들이 떠돌고 있고, 수 만 명의 군인들이 그곳에 집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 상황을 보시고 슬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슬퍼하셨을 뿐 만 아니라 그런 상황을 보시고 이상하게 여기시고 놀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상하게 여기셨을까? 무엇 때문에 놀라셨을까? 16절에 “압박받는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주께서는 놀라셨다.”
수많은 사람들이 압박받고 있는 도우려는 사람이 없고, 여러 집단들이 갈등 가운데 있는 데 그들 사이를 중재하는 사람들이 없음을 보시고 놀라시고 이상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아프카니스탄의 사태를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 땅에 공평이 없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실 것입니다. 수 십 년 동안 남의 나라의 지배와 내전으로 수십 만 명이 죽임당하고 수백 만 명이 난민이 되어 버린 상황을 보시고 슬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갈등 가운데서 여전히 하루에도 수 백명씩 죽임당하는 상황에서도 제대로 도우려는 사람들도 없고 그들 사이에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놀라실 것입니다.
수만 명의 군인들, 그 땅에 평화를 위해서 주둔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나라도 이제 많이 부강해졌으니 고통당하는 나라에 평화를 세우기 위해 민간인 군인 학생들을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정반대가 현실입니다. 큰 나라가 전쟁을 일으키면 그 다음에 우리나라가 불려가곤 합니다. 이라크도 그렇고, 아프카니스탄에도 그렇고, 최근 미국과 이스라엘이 침공한 레바논에도 그랬습니다.
남은 22명이 어떻게 풀려 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미국과 아프칸 정부의 노력 없이는 힘들다고 말합니다. 탈레반이 요구하는 포로들을 풀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라는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쳐다만 보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 사람들이 저렇게 피랍되었다면 가만히 있을까? 분통터지는 일은 우리 국민들 23명이 피랍된 다음, 우리 국민과 정부는 조마조마하면서 그들을 구해 내기 위해 최선 다하고 있는 그 시간에도, 미군과 연합군은 텔레반 소탕 작전을 펴서 100명도 넘는 텔레반들을 죽였습니다. 아니 전쟁을 하다가도 우리 국민들이 풀려 날 때까지 중단해야 하는데 피랍된 다음 날부터 텔레반 소탕 작전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들의 귀환을 위해 미국의 힘이 필요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압박당하는 사람들을 구하려는 사람도 없고 중재자가 없음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은 스스로 나서서 구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6절에서 “압박받는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주께서는 놀라셨다. 주께서는 직접,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반드시 공의를 이루시려고, 당신의 능력을 친히 발휘하실 것이다.”
아프카니스탄의 상황, 그리고 피랍된 우리나라 사람들, 중재자도 없고 구원자도 없고 묘책도 없는 암담한 상황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때입니다. 남은 22명의 우리 형제자매들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가장 좋은 길이 열리길 기원합니다. 그 땅에 진정한 평화가 빨리 찾아왔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셨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