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친 열차는 아름답다’
30여 년 전에 펴낸 국어학자 서정범 님의 수필집 제목입니다. ‘어원의 이모저모’ 라는 부제가 붙은 이 수필집에는 참 좋은 글들이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 ‘김치’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의 앞머리에는 사랑이라는 우리말에 대한 님의 풀이가 있습니다. 조금 길긴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그대로 옮겨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15세기에는 ‘생각하다’와 ‘사랑하다’의 두 가지 뜻으로 씌었는데, 지금은 사랑을 뜻하는 말로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한자어인 생각사(思)자와 부피 량(量) 즉, 사량(思量)이 변한 말인 것이다.
어원에서 보면 상대방에 대한 생각의 부피가 사랑의 척도가 되었다고 하겠다. 상대방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느냐의 양(量)이 곧 사랑이었던 것이다. 상대방을 생각하는 양이 많을수록 사랑이 깉은 것이고, 양이 적을수록 사랑이 얕다고 할 것이다.
‘사랑하다’ 를 뜻하는 순 우리말로는 ‘너기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너기다’에서 ‘녀기다’로 변하고 다시 ‘여기다’로 변하였다. 평안도에서는 지금도 ‘사랑하다’를 ‘너기다’ 로 쓰고 있다.
한편 ‘괴다’ 라는 말도 ‘사랑하다’ 의 뜻으로 씌었는데, 사랑은 상대방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이라 하겠다. 즉 마음이 상대방에게 괴는 것이라 하겠다. 마음이 상대방에게 괴일 때 그것이 곧 사랑인 것이다.
한편 닷다(ㄷ`ㅅ 다 – 아래아가 안써지네요-.-;)라는 말도 ‘사랑하다’의 뜻으로 씌었는데, ‘따스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라 여겨진다. 사랑이란 따스한 것이지 밍밍하거나 찬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마음이 차고서야 사랑의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을 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이렇게 옛 사람들은 사랑을 정신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상대방에 대하여 생각하는 부피와 그리고 마음이 물이 흐르듯 상대방에게 괴는 것으로 보았다. 요즘은 ‘용광로와 같은 사랑’ ‘뜨거운 키스’ ‘열애’(熱愛)와 같은 말들이 쓰이고 있으나 ‘닷다’의 어원에서 보면 찬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뜨거운 것도 아닌 따스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정서 표현의 대가들
허나 사랑은 뿌리부터 우리말입니다. 사량(思量)이라는 한자어에서 온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 말이 한자어에 밀려 사라졌다고 하지만, 삶의 바탕이라 할 수 있는 감정 표현마저 한자어로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사랑이란 말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20여년 전에 많이 읽혔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중남미 원주민들의 정서를 그린 것인데, 이 소설에서 그들은 자연과 이야기 나누기를 즐깁니다. 새들이나 짐승이나 물고기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바람이나 구름이나 나무나 꽃들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벗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소설에 지나지 않지만, 거기에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정신적 넓이가 있습니다. 사랑을 비록한 우리 옛 사람들의 정서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백 번을 양보해서 그들을 단순하다 여길지라도 그들의 정서마저 오늘날보다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늘 자연과 이야기 나누기를 즐기던 옛 사람들이야말로 정서 표현의 대가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봄날의 꽃처럼
우리말과 뿌리를 함께 나눈 만주어에서 사랑의 뜻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사라’라는 말에 명사형 받침 ‘ㅇ’이 붙은 것인데, ‘사라’는 활짝 피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또 바짝 풀기가 들어 있는 것도 ‘사라’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부풀어오르는 것도 ‘사라’라고 합니다.
만주어에서 아내를 가리키는 ‘살간’을 ‘사랑’과 연관짓는 분들도 있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펼치다’는 뜻의 ‘사람비’나 ‘바짝 풀기가 있다’는 뜻의 ‘사라흔’ 등이 우리말 사랑과 말 뿌리를 함께 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어소의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사’는 ‘밝음’과 ‘순환’을 뜻하는 말이고, ‘라’는 태양을 가리키는 말이며, ‘ㅇ’은 명사형입니다. 즉 사랑은 ‘태양처럼 밝은 것’ 입니다. 환하게 펼쳐진 햇무리를 떠올리면 알맞을 것 같습니다.
사랑은 그처럼 태양이 피워내는 꽃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갖춘 밝은 태양’이라면, 사람의 사랑은 사람이 피워내는 생명의 꽃이라 하겠습니다. 원래 사람과 사랑은 뿌리가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말 사랑은 사람의 바탕을 한마디로 밝힌 말이라 하겠습니다.
고임은 더 보탤 수 없는 사랑
허나 사랑은 완전한 펼침, 온전한 아름다움(알움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다워지려는 기본적인 표적일 따름입니다. 생명을 갖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생명체에게 주어진 놀라운 기적의 출발점일 따름입니다. 사랑에서 머무는 한, 사람은 아직도 한 마리 고독한 짐승일 따름입니다.
사랑은 모든 꽃들이 그러하듯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합니다. 사랑이 완전해지면 마침내 지지 않는 꽃이 핍니다. 그것을 일러 ‘고임’이라 합니다. ‘고’가 ‘한임’이나 ‘신’ 을 뜻하는 말이고, ‘이’가 ‘삶’을 뜻하며, ‘ㅁ’이 명사형이므로, ‘고임’은 ‘삶을 한임답게 하는 것’ 이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모자람 없는 사랑, 어떤 조건도 따르지 않는 드넓은 사랑, 모든 것을 녹여내는 위대한 사랑이 바로 ‘고임’ 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랑’에서 일어나 ‘고임’을 이룸으로써 마침내 두터운 짐승의 탈을 벗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생명체에게 주어진 놀라운 기적의 참뜻일 것입니다.
그리움과 다스림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하는 ‘그리움’의 참뜻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한임에 대한 그리움’이 곧 우리들의 참된 그리움인 것입니다. 더구나 참된 그리움이라면 ‘내 밖의 한임에 대한 그리움’ 이 아니라 ‘내 안의 한임에 대한 그리움’ 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주를 헤아리는 애닳는 마음이요, 우주를 모두 담을 수 있는 넉넉함입니다. ‘너김’(여김)이란 바로 그처럼 넉넉한 마음이요, 스스로를 한임으로 헤아리는 슬기를 가리킬 것입니다. 오늘날의 정서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이런 마음이 참으로 옛 사람들의 사랑임을 말씀드리려고 굳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라는 낡은 책을 끄집어냈던 것입니다.
이제 사랑이라는 기적의 마음씨를 가진 모든 생명체는 이제 그 마음씨를 바탕으로 서로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다스림’ 입니다.
물론 ‘다스림’ 은 ‘닦음’ 과도 같은 말입니다. ‘닷다’ 라는 동사형에서 ‘닷’은 땅으로부터 얻은 생기를 가리키니, 땅으로부터 몸을 얻은 이 어찌 닦음과 다스림의 참 뜻을 저버릴 것입니까?
뭇 생명은 ‘빛’ 과 ‘닷’ 의 하나됨이니, 한임으로부터 주어진 사랑이 빛(비춤)이라면 땅으로부터 얻은 그 따스함은 곧 닷(다시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사랑인 고임은 그것이 참으로 하나되어 하늘과 땅이 내 안에서 하나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참으로 사람되기가 쉽지 않다 하겠습니다.
[출처 : 모울도뷔 제6호 개천 4334년 2월 ;
미래로 가는 겨레 옛말 ;; 박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