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고양이의 씨가 있고,
호랑이는 호랑이 씨가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고양인 줄 알았는데 호랑이가 되어 있는 이범수를 보고 흠칫 놀란다.
15년 전 무명의 단역 배우에서 출발해
주연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배우 이범수는
그동안 아무리 작은 걸음이라도 앞으로만 내디뎠다.
그의 사전엔 일보 후퇴 이보 전진조차 없었다.
오봉구, 공병철, 철수, 돌석, 병국, 팔봉, 광태, 삼식, 종구 등등은
이범수가 맡았던 배역 이름들이다.
‘선글라스 깡패’같이 변변한 이름조차 없는 배역들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름은 있지만 그 이름부터가 하수상한 이범수의 캐릭터들은
험난했던 이범수의 연기 인생을 조금은 대변해 주는 듯하다.
죽도록 고생하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다는 '인간 승리' 드라마가
비록 이범수의 것만은 아닐지라도 그는 종구로 출발해
병국, 돌석, 봉구 등을 이지러지도록 즈려 밟으면서 배우가 됐다.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지는 스타덤의 세계에서
이범수는 혼자 뚜벅뚜벅 걸으면서 튼튼하게 자라왔다.
문제는 그를 대놓고 칭찬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AB형의 이 예민한 배우는 지난해 그것 때문에 참 외로웠다.
<오! 브라더스>의 오봉구는 멜빵 바지를 입고 바나나 우유를 쭉쭉 빨기만 하면
간편하게 조로증 소년으로 변신하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었다.
눈 딱 감고 망가지면 그만인 역할이 아니라,웬만큼 잘 망가지지 않으면
“미친 놈 지랄하네”라는 말을 듣기 딱 좋은 역이었다.
이범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김용화 감독이 “봉구는 당신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며
이범수에게 매달렸을 때, 이범수는
“지금 당신 말, 참 달콤하고 듣기는 좋은데
봉구는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평가받기 어려운 캐릭터다.
연기자로서 앞으로 전개될 상황이 눈에 보인다”
고 대꾸했다. 불행히도 그의 예측이 빗나가질 않았다.
<오! 브라더스>을 통해 거듭 입증된
이범수의 흥행력과는 별개로 그의 연기는 충분히 칭찬받지 못했다.
개봉 당시에는 다들 같이 웃어주고 울어줬지만
연말 영화상 시상식 시즌이 되자 그를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이범수는 자존심이 상했다.
“산 낙지건 쥐건 그걸 뜯어먹어야 연기력이라면
열 마리건 백 마리건 먹어줄 수 있다.
정말 눈물 뚝뚝 흘리면서 먹어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여차하면 <모여라 꿈동산>이나 <뽀뽀뽀>가 되는 오봉구를
완전히 발가벗고 연기했는데도 평론가들은 참 몰라주더라.
청룡영화상이나 대한민국영화대상을
인정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섯 명의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못 오른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내가 상을 타야 한다는 게 아니라
왜 밝은 연기는 어두운 연기보다 평가 절하돼야 하는가 말이다.”
친근함과 만만함 사이 어딘가
요즘 인터뷰를 할 때마다 이범수는 연기력을 저울질하는 평단의 기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지만 사실 관객들도 어느 정도는 그를 만만히 본다.
지난 9월 <안녕! 유에프오>의 구파발 촬영현장.
이 영화에서 이범수는 괴짜 시내버스 기사 상현으로 출연한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진 초가을 밤이었지만 잠이 없는 동네 꼬마들은
영화 찍는 모습을 보겠다고 촬영장 주위를 에워쌌다.
뉴스가 끝나고 드라마가 할 시간인데도
아줌마와 할머니들까지 촬영장에 가세했다.
이범수가 거기에 있자 ‘구경 모드’는 곧 ‘사인 모드’로 돌변했다.
하지만 딱히 사인 종이를 준비해오지 않은 꼬마들은
집에 들어가 종이를 가져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인다.
엄마로 보이는 한 아줌마가 스탭들의 간식을 차려놓은 테이블로 가서
초코파이 박스를 떡하니 비운다.
그리고 손으로 상자를 북북 찢더니 16절 크기로 잘라낸다.
“가서 여기다 사인해 달라고 해.”
누런 상자 뒷면, 정말 사인하고 싶지 않은 종이다.
철 모르는 아이는 그 종이를 들고 이범수의 빈틈을 기다렸지만
연기에 몰두해 있는 이범수는 이런 상황조차 모르고 있었다.
반복되는 리테이크를 기다리지 못한 한 아줌마가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면서 혼잣말로 투덜거린다.
“언제 적부터 스타라고 되게 비싸게 구네.”
배우 이범수의 이미지는 다분히 서민적이다.
그는 친근하고 편안하고 명랑하고 선량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수룩하고 만만해 보인다.
실제 이범수와 잠깐이라도 얘기를 나눠본 사람이라면
이범수가 얼마나 독하고 야무지고 깍듯한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지만
대중적으로 소구되는 그의 이미지는 자연인 이범수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만만함이 묻어 있다.
여기에 더해 어려운 일도 웃음으로 이겨내는 오뚝이 같은 이미지가 있다.
대중들은 묵직한 청동상 같은 배우에게는 꿈도 못 꾸었던 장난기를
오뚝이에게는 발동시킨다.
한번 툭 쳐보는 것이다. 일어나나 못 일어나나.
착하게 보여야 할 역을 최선을 다해 착하게 연기했고,
웃겨야 될 역을 최선을 다해 웃겼기에
돌아오는 결과치고는 참 섭섭한 일이다.
