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irst] 아쉬울 것 없이 무딘 사랑인 척 미련 없이 보내놓고 남은 사랑만큼의 고통들도 웃음 뒤에 숨겨 놓았어. 늦은 시간이라 손님이라고는 그와 그녀 둘 뿐이었다. 어느 식당에서나 있을 법한 평범한 사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앉아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냥 가버리지 그래? 다시는 나 볼 생각도 안 했으면 좋겠어.” “그래. 알았다. 잘 지내라.” 그는 내뱉듯이 대꾸하고서 자신의 가죽가방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뚜벅뚜벅. 출입문까지 걸어 나가는 그의 구두 소리가 식당 안을 가득 채우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려 그를 돌아보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딸랑. 출입문이 열렸다 닫히며 방울소리가 짧게 울렸다. “후우-” 저도 모르게 한숨이 몰려나왔다. 그러나 그뿐일 뿐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젓가락을 들고 아직 김이 피어오르는 우동을 한 가닥 집어 올렸다. 몇 가락이 목 안으로 넘어가며 후루룩 소리가 나자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맛없어.” 대상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후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자주 오던 식당이라 무엇 하나 새로울 것 없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라마나 영화, 하다못해 음악을 들어도 이별은 예쁜 커피숍이나 나름대로 멋있는 야외에서 하던데 자신은 이별마저 이런 작은 식당에서, 향긋한 커피가 아닌 김 모락모락 나는 우동을 앞에 놓고 하는 구나 싶어 실소가 나왔다. 차라리 쏟아지는 빗속에서 헤어지는 게 나름대로 낭만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동집보다는 말이다. 드라마 속의 여자 주인공처럼 무엇을 해도 로맨틱하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사소한 것에 감동받고 가슴 두근거리는 연애를 하고 싶다는 것이 그리 큰 욕심이었을까. 4년의 연애…… 그래, 어쩌면 무뎌지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당연한 듯이 만나고, 당연한 듯이 뭔가를 요구하고…… 두근거림, 설렘이란 것은 이미 오래 전에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다투기도 참 많이 다퉜다. 1년이면 열댓 번도 더 싸우면서 지금까지 만나온 게 용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뭣 때문에 매번 그렇게 싸웠던 걸까. 기억나는 게 몇 안 되는 걸 보면 대부분은 그저 사소한 것들이었나 보다. 사실 지금도 왜 싸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방금 전의 일인데도 말이다. 이제는 ‘왜’ 싸웠는가 보다 그저 서로에게 너무 지쳐있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냥 다 그만두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 뿐이었다. “아줌마, 여기 너무 건조한 것 같아요.” 렌즈가 조이는지 눈이 따끔거리자 그녀는 계산을 하며 괜히 싫은 소리를 한마디 하고 나왔다. 늦가을. 아직은 선선한 밤바람이 갑자기 살을 파고드는 듯 차게 느껴졌다. “춥네.”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린 후 옷깃을 여미고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Second] 이별해서 네게 자유로워진 척 이리저리 바빠지고 잊기 힘들어서 아픈 추억들은 농담처럼 늘어놓았지 중간고사 직전이라 하나, 둘 리포트가 밀리다보니 위험수위에까지 이르렀다. “으아- 미치겠다. 언제 다 하냐.” “하나씩 하면 되지 뭐. 졸업을 코앞에 두고도 리포트가 6개인 나도 있는데 뭘 그러냐?” 그녀는 투덜거리는 친구를 쥐어박듯이 말하며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놨지만 표정은 그런 친구의 투덜거림이 귀여운지 웃고 있었다. “어제 오빠 만난다더니 만났어? 아무래도 오빠 취업한 이후로는 자주 못 보지?” “응, 만났어. 그리고 헤어졌고.” “뭐?” 담담하게 던진 그녀의 말은 친구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정말이냐는 눈으로 친구가 바라보자 그녀 역시 말 대신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관둬라. 그러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만날 거면서. 내가 너희 헤어진단 소리에 한 두 번 속냐? 안 믿어.” “이번엔 진짜야. 마음이 떴다는 느낌 있잖아. 그런 거 들어.” 그녀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책상 위에 펴 놓으며 톤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친구는 잠시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봤다. “뭘 그렇게 봐?” “괜찮냐?” 진지한 친구의 질문에 그녀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응. 나도 놀라고 있는 중이야. 