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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정현수 |2007.09.30 00:04
조회 24 |추천 0

‘어느 날 세상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눈이 멀게 된다면?’

 

이 책은 이런 상상의 상황을 설정하며 시작한다. 정부는 처음으로 눈이 먼 사람부터 시작해 그와 접촉한 사람들이 하나둘 눈이 멀게 되자, 이 상황을 전염병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격리. 수용. 여기까지는 지극히 평범하다. 멀게는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의 광풍과, 가깝게는 우리 땅에서 벌어졌던 숱한 전염병과의 사투를 기억하면 되니.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이 상황이 전염병이 아니라면? 복잡해진다. 이 책이 복잡하게 여겨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더욱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설정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되지만, 단 한 명의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 극중에서 안과 의사의 부인으로 나오는 인물. 그녀는 눈이 멀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구원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 전염병이 그렇게 인지되었듯, 그녀만은 ‘죄악'을 저지르지 않아 이런 어처구니 상황에 놓이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기에.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그녀다. 그녀는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눈이 멀기 시작하면서 온갖 군상들이 등장한다. 처음 눈이 먼 사람들이 격리된 곳에서 벌어지는 조악한 권력 다툼,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식욕과 배변욕, 성욕까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더럽고 추잡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본능적 인간. 이 책이 말하고 싶어했던. 하지만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의사의 아내다.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가려는 그녀의 애틋한 노력도, 작가가 그녀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선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1%의 가능성도,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녀가 이 모든 상황을 보고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봤던 대니 보일 감독의 도 그랬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이 바이러스는 사람에게서 이성을 빼앗는 바이러스다. 사람들은 미쳐가고 서로를 해치기 시작한다. 이런 아수라장에서도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감염된 ‘미치광이 좀비’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린아이도, 이웃도 여지없이 죽인다. 좀비들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도 좀비가 되는 상황이니. 그리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감염되지 않은 군인들을 찾아 나선다. 안전을 위해. 하지만 이성을 잃은 좀비보다 더 무서운 건 이성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간과했다. 불행의 여행길이었던 셈이다.

 

한 문단 한 문단, 한 장면 한 장면이 달갑지 않게 다가온 책과 영화였다. 그만큼 많은 생각을 던져주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태초의 의문들. 그나마 이런 상황을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우리가 ‘인간다울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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