신작 <안녕! 유에프오>의 상현도 착하고 웃긴
이범수의 기존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구파발이 종점인 심야 버스를 모는 박상현(이범수)은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 본 노총각.
외모도 볼품없고, 가진 것도 없고, 말주변도 변변치 않을 뿐더러
한물간 붉은 악마 티셔츠를 걸치고 다닐 만큼 촌스럽고
10년이나 어린 동생 상규(봉태규)에게
온갖 구박을 받고 살 만큼 어수룩한 사나이다.
그러던 어느 날 UFO가 나타난다는 동네 구파발로 이사를 온
‘눈먼 여자’최경우(이은주)에게 반해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를 상대로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지금의 자신보다는 좀 더 볼품 있는 사람인 것처럼.
박상현이라는 본명 대신 박평구라는 가명으로 이중 생활을 하는 상현은
눈먼 여자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지만
그녀에게 희망을 찾아 주려 노력한다.
데뷔 이래 15년 만에 처음 선보이는 본격 멜로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범수는 로맨틱하기보다는 정감 넘치는 연기로
모자라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변두리 소시민들의 아껴둔 사랑을 연기한다.
바나나 우유와 산 낙지 사이 어딘가
“<안녕! 유에프오>는 따뜻한 영화다.
이 정도 표현으로는 참 양에 안 차는데
정말 순수하고 밝고 재미있는 영화다.
남녀가 나와 찧고 까부는 다른 로맨틱 코미디와는 달리
이범수가 이런 영화로 건강한 웃음을 줄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다”
며 그가 신작에 대한 포부를 밝힌다.
밝고 가벼운 연기가 어둡고 진지한 연기보다
평가 절하되고 있다고 분개하면서도
이범수는 지금의 이미지가 거둬들일 수 있는 인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범수가 차기작으로 선택한 영화는 <슈퍼스타 감사용>.
프로야구 원년 꼴찌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패전 처리 전문 투수 감사용의 이야기다.
역시나 그에게는 센 역보다는 수수하고 따뜻한 역할이 어울린다.
괜한 연기 변신이란 어리석은 결과를 낳을 뿐이다.
하지만 이범수의 생각은 다르다.
“내가 <태양은 없다>에서 이정재를 괴롭히던
야비한 깡패 병국이로 떴을 때만 해도 들어오는 역은 죄다 센 역이었다.
그땐 아무도 내가 소시민을 소화할 거라고 예견하지 못했다.
그때 ‘이범수는 휴먼 드라마, 멜로 이런 거 안 어울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난 참 귀여웠다. 나는 내가 할 줄 알고 있었으니까.”
이런 말을 하는 이범수도 참 귀엽다.
하지만 그 자신에 대한 굳센 믿음을 듣고 있노라면
한편으로는 섬뜩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적어도 연기에 대해서 말하는 자리에서 만큼은,
이범수는 겸손을 연기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1, 2년 후에는 반드시, 의도해서라도 힘 있는 남자 영화를 할 것이다.
남성 드라마, 난 우리나라에서 누구보다도 잘해 낼 자신 있다. 지금
'감독님, 시나리오 쓰실 때 저 산낙지 뜯어 먹는 장면 하나 넣어 주세요'
안 해도 나중에 다 보게 될 것이다.
난 남들보다 더디 여기까지 왔지만 생략 없이 충실하게 변신해 왔다.
두고 봐라.”
고양이는 고양이의 씨가 있고,
호랑이는 호랑이 씨가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고양인 줄 알았는데 호랑이가 되어 있는 이범수를 보고 흠칫 놀란다.
이범수는 그렇게 놀라는 사람들을 내심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용이 될 계획을 짜고 있다.
무명의 단역 배우에서 출발해 입지적인 주연 배우가 된 이범수는
남들은 막연하게 말하는 ‘노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15년 동안 실감했기 때문이다.
대기와 만성 사이 어딘가
이범수같은 대기만성 배우의 성공 시대를 보는 것은 참으로 뿌듯하다.
수년 전부터 ‘조연 시대’라는 거창한 팡파레가 울려 퍼졌지만
자리는 남아 있으되, 배우는 무수히 갈려 나갔다.
그 가운데 이범수는 돌석, 병국, 팔봉, 광태, 삼식같이 누가 해도
상관없었을 캐릭터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자기 몫을 찾아냈다.
아무리 작은 분량이라도 이범수가 연기한 그 신, 그 컷에서만큼은
그저 자리만 채우는 단역이나 주연을 보조하는 조연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튀었고 결코 모자람 없이 배역의 속살을 채워 나갔다.
<몽정기>의 공병철, <오! 브라더스>의 오봉구를 거쳐
관객들이 만나게 될 <안녕! 유에프오>의 박상현은
배우 이범수의 몸에 맞춰 지어진 배역들이다.
기성복을 입고도 스타일을 뽐냈던 이범수이니
맞춤복을 입고서 훨훨 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데뷔 이래 단 한번도 뒤로 물러선 적이 없는 이범수가
지금 정상에서 얼마나 멀리, 혹은 가까이 왔는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는 아직 멀었다고 호언장담하지만
관객이란 쉽게 싫증 내고 인내심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그도 그걸 안다.
그 부담 속에서 숨을 데를 마련해 두지 않고
연기하는 것을 이범수는 즐기고 있다.
하루살이같은 단역 시절부터 그는 그렇게 영화를 찍어왔다.
사진 김선태 기자
스타일리스트 이다연
헤어, 메이크업 김청경 헤어페이스
의상 마씨모레베끼, 빈폴 옴므, 랄프 로렌 블랙라벨, 장광효 카루소
액세서리 캘빈 클라인, 케네스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