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남자
술도 못하는 사람이
술이나 한잔 사 달라고 하는 건,
술기운으로 뭔가 할 말이 있다는 얘기지..
술잔을 받아 놓고도..
"술집의 조명이 어둡네.."
"안주로 나온 오이가 싱싱하지 않네.."
쓸데없는 화제로 말을 빙빙 돌리는 건..
술기운으로도 하기 힘든 이야기가 있다는거구.
뭘까..? 음..?
넌 어둡다 했지만,
그저 평범한 조명 아래에서..
넌 시들었다고 했지만,
그저 평범한 오이를 앞에다 두고..
술잔 두개를 사이에 둔 체,
나와 멀리 마주앉은 너.
어제까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가벼운 징조도 없었는데..
낯선 사람처럼 내 눈길을
피하고 있는 니가..
쓰지도 않던 존대말로
나를 부르는 니가..
나한테 해야만 하는.. 말..
하지만.. 할 수 없는 말은..
도대체 뭘까..?
그여자
비가 오면 술 생각이 난다며,
니가 자주 나를 데려오던 곳.
비도 오지않는데..
내가 이 곳에서 만나자 했던 건,
할 말이 있어서지.
자주 찾아왔기에
우리를 알아보는 아르바이트생도..
오늘은 우리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술잔을 내려놓고 가고.
니 표정만큼 어두운 조명과..
내 마음만큼 시들어진 오이와..
이 빠진 접시에 담겨있는 눅눅한..
과자 부스러기.
따른지 20분이 더 지난,
이젠 미지근해진 소주 두 잔은..
멀찍이 마주앉은 우리 모습같아.
너에겐 갑작스러울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있던 말.
나는 이제 그 말을 하려고 해.
진작 말했어야 됐는데..
기회가 없었어.
내가 말을 하려고 널 보면..
넌 행복하게 웃었고..
내가 말을 하려고 널 부르면..
너는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했으니까.
너무 늦게 말해서 미안해.
우리.. 그만 헤어지자.
오래 전부터, 널 사랑하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