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30일 KBS 방영 이정기 장군 역사는 그 민족의 혼이다. 민족의 후예는 선조의 얼을 이어 새 역사를
창조해 간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는 오늘날 얼마나 사실대로 전해지고
있는가? 동북아시아를 웅비했던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9천년 역사는 철저히 유린되고, 왜곡되고, 말살되었다. 인류의 시원사와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한민족 9천년 역사가 언젠가는 정확하게 재조명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기 만주 대륙을 풍미했던 옛 고구려의 사라진 역사의 일편을 밝혀 보고자 한다. 서기 668년, 900년간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해 온 거대왕국
고구려(高句麗)가 멸망했다. 그 동안 고구려는 동이족(東夷族)의 국통을 이어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해 왔다. 을지문덕(乙支文德), 연개소문(淵蓋蘇文), 양만춘(楊萬春) 등 불세출의 영웅들이 대륙을 호령할 때마다, 고구려를 침략한 수백만 중국인의 뼈가 고구려의 산하에 묻혔다. 이러한 고구려(高句麗)가 연개소문(淵蓋蘇文) 사후 어이없게도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일어나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영원히 이길 수 없을 줄 알았던 고구려를 차지한 당나라는 철저히 고구려를 궤멸시켰다. 고구려의 산하에 묻힌 수백만 중국인의 복수를 철저히 했다. 그리고 고구려 왕족들을 비롯한 20만의 고구려인을 당나라로 끌고 하면서 다시는 고구려와 같은 강국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900년 장구한 역사의 고구려가 그리 쉽게 숨을 멈추진 않았다. 서기 670년 4월, 보장왕(寶藏王)의 외손 안승(安勝), 검모잠(劍牟岑) 등이 창과 칼을 들고 일어났다. 뒤이어 대중상(大仲象), 대조영(大祚榮) 부자가 동모산에서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하여 대진국(大震國)을 세웠고, 당(唐)의 세력을 몰아내고 잃어버린 옛 영토를 회복하는 다물(多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서도 고구려의 영토를 제대로 지배해 보지도 못한 채 다시금 자신들의 영역으로 쫓겨가야만 했다. 한편, 당나라로 끌려간 20만명의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중국 오지를 방황하면서도 고구려의 정신을 잊지 않고 당군과 싸우기도 했고, 옛 고구려 땅을 찾아 떠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모습은 점차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혹은 죽었을 것이고, 혹은 이민족에 동화되었을 것이고, 혹은 1,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느 이름 모를 곳에서 고구려의 후손으로 핏줄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역 당나라에서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사라져 간 고구려의 자손 가운데는 서역을 정복한 고선지(高仙之) 장군도 있었고, 무열(武列)의 명예에 봉해진 왕사례(王思例)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적 시각으로 보면 그들은 단지 뿌리가 고구려일 뿐이지 죽는 날까지 중국에 충성하며 일생을 영화롭게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정기(李正己) 장군, 그는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고선지나
왕사례와는 달리 뜨거운 민족혼의 숨결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중심부에 나라를 세워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58년간이나 고구려의 명맥을 이끌어 나간 주인공이다. 732년에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정기는 패망한 고구려의 동포들이 당나라 사람들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지켜보았다. 그래서 자연히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웅대한 뜻을 키워 나갔다. 이정기는 타고난 무장(武將)으로의 재능을 인정받아 평로절도사(平爐節度使) 산하에서 비장으로 근무하였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화북지역을 장악하자, 장안의 당나라 조정과 요동지역의 평로절도부는 양쪽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정기(李正己)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요동지역의 군사들은 대다수가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정기는 이들을 규합해서 758년에 절도사 왕현지가 죽자 평로절도부를 접수하고 요동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동쪽에는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한 발해(渤海)가 있었기 때문에 이정기는 따로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 대신 민족의 원수 당나라를 정벌하여 고구려를 세우고자 하였다. 761년 이정기는 고구려
유민들로 편성된 2만여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마침내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상륙하였다. 당나라는 1개 주에 수만의 병력을 배치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정기가 거느린 2만 군사는 그리 많은 병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산동성 부근에는 고구려 멸망 당시 강제 이주되었던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노예처럼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정기의 군대가 고구려 부흥의 기치를 들고 중국 본토에 진격해왔다는 소식에 크게 고무(鼓舞)되었고 당나라 관헌에 저항하며 일어섰다. 이정기(李正己)의 군대는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며, 당나라의 10만 대군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10개 주를 장악하였다. 