너무 오래 만나서 미련 남을 것도 없었나봐.” “흐음-” 친구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뭔가 더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1학년 때, 정말 안 맞는구나 싶었을 때 말이야. 그 때 헤어질 걸 그랬나봐. 생각하면 좀 억울해. 입학하자마자 잡혀서 소개팅, 미팅 한 번 못해 봤잖아.” “이참에 정말 그냥 정리해라.” “응, 그럴 거야.”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힘이 없었다. “나 영화 보여줘요.” “야! 남자친구랑 봐. 애인도 있는 게. 나 소개팅이나 시켜줘.” 영화를 보여 달란 말에 수화기 반대편에서는 대뜸 구박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돌아온다. “헤어졌잖아요. 정말 안 보여줄 거예요? 치사해.” “……” 그녀의 대답에 대한 상대편의 짧은 침묵은 거의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 보여주고 있는 반응이었다. 일말의 오차도 없는 한결같은 반응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고쳐들었다. “……진짜냐?” “영화, 안 보여줄 거예요?” “알았다. 7시 이후에 강남으로 와서 전화해.” 핸드폰을 접으며 그녀는 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평소에 늘 여자친구를 소개시켜 달라고 조르며 애인이 있었던 그녀를 구박하기만 했지만, 역시 부탁은 거절 못하는 ‘좋은 사람’이다. 온라인 게임을 통해 만난 사람이었지만, 헤어진 그와도 함께 몇 번 만나 식사를 하기도 하면서 어설프게 얼굴만 아는 과선배들보다 훨씬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됐다. 알고 지낸지 벌써 2년 째였고, 그녀 또래의 여동생이 있어서인지 ‘선배’라기 보다는 ‘오빠’같은 느낌이었다. “도대체 왜 또 싸운 거야? 언제 싸웠냐?” “연락 안 한지 한달 돼 가요. 싸운 거 아니에요. 어쩌면 늘 그랬듯이 소리치고 싸웠더라면 헤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르죠. 정말 헤어졌다니까요. 와아-! 맛있겠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그녀의 입에서 짧게 탄성을 터져 나왔다. 영화표를 예매해 두고 저녁을 먹기 위해 American Sushi Roll을 전문으로 하는 퓨전 음식점에 앉아 있었다. “헤어진다는 게 그렇게 말처럼 쉽냐? 하루, 이틀 만난 것도 아닌데.” “잘 먹겠습니다-. 계속 만나는 게 더 힘드니까 헤어지는 거죠. 괜찮아요.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고, 그러고 보면 각자 마음의 준비도 해 왔던 것 같아요. 이거 진짜 맛있다. 캐나다 있을 때 먹던 거랑 비슷하네요. 비싼 값을 하네.” 종알종알 떠들면서도 롤 하나를 집어먹은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선배는 그녀가 헤헤거리며 웃는 걸 쳐다보다가 혀를 내찼다. “좋냐?” “오빠도 드세요. 진짜 맛있어요. 나, 내가 생각해도 참 단순해요. 먹을 게 눈 앞에 있으면 행복해 지거든요.” “많이 먹어라, 그래.” “헤에- Sushi요, 어학 연수할 때 진짜 많이 먹었어요. 종종 사다 먹었거든요. 롤 6개 들어서 2달러 50센트 정도였으니까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하면 2천 원 정도인가요?” “3천 원이 아니라?” “캐나다 달라잖아요. Tax 붙어도 2,500원 정도겠네요.” “우리나라 김밥이네.” “맞아요. 도시락으로도 자주 싸 갔었어요. 밥하기 싫은 날 있죠? 그런 날, 전 수시를 먹고 오빠는 치킨 데리야끼 사 먹고 그랬어요.” “아, 너 형이랑 어학연수 같이 갔다 왔었지……” 조금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지 선배의 말끝이 흐려졌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같이 살 때도 참 냉정했어요. 제 생일선물이라고 Canadian 록키산맥 여행권 끊어놨었는데, 거기서 같이 간 오빠들이 절 호수에 빠뜨렸었거든요. 그 전부터 감기 기운이 좀 있었는데 그게 도화선이 되서 열이 확 올랐었어요. 그날 저녁에는 열이 심해서 꼼짝도 못하고 혼자 차안에 누워있었는데, 글쎄 그런 절 혼자 두고 친구들하고 관광할 거 다 하고 오더라고요. 그것도 나중에 사진 뽑아보니까 다른 언니들 어깨에 손 올리고 웃으면서 정말 즐겁게 놀다왔던데요. 남은 아파 죽겠을 때 말이죠. 그때 처음으로 외국땅에서 서럽다는 생각해 봤다니까요.” “맺힌 게 많구나.” “별로요. 그 당시에는 그냥 그려러니 하고 넘겼거든요. 제 성격이 그렇잖아요. 일일이 그런 거 신경 쓰고, 질투하고 하는 거 못해요. 그보다 좋았던 일들이 더 많았으니까 계속 만났겠죠.” 쉴 새 없이 종알거리면서도 음식을 먹는 게 신기했는지, 아니면 헤어졌다고 말하면서도 지나치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녀가 불안했던지 선배는 천천히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반년 전 오래 사귄 연인과 헤어져봤기에 이별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시기라면 오히려 힘들고 아프다고 어리광을 부리는 게 정상이었다. “오빤 여자친구 생기면 정말 잘 할 것 같아요. 맛있는 식당도 많이 알고.” “맛있는 거만 사주면 좋은 남자친구냐? 그저 내가 먹고 싶으니까 알아두는 것뿐이야.” 