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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이평화 |2007.11.15 21:54
조회 332 |추천 0

강은 우리 민족의 젖줄로 자리하면서 그 주변의 산하 도처에 각종의 문화유산들을 풍성히도 남겨 놓았다. 그래서 한민족의 운명과 더불어 흘러온 한강을 따라 걸어가노라면 민족사의 흥망성쇠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영명한 선조들이 한강변 산하를 따라 어지러이 찍어 놓은 수많은 발자취 속에서 우리 민족의 크나큰 자랑거리인 도자문화의 역사적 실체들을 접할 수 있는 것도 참으로 즐겁고 신명나는 일이다.

경기도의 도자문화는 이렇게 장구한 세월동안 한강을 중심에 두고 이리저리 뻗은 물줄기를 따라 산야의 곳곳에서 이루어져왔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한강이 흘러든 서해안 일대가 중국대륙과의 중요한 통교(通交)의 장으로 활동하면서 앞서 가던 중국의 도자문화를 받아들여 한국도자사의 개척자로서의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하여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경기도를 한국 도자문화의 보고(寶庫)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한강변 산하와 서해안 일대에 펼쳐진 경기도의 도자문화는 아득한 옛날, 신석기시대인 7000∼8000년 전에 소위 빗살무늬토기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거쳐 삼국이 성립되는 긴 기간 동안 한강유역은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지정학적인 이유로 해서 북에서 내려오는 각종의 토기문화를 이곳에 모아 재정리한 다음 다시 남으로 흘러보내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선사토기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경기도는 삼국시대가 열리면서 한성백제의 주된 활동무대가 되어 경기도 일대의 여러 유적에 수많은 백제토기들이 출토한다. 그렇지만, 경기도 지역이 우리 도자기 역사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 땅에 '자기(磁器)'라는 새로운 물결이 밀어닥치는 무렵부터라고 생각된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말 경에 청자와 백자가 발생하여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일찍 '자기문화시대'로 돌입하게 되는데 바로 이 무렵부터 경기도는 우리나라 자기의 발생과 관련된 중요한 가마들이 출현하면서 한국 자기문화의 보고로 급부상한다. 이런 위상은 고려말과 조선초기에도 계속되어 고려백자와 고려말기청자를 생산한 가마와 수많은 분청사기 가마가 활동하면서 지금까지도 그 자취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런 도자문화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여 조선초기부터 경기도 광주에서 수준 높은 백자가 만들어지며, 드디어 분원(分院)이 설치되어 관요(官窯)가 되면서 광주는 조선백자의 영원한 고향이 되고, 덩달아 인근 경기 일대 지역도 조선백자를 왕성히 생산하게 되면서 조선 오백년간 경기도는 백자문화의 명실상부한 중심지역으로 활약하게 된다. 본 고에서는 이런 유구한 경기도의 도자기 역사 가운데, 한국도자사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자리매김 되고 있는 고려시대의 자기문화와 광주 분원의 백자문화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1. 고려시대의 자기문화
우리나라는 도자기의 나라로 불린다. 세계가 우리 옛 도자기에 이토록 찬탄하는 이유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도자기 중의 '도기' 또는 '토기'라 부르는 종류는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만들었지만, 그러나 높은 온도에서 구워 유리처럼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자기'를 만든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 청자는 중국과 우리나라 외에는 거의 만들지 못하였고 이런 자기를 만든다는 것은 옛날에는 최첨단의 기술에 속하였다. 그래서 동방의 작은 나라 코리아가 놀랄 만큼 우수한 자기의 전통을 갖고 있는 것에 지금도 세계인들은 경탄해 마지않는다.