서기 777년에 이르러서는 조주, 서주 등 5개 주를 더 확보하여 총 15개 주의 광활한 영토를 차치하게 되었다. 이때 그가 지배한 인구는 평로까지 합쳐 130만여 호에 800여만에 이르렀다. 이 해에 이정기는 당의 수도 장안을 공격하기 위해 치소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겼다. 이정기는 781년에 당군과의 일대접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용교와 와구를 점령하여 당나라의 수송로인 대운하 영제거를 차단하였다. 대운하는 강남(江南)의 풍부한 물자를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으로 이동시키는 당나라의 대동맥이었다. 그런데 이 대운하를 이정기의 군대가 점령하자 장안의 당나라 조정은 크게 당황하여 혼란에 빠졌다. 이정기는 10만의 대군을 양성하여 장안으로 총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천명(天命)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치청번진(枝城藩鎭)의
고구려군이 변주의 당군 20만명을 무찌르고 성에 고립시킨 후에 낙양으로 진격하려던 순간, 큰 별 하나가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졌다. 이정기의 명(命)이 다한 것이다. 당나라의 마지막 거점지인 낙양과 장안을 눈앞에 남겨두고, 고구려 부흥을 위해 정의의 칼을 휘둘렀던 이정기(李正己)는 49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치청번진(枝城藩鎭)의 군사들은 비통함을 무릅쓰고 퇴각하였다. 장안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당나라의 황제 덕종(德宗) 이하 문무관원들은 기쁨에 겨워 3일 동안이나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다음해에 이정기의 아들 이납(李納)은 운주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제(齊)로 선포하였다. 그런데 이정기가 죽은 지 한 달도 안되어 그의 사촌인 서주의 이유(李劉), 덕주의 이사진(李師眞), 체주의 이장경(李長慶)이 당에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운하를 다시 개통하였다. 대담하고 지혜로운 이납은 아버지가 못다 이룬 대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운하를 끊고 변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황하를 도강하기 위해 만들어둔 3천여척의 선박이 때아닌 가을 장마에 떠내려가 버렸다. 또 한번 중원 정복의 꿈이 좌절된 것이다. 그 후 이납은 꿋꿋이 왕국을 잘 지켜 나갔지만 불과 41세의 나이로 단명하였다. 이납의 뒤를 이어 제왕(齊王)에 등극한 이사고(李師考)는 부국강병책을 써서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했다. 그러나 그도 명이 짧았다. 겨우 14년간 제위에 있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뒤를 이사고의 이복 동생 이사도(李師道)가 이었다. 이사도는 이납이 중국인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도 어머니가 정해 준 중국 여인 위씨(魏氏)였다. 그런데 그녀는 제국(齊國)의 대소사에 관여하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친척인 중국인들을 데려다 제국의 요직에 앉혔다. 이사도의 말년에는 하였다. 이사도(李師道)는 당나라 황제 헌종(憲宗)이 제국(齊國)을 침략하기 위해 200만섬의 군량미를 준비해 비축한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을 불태워버리고 낙양성을 공격하여 궁궐을 파괴하였다. 또한 하남 이곳 저곳에 산책을 유격전도 감행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중국인들이 제국(齊國)의 요직을 차지해 가면서 점차 나라의 기강과
고구려의 정신마저 서서히 병들어 갔다. 제국(齊國)이 쇠퇴기로 접어들자 헌종(憲宗)은 선무, 위박, 의성, 무령, 횡해 등의 여러 절도사에게 군사를 일으켜 제국(齊國)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 당나라는 바다 건너 신라에게까지 지원군을 요청하여 818년 7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제국(齊國)을 총공격하였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또 한번의 가슴아픈 동족상잔이 벌어진 것이다. 연합군 수십만명이 사방에서 협공하니 한점 섬처럼 고립된 고구려 유민들의 제국(齊國)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이사도가 부하인 유요에게 살해당함으로써 668년에 고구려가 패망하고 100년이 지난 후, 망각의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 같던 고구려의 불씨가 다시 이정기 장군을 통해서 되살아나 당나라와 대적한지 58년만에 이제 그 불꽃도 영원 속으로 사라져간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의 혈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국(齊國)이 붕괴한 뒤 장보고(張保皐)는 신라(新羅)로 돌아와
청해진(淸海鎭)을 무대로 동북아시아의 해상무역권을 장악하여 해상왕이 되었다. 중원대륙을 지배하려 했던 이정기의 원대한 구상을 지배하려 했던 이정기의 원대한 구상을 장보고가 바다에서 이루어낸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년의 세월이 지난 838년, 일본의 승려 원인(圓仁)이 구법을 위해 장보고(張保皐) 선단의 전함을 타고 중국의 산동 지방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 곳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그 때까지도 중국인으로 동화하지 않고 마을을 이루고 고구려 언어를 쓰며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의 마지막 영웅 이정기(李正己)! 어찌하여 이같이 찬란했던 민족의 영웅이, 민족의 정신이 1,200년 간 역사의 저편에 묻혀 있었던가? 고구려의 후예가 분명한 우리는 왜 이처럼 고증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이제는 과거 사대모화사상과 친일 식민사관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할 때이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 티베트, 감숙성, 안휘성, 산동성, 사천성 등지에 우리 민족의 피와 땀이 밴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