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는 수밖에 없나」
"모든게 뻔하고 훤한 세상이에요. 마치 삼류영화를 보듯이 반전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기가막히게 잘 들어 맞는 영화에요. 별다를것도 특이할만한것도 없는게 우리 일상이죠, 되려 사건은 짜증을 유발시킬 뿐이에요.. 기막힌 고통도 기막힌 노력도 요구되지 않는게 현대이자 기막힌 고통과 노력이 필요한게 현대 아닙니까.
정확히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온갖 사상과 지식이 난무하는 도서관엘 가보세요. 당신은 마치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골라먹듯 어떤 사상이든 마음대로 빼먹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개성의 몰살과 자아의 죽음에 있습니다.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어요. 그 누구도 틀을 깨뜨릴 수 없어요. 나비가 되길 원하는 애벌레들이 도처에 넘쳐나지만 깝깝한 껍질을 벗겨낼 수 있는 자는 흔치 않지요. 그렇게 벗겨내려 안간힘을 쓰다 싸늘하게 멈춰갈 뿐입니다. 이게 부정적인가요? 누구를 위한 말인지 모르겠군요.. 어찌되었건 새로움이란 없어요. 지극히 생각해보았자 관념이니까요. 현실과는 달라요.. 한참의 괴리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나와 악마는 웃으면서 걷고 얘기하고 있었다. 악마는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진 가면처럼 웃는 상이었으나 지극히 기묘하게 슬퍼보였다. 고양이처럼도 보였고 괴물처럼도 보였고 이 세상에 없는 얼굴처럼도 보였다. 그의 중얼거림 속에 지옥의 일렁임이 있었고 분노와 증오와 시련과 비련과 미련이 묻어났다. 끝없는 고독의 탐구 속에서 피어난 허무한 종말의 결론과 우스운 우리의 얘기는 밤하늘의 별 수만큼이나 허황되고 우습다.
"거만해진 느낌이군요.. 이 어처구니 없는 세상에 살다보니 말이에요.. 자각한다는 건 우월하다는 느낌도 주지만, 환상에 빠져있다는 고독한 느낌도 주지요. 결코 현실은 누구도 정확히 판가름할 수 없는 개념 아닙니까? 다 주관적이니까요.
우리의 눈이란..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는 지극히 병적으로 주관적이고 이 문화, 이 시류를 벗어날 길 없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J. 당신은 왜 이 세상이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악마가 나를 보았다. 그의 쏘아보는 눈에 나는 기묘한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같은 아찔함을 맛보며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것처럼 느꼈다. 마치 머리가 땅바닥에 툭 떨어지듯이.. 툭 툭 툭...
떨어진다.. 아래로.. 굴린다.. 굴러떨어진다..
무거워진다.. 점점.. 침체되고 물 속으로 가라앉아
무겁고 답답하고.. 그 모든 비현실적인 느낌이 싫고
어처구니없고.. 답답하고.. 또 막막하고
누구는 가고, 누구는 오고 모든 인연과 헤어짐이
.. 이제는 우습고 이제는 기가 막히고 이제는 알았다.
이 모든게 극히 순간적이고 극히 찰나적이고
이 망할 지랄맞은 철학이 어린시절 코흘리개일적엔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더니만, 이젠 무시 못할 악귀가 되어 달려든다.
"어처구니없다는건... 이해되지 않는다는 거죠. 보세요. 내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보이시고... 들으시는군요..
우리 둘레 밖 저 짐작도 안되는 크기의 무지막지한 우주 속에 우리 같은 존재가 또 있을런지 그딴건 몰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유구한 역사가 어쩌고저쩌고 무엇이든... 그것이 지금에 와서야 나를 만들었고.
내가 존재하고,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걸 만들어내었고..
또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우리의 진화는 어디로 내닫을지.
쓸데없는 마음인지 몰라도 결국 그런 생각을 하는게 우리 인간 아니에요? "
"복잡하게 생각하시는군"
악마는 표정의 변화없이 묵묵히 말한다. 그의 말.
그의 쇳소리. 그의 허파에 바람이 빠지는 것같은 냉랭한 말..
그의 말. 그의 저주. 그의 한. 그의 경멸. 그의 비웃음.
어리석은 어린애를 비웃는 재수 없는 어른같이.
불쌍하게 여기는 걸까?
"당신과 얘기하다보니 내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지.. 뭘 말하고자 했는지.. 그것이 모두 엉기고 섞이고 꼬여버리고..
결국 내 마음에 남은건 본류가 아닌 지극히 혼탕뿐.
그래서 나는 한심해지고, 당신은 또 나를 비웃겠군요. 하하하..
이것이 어처구니없단 말입니다. 누구를 위한 거죠?
"
"하하하"
악마는 웃었다.
"하하하 왜 나에게 묻는 겁니까?"
악마는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곤 검지 손가락 한개를 든다.
이리저리 내 앞에 흔들리는 손가락
"나쁠건 없지요. 좋을것도 없지요.
유쾌하면? 좋을지도 모릅니다. 유쾌해지려면? 노력해야죠.
노력하자면 감내해야죠. 인내하고 참아야죠.
고통은? 즐거움의 씨앗이 되나요?
즐거움은? 고통의 씨앗이 되나요."
"결국, 당신이 말하자는건 유쾌하면 즐겁다..? 이겁니까? 노력하라구요? 열심히 살라구요?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위해?"
"오직."
악마의 무표정한 얼굴이 약간 뒤틀린것처럼 보였다. 나의 환각일까.
그는 어쩌면.. 미소 짓고 있을런지도
"오직."
"당신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