사소한 그녀의 말에도 대답해 주는 걸 잊지 않으면서 그는 어쩐지 그녀가 웃는 게 위태로워 보여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Repeat] 그깟 한 사랑 따위 떠난 건 나 사는 동안 가끔 걸리는 한낮 열병일 뿐 함께 했던 날들도 곧 흉터 하나 없이 아무는 가벼운 상처자국이지만 지친 내 하루의 끝에 거울이 비춘 깊이 패인 상처에 난 눈물만 덩그러니 너무 그리워서 몰래 한 번 그 이름 부른 뒤 다시 가리는 얼굴 밤 12시가 넘어 간신히 마을버스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가능한 소리가 나지 않게 현관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가니 역시나 식구들은 모두 잠들었는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손으로 벽을 더듬어 자신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불을 켜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일어나서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켜자 위잉 하고 컴퓨터 본체가 돌아가는 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어째 연애할 때보다 더 얼굴 보기가 힘드냐?” “엄마야-! 깜짝 놀랐네. 깼어?” 그녀의 방문에 비스듬히 기대선 엄마를 보고 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괜찮냐?” 윈엠프를 실행시켜 음악을 고르고 있는 그녀를 지켜보다 물어온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지 않았으나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뭐가?’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생글거리며 미소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연락 없어?” “누구? 오빠? 응, 없어. 안 하기로 했다니까.” “걔도 참 독하다. 하루, 이틀 만난 것도 아니고 4년씩이나 만났으면서 어쩜 그렇게 한달이 넘도록 연락 한 번을 안 하니? 그래서 늘 내가 그 녀석 너무 냉정하다고,” “엄마, 거기까지만. 나도 연락 안 하고 사니까 마찬가지지 뭐.” “요즘 애들 다 그러니?” “글쎄……”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의사가 없음을 표시하기 위해 그녀는 등을 돌리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직은…… 그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가슴 한 편을 싸하게 만들었다. 한참 여물어 터지기 직전의 여드름처럼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은 채 잊고 살다가도 손으로 꾸욱 누르면 통증이 밀려와 기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후- 씻고 자라.” 엄마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그녀는 책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쁜 애니메이션 케릭터를 깔아놓은 윈도우 바탕화면은 그녀가 사용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모니터가 아닌 맞은 편 화장대 거울에 닿아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미소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놀랄 만큼 무표정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낯설다고, 그리고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라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고 싶어지자 그녀는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괜찮아. 벌써 한 달이나 지났잖아. 이대로 괜찮아질 거야.” 한 달…… 4년이란 연애기간을 잊기 위해 이제 겨우 한 달이란 시간을 소비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고 있는지, 잠시만 넋을 놓고 있으면 그녀의 하루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힘들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무덤덤한 자신이 너무 냉정한 건 아닌가 몸서리쳐질 정도였다. 딸랑.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컴퓨터를 켰을 때 자동으로 실행된 MSN 메신저에 접속자를 알리는 창이 올라와 있었다. 「[단풍] 아직은 할만하네... 님이 로그인했습니다.」 벌써 반년 째 바뀌지도 않는 저 대화명.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알림 창을 그녀는 마우스를 움직여 클릭 했다. 하얗게 빈 대화창을 바라보며 키보드에 손을 댔다 뗐다 반복하다가 그녀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나갔다. 〔웬일이야. 이런 시간에 접속하고.〕 〔아, 그냥 잠시 들어와 봤어.〕 “하아-” 저도 모르게 숨이 몰아져 나온다. 그냥 무시해 버리는 거 아닌가 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꾸가 돌아온다. 〔잘 지내?〕 채팅이란 건 말의 느낌이 참 다르다고 생각했다. ‘잘……지내……?’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색하고 어눌하게 나오는 말인데 또박또박 적혀 있는 채팅창의 글은 너무도 태연하게 보여서 화가 날 정도였다. 〔바쁘지 뭐. 잘 지내지?〕 〔응.〕 대답을 하고 나니 더 이상 쓸 말이 없어진다. 무슨 할 말이 남아있을까. 