우리나라의 자기의 발생은 중국의 영향으로 통일신라말 경에 서남해안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중국 남쪽의 절강성에 있던 월주요(越州窯)라는 가마의 영향을 받아 자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우리나라는 '토기의 시대'에서 '자기의 시대'로 나아가게 되는데, 바로 이 무렵에 활동한 가마들의 존재가 경기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용인시 서리, 양주군 부곡리, 고양군 원흥리, 시흥시 방산리 등에서 우리나라 자기의 발생기에 해당되는 가마터들이 발견되었는데, 이중에 학술적으로 발굴조사된 용인 서리와 시흥 방산리 가마터가 유명하다.
이 두 가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청자와 백자를 만들었던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이 조사 결과 밝혀졌는데, 특히 용인 서리 가마터는 길이가 무려 83미터가 넘는 엄청나게 큰 가마시설이 거의 팔, 구백년 전에 사용되었음이 확인됨과 아울러 최초에는 우리 가마가 진흙이 아니라 중국처럼 벽돌로 쌓아 만들었음도 알게 되었다. 또한 이 가마를 운영하면서 생겨난 각종 폐기물이 쌓인 퇴적층이 6미터에 달하는데, 이를 자세히 조사하여 천여년 전의 우리나라의 청자와 백자의 순차적인 발달과정을 밝혀내면서 당대 도자사 연구의 기준이 되는 유적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청자는 일부이고 백자를 대량으로 생산하였음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천여년전에 이미 질 좋은 백자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고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일본이나 유럽 등에 비해 거의 700여년이나 앞서 백자를 만들었다는 놀랄만한 사건으로 평가되면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이러한 경기도의 초기 가마터들의 존재를 통해 우리는 경기도가 당시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자기문화의 선진지역으로 크게 활약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경기도의 고려시대 도자 문화가 우리 도자기의 역사에 끼친 공로 중에 각별히 다루어야 할 부분 중의 하나는 고려후기에 백자를 생산하는 가마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에 관악산의 남쪽에 위치한 안양시 석수동 일대에서 국내에서 최초로 14세기 무렵의 고려백자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고려시대 도자기는 물론 청자가 대부분이지만 일부 가마에서 백자도 소량 만들었는데 그 존재가 워낙 미약하여 이때까지 학계에서는 고려백자에서 조선백자로 발전해 가는 중간 고리를 잡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래서 석수동의 고려후기 백자가마터의 존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고려시대 도자문화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경기도는 이후 조선시대로 들어가면서도 변함 없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조선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수도가 한양으로 되면서 나라의 중심이 서울과 경기도 일대로 몰리게 되자 이에 따라 도자문화도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경기도는 이제 우리나라 도자계를 이끌고 가는 중추적인 지역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조선시대가 되면 처음 백여 년 간은 분청사기와 백자가 공존하는 양상으로 변하는데, 고려청자의 맥을 이어 받은 분청사기는 어찌보면 고려의 잔영으로 존재하면서 우리 민족의 독특한 감성을 다양하게 반영하고 지역적인 특성까지 가미하면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활발하고 대담한 조형적 역량이 돋보이는 새로운 도자미학을 이루었다.
청자나 백자에 비해 서민적 취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는 분청사기는 경기도 내의 광주·양주·남양주·강화도·여주·용인·안성 등지에서 다양하게 생산되었는데, 상감·인화·귀얄분청사기 종류가 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들 분청사기는 처음에는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여 백자와 어깨를 겨루면서 생산·사용되었지만, 차츰 유교적 가치관에 어울리면서 보다 고급한 자기인 백자가 왕실의 애호를 받게되고 급기야 광주에 분원이 설치되어 백자의 위치가 급상승하게 됨에 따라 경기도 내의 분청사기는 설자리를 잃게되면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맞게 되고, 이와 더불어 경기도는 본격적인 조선시대의 백자문화를 이끌고 가는 선두주자로 탈바꿈하게 된다.

2. 조선백자문화와 광주 분원
조선시대는 백자의 시대였다. 백자는 양질의 고령토로 만든 최고급 도자기로 자기문화로 볼 때 금세기도 백자의 시대이다. 이 대단히 실용적이면서 아름다운 백자는 중국에서 6세기경에 발생하고 그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10세기 이전에 만들어지지만 일본은 17세기초, 유럽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만들기 시작한다. 이만큼 백자는 기술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세계가 전반적으로 백자의 시대로 돌입하는 것은 18세기 이후에나 가능하였다.

조선백자는 고려백자의 전통을 바탕으로 당시 중국백자의 영향을 받아들여 성립되었다. 특히 조선왕조는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되었기 때문에 청빈낙도(淸貧樂道)와 근검절약의 생활관을 가져 자연히 도자기도 사치스런 것을 극력 배제하고 담박한 백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백자문화는 기본적으로 유교적 가치관과 맞물려 국가적 보호를 받으면서 조선초기부터 빠른 발전을 보이며, 특히 명군 세종대왕께서 '어기(御器)는 백자를 전용하라'는 명에 의해 크게 발전을 보게 된다. 나아가 조선 오백년을 통해 유교적 가치관의 변화와 더불어 백자의 제작양상도 변화를 거듭하여 조선백자는 조선시대의 정치적 변화와 사상사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있다.
이런 조선백자의 정착과 발전에 경기도 특히 광주지역의 공로는 절대적이었다. 광주지역은 우선 서울에 가까우면서 좋은 백토(白土)가 나고 땔감이 풍부하며 한강변에 있어 수로를 통한 수송이 편리하여 도자기의 생산지로서 최적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이곳에서 질 좋은 백자가 생산되어 광주에 분원이 설치되기 이전인 1420년대에 중국사신의 요구로 광주에서 백자를 구워 받치게 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며,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이 당시 전국에서 상품(上品)의 백자를 구웠던 곳은 광주·고령·상주 단 3곳뿐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국초부터 백자제작으로 이름나고 서울과 가까운 이곳 광주에 드디어 1467, 1468년 무렵에 왕실용의 자기를 전담으로 굽는 분원이 설치되면서 나라에서 직접 운영하는 관요로 격상되어 격조 높은 조선백자문화의 발달에 중추적 역할을 맡게 된다.

