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라는 종족 역시 마찬가지여서 일정 기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변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쉽게 말해 계절을 탄다.
특히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지 않던가. 확실하게 가을 타는 남자들 이야기
그와 사귄 지 벌써 6년이 넘어가는군요.
가을이 되면 그는 심취할 무언가를 찾기 시작합니다. 얼마 전에는 신형 서브 노트북을 사야 한다고 몇 주간 고민을 하더니 결국 사더군요. 그리고는 노트북을 갖고 하는 짓이라고는 마우스로 고스톱을 치는 게 고작인가 싶을 정도로 그 게임에 빠지더군요.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을 게 뻔합니다. 어제는 또 디지털 카메라가 어쩌구저쩌구 하길래 싹 무시를 해버렸어요.
가을이면 나타나는 그의 증세는 대강 이렇습니다. 처음엔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낭비벽도 심해져 인간 자체가 가볍게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건 가을에만 나타나는 증상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가 이상한 물건을 사오거나, 들어보지도 못한 괴상한 동아리에 가입했다는 말을 들으면 아, 가을이 왔구나 싶을 정도랍니다.
- 신수정(29세·회사원)
눈썹을 심할 정도로 치켜올리기 시작하고, 자꾸 얼굴을 쓰다듬고, 귀를 만지작거립니다. 다리를 비비 꼬고, 어깨를 들썩거리는가 하면, 턱을 내밀었다 당겼다 하고 영양가 없는 말까지 많아집니다. 이 남자가 정말 지난 여름 해변가에서 늠름한 자태를 자랑하며 한껏 무게감을 실어주던 그 남자와 동일 인물이기는 한 것이란 말인가?
가을의 문턱에만 들어서면 수선스럽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워지는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바람피우는 남자’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한데 아무리 봐도 딴 짓 할 사람은 아니거든요. 친구들에게 그의 증세를 자세히 설명해줬더니 100% 바람피우고 저한테 미안하고 불안해서 그러는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는 심하게 가을을 타고 있는 게 아닐까요? 뭐라구요? 제가 너무 순진한 거라구요?
- - 최미애(22세·대학생)
제 남자 친구는 가을만 되면 치사해집니다.
봄은 여자가 타고, 가을은 남자가 탄다고 하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는 가을을 좀 심하게 타지요. 며칠 전의 일입니다. 제가 직장 동료랑 커피 전문점에 있는 걸 본 모양입니다. 저녁 때 전화를 해서는 그 사람이 누군지 묻더군요. 그냥 친하게 지내는 직장 동료일 뿐이라고 했더니, 아무 앞에서나 헤프게 웃고 다니지 말라고 하더군요. 벌컥 화가 나서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이틀 정도 전화를 하지 않았더니 그도 연락이 없더군요. 이런 경우 항상 그가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데 가을엔 아닙니다. 결국 제 회사 책상에 그가 배달한 상자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그 안에는 지금껏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이랑 제가 선물한 넥타이며 향수 등이 들어 있더군요. 일부러 회사로 보낸 것 같았어요. 하도 기가 막혀서 전화를 걸었더니, 받지도 않더군요. 가을만 되면 사사건건 꼬투리를 부여잡고 낑낑거리는, 바퀴벌레 한 쌍 같은 저희가 불쌍하지 않으세요?
- 강민지(27세·은행원)
저는 개인적으로 가을을 좋아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을에 다정해지는 제 남자 친구 때문에 가을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도 다정다감한 편입니다.
그러나 가을에는 좀 더 로맨틱해집니다. 자신이 너무나 아끼는 차의 열쇠를 초보 운전자인 저에게 꼬옥 쥐어주는가 하면(어떤 사람들은 미쳤다고도 합니다만), 접시에 자신의 음식을 덜어주는 것도 모자라 입에다 살며시 넣어주기도 한답니다. 드라이브를 가서는 제 머리를 소중한 듯 만져주고, 평소에는 유치하다고 거부하는 커플티도 먼저 입자고 떼를 씁니다. 닭살 돋는 문자 메시지를 수시로 날리고, 퇴근길에 제가 좋아하는 달콤한 치즈 케이크를 사줍니다. 꿈꾸듯 로맨틱한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감동의 연속이고, 저는 너무나 행복합니다. 비록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는 평범 모드로 돌아가지만 말입니다.
- 지선희(25세·조교)
“니가 싫다카믄, 안 한다.” “진짜가, 그럼 그라자.” “정말 미안타.” 평소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는 건 산술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가을만 되면 그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술술 나옵니다. 신기할 정도로 나긋나긋해지는 그를 대할 때면 애가 뭘 잘못 먹었나(사실 두 살 연하입니다) 싶을 정도로 걱정이 되고 불안합니다.
주말에 잠깐 가는 드라이브 코스나 음식 메뉴에서도 좀처럼 물러남이 없는 그의 며칠간의 변신은 가을의 문턱에서 이루어집니다. 연하인데다가 막내이기까지 해서 지는 것도 싫어하고, 양보할 줄도 모른답니다. 그래도 귀여운 맛(?)에 벌써 3년째 사귀고 있는데, 가을만 되면 고분고분해지면서 제 말도 잘 듣고, 어리광도 부리지 않습니다. 약간은 어른스러워진 것 같아 또 다른 매력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 역시 제 남자 친구의 평소 귀여운 모습이 좋습니다. 제가 달리 연하를 사귀겠습니까?
- 허진영(26세·회사원)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면서 긴 소매를 입기 시작하는 가을이 오면, 게으름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제 남자 친구는 여름엔 그래도 가끔 하던 샤워를 멈춥니다. 쌀쌀한데 물에 손조차 담그기 싫다는 게 그의 변명입니다.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샴푸나 비누 따위를 자꾸 몸에 대는 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짓일 뿐이다. 인간의 몸에는 때가 어느 정도 있어주는 것이 또한 자연의 이치다.’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한답니다.
처음 들을 때는 그럴듯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분위기 나는 레스토랑에서 다리며 등이며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의 이치고 뭐고 상관없이 그저 사는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만이라도 씻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점점 더러워지는 남자 친구는 저를 슬프게 합니다.
- 최지숙(24세·대학원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