아니, 그녀의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들이 두서없이, 난잡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조차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 따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왜 목구멍이 뜨거워져 오는 걸까. 〔말 거는 거 부담스러우면 말해.〕 〔아니야, 괜찮아. 그냥 편하게 지내자.〕 편하게…… 그래, 나쁠 것도 없단 생각이 든다. 어차피 동아리 선배에, 과선배니 졸업했다고는 해도 어딘가에서 분명히 또 마주치게 될 테니까. 남은 미련 따위도 없으니 아무렇지 않게,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도 같단 생각이 든다. 〔그래? 그러면 한 가지만 약속해. 내가 전화하거나 만나자고 하면 피하지 않겠다고.〕 엔터를 쳐 놓고 그녀는 아차 싶었다. 미련이 남은 것처럼 보였다. 한심하단 생각에 창을 그대로 끄고 싶어졌다. 〔알았어.〕 한참 만에 돌아오는 대답.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결정을 한 후 대답한 것일까.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오고 갔을까. 그의 머릿속에서 떠다니고 있을 생각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래 만나오긴 했나보다. 아직은 그 누구도 그녀보다 그를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분명히 말이다. 〔오빠 사랑해.〕 다섯 글자가 이전에 받아둔 이모티콘 글자로 예쁘게 채팅창에 써 졌다. ‘오빠’ 두 글자는 하늘색으로, ‘사랑해’ 세 글자는 분홍색으로. 둥글둥글하고 입체감 있는 이모티콘 글자들이 떠오르는 걸 보며 그녀는 가슴이 철렁해졌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화면에서 눈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글씨 이쁘지? 이모티콘 받은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둘러댄다. 〔그러네. ㅎㅎ〕 그녀의 둘러댐에 그제야 그의 말이 돌아온다. 〔오빠 사랑해 오빠 사랑해〕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이 다섯 글자들을 몇 번 더 쳐 내려간다. 〔오늘따라 사랑해를 남발하네.〕 〔응. 글자가 예쁘잖아. ^^〕 습관적으로 자주 쓰는 웃는 얼굴을 찍어냈다. 〔오빠는… 이제 안 사랑하지?〕 결정타였다. 아무래도 오늘 뭔가 나사가 하나 풀린 듯한 기분이었다. 온몸에 기름을 붓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장난스럽게 ‘오빠 사랑해’를 쳐가며 웃는 얼굴을 그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손등 위로 뜨거운 액체가 투둑 떨어져 내렸다. 대답은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응.〕 〔그래.〕 이젠…… 사랑하지 않아.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미안해.〕 〔뭐가?〕 ‘사랑해서, 그래서 미안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들은 걷잡을 수 없어진 눈물들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무미건조하게 ‘그냥’이라는 두 단어를 쓰고 있었다. 〔ㅋㅋ 뭐가 미안해?〕 〔그냥……〕 〔오빠 이만 자야겠다. 내일도 일찍 출근해야해. 채팅 간만에 하니까 재미있네.〕 〔그렇구나.〕 재미있다고 말 할만한 상황이 있었던가. 그녀는 뭐가 재미있었을까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채팅창을 다시 마우스로 올려서 읽어봐도 웃음이 나올만한 대목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재미있었다’는 말은 집요하게 그녀의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단풍] 아직은 할만하네... 님은 로그오프 상태이므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습니다.」 채팅창, 그의 대화명 아래 노란 상자글을 바라보다 그녀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조금씩 어깨가 떨려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꼭 막아버렸다.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면 식구들이 깰지도 모르니까. “미안해. 사랑해서. 아직도…… 아직도 사랑해서, 그래서 미안해.” 아무렇지도 않게 버텨온 가슴속에 기둥 하나가, 잡고 있던 가느다란 실이 끊어지는 걸 느끼며 그녀의 입에서 같은 말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희뿌연 형광등 조명 아래, 컴퓨터 본체가 돌아가는 소리와 그녀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억누른 듯한 흐느낌과 함께 퍼져나갔다. 정전모드를 작동하지 않은 컴퓨터 모니터는 어느덧 팍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꺼진 후 까만 화면만이 남아버렸다. 까맣게 물에 젖은 화면 안에서는 조용히 울먹이는 듯한 노랫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널 보낼 수 없는 날 알면서 날 잊는다 떠난 너 이제 조금씩 허술해진 가면 흘러내려 흉한 날 보겠지 그때쯤엔 조금이라도 아물어져 있어서 널 보면 숨지 않기를 그때쯤엔 한 번 너의 눈 바라볼 수 있도록 날 알아봐줘 그때쯤엔 두 번 다신 그 누구에게라도 상처주진 말아줘.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