분원은 사옹원(司饔院)이라는 중앙관청의 분점(分店)이라는 뜻이다. 즉 사옹원은 궁중 내에서 왕에게 소용되는 모든 진상품 및 식사를 담당하면서 왕실에서 사용되는 그릇제작도 감독 관리하였던 바, 이 왕실용 자기를 제작·진상하는 사옹원의 하급기관이 바로 분원이다. 이 분원은 1884년까지 근 오백여 년 간 우리나라 유일의 관요로 운영되었으며, 그 영욕의 자취와 흔적이 지금도 광주군내 경안천을 중심으로 200여 개소가 남아 있어, 세계도자사상 이렇게 오랜 기간 한 나라의 관요로 한 지역에서 운영된  희귀한 유적으로 이름 나 있다.
광주분원의 역사적인 의의를 살펴볼 때, 우선 크게 두 가지의 중요성이 눈에 띤다. 하나는 조선백자의 격조 높은 도자미(陶磁美)가 이곳에서 이루어진 사실이다. 분원의 성격상 어용자기의 제작을 위해 당대 최고의 감식안과 기술과 재료들이 동원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재료의 선택에서부터 기형·문양까지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었으며 보다 나은 백자를 만들기 위해 항상 노력한 결과, 분원백자는 국내 최상의 품질이었음은 물론이고 세계백자사상에서도 유례 없이 뛰어난 품질과 격조 높은 백자미를 창조하게 된 점이다.

또 하나는 광주분원이 조선백자문화 전반에 끼친 영향으로, 한마디로 분원은 당시 우리나라의 도자문화의 중심센터로 여타 지방가마의 절대적인 모델이 되었다는 점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치하의 조선사회에서 백자의 발달은 전국적으로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각지의 지방가마에서도 광주분원과 거의 동일한 백자제작이 이루어졌다. 지방가마를 조사해 보면 형태나 제작수법 등이 거의 광주분원과 같으며 다만 고령토의 질이 좋지 않거나 만듬새가 다소 거칠어 전체적인 질이 떨어지는 정도이다. 그래서 도자사적으로 보면 조선말기를 제외하면 조선백자는 전국적으로 거의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세계도자사에서 희귀하게 보이는 현상으로 사용계층에 따라 그릇의 종류·형태·문양·제작기법등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르다. 이는 조선사회가 생각이상으로 중앙과 지방, 왕실과 일반인 사이의 문화적인 격차가 적었음을 반증하는 중요한 사실로 생각된다.

광주분원은 조선사회의 변동과 함께 변해갔다. 「왕조실록」등의 역사기록을 보면 분원에는 나라에서 지정한 사기장이 380명이나 소속되어 큰 집단을 이루어 운영되었다. 16세기까지 분원에 관한 기록이 별로 없어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가마터조사에 의하면 번천리·우산리·도마리·무갑리·관음리 등으로 옮겨 다니며 백자를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때 이미 관요이지만 왕실용뿐만 아니라 중앙관청용이나 사용(私用)의 백자도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부터 광주분원에 대한 기록이 다수 전하는데, 분원의 운영에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그릇을 만드는 사기장도 문제지만 땔나무가 큰 문제였다. 대체로 한곳에서 10년 정도 되면 근처의 나무가 없어져 다시 땔감이 풍부한 곳으로 가마를 이동하였다고 한다.
또한 질 좋은 백자를 굽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광주·원주·서산·경주·선천·양구·진주·봉산·충주 등 전국 각지에서 양질의 백토들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광주로 운송되어 왔다. 이 가운데서도 분원의 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땔감의 확보였다. 따라서 10년을 주기로 '수목이 무성한 곳(樹木茂盛處)'를 찾아 이동하는데, 이때마다 큰 마을하나가 통 채로 이동하는 꼴이 되어 분원이설(分院移設) 때마다 많은 돈과 인력이 소비되었다. 이런 분원이동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이 심각해지자 조정에서 '분원고정론(分院固定論)'이 대두되어 마침내 1752년(영조28년)에 한강변에 위치한 지금의 남종면 분원리에 분원을 고정시켰다. 이 분원리는 강원도에서 채취한 땔나무를 뗏목을 이용해 한강을 따라 내려보내면 보다 쉽게 땔감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두물머리(양수리)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초부터 시종일관 관요로 운영되던 광주분원은 19세기 후반들어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어지러워지자 민간자본이 서서히 유입되면서 그때까지 사기장의 생계를 위해 일부 허용했던 사번(私燔)이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해 관요로서의 분원의 존재마저 위협하게 된다. 궁궐의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어렵게 명맥을 이어가던 분원은 1884년에 마침내 민영화(民營化)를 결정하게 되고, 궁궐에서는 민간자본으로 생산된 자기를 구입하여 사용하게 됨으로 광주분원의 운명은 공식적으로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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