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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 기행

이태호 |2008.02.02 14:38
조회 157 |추천 1


* 원문 : http://www.vdesire.com/meju/script.html

 

일단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참 강력한 족속들이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잠깐 접해본 서양문명과 문화는 그렇게 참 대단한 면이 있었다. 학창시절 윤리시간에 배웠던 ‘문화적 상대성을 고려’한다는 것 따위가 정말 엉터리 말 같았다. 과학과 합리주의 말고는 어느 하나 동양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주장했던 어느 노철학자의 말이 거짓말 같았다. 결국 집에 돌아오는 길, 무거운 짐과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순간까지 어떤 하나의 결론만은 정확히 스치고 지나가야만 했다.

푸른 땅을 밟다

비행기조차 처음 타본, 그래서 그 무거운 물체와 많은 사람들이 공중으로 가볍게 뜬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아 멍하니 나와 멀어지는 땅덩어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나였다. 내 몸을 실은 거대한 물체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안정되게 땅을 박차고 나갔다. 상체가 뒤로 강하게 밀린다. 육중한 덩치에 어울리는 엄청난 힘이 맴돌고 있다. 아. 이제 나가는 것이다. 컴퓨터 게임으로만 날아봤던 하늘을 실제로 나는 것이다. 도저히 딛을 곳 없어보이던 바로 그 구름위에 이 물체는 나를 안정감 있게 받쳐주고 있다. 사진과 나의 상상 안에만 있었던 더없이 푸른 창공의 수평선이 눈앞에서 명멸한다. 그리고 땅 위의 모든 것들은 한낱 미물들로 변해 나로 하여금 그들을 깔보게 만들어버릴 지경이다. 유리 몇 겹 사이로 바라본 그곳은 그렇게 가장 낭만적인 동시에 가장 리얼한 공간이었다. 내가 바라본 그곳은 인간의 꿈이 우주를 향해 가장 진중하게 실토되는 공간이자, 최초의 넘을 수 없는 절망이 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인간이 결코 즈려밟을 수 없는 땅, 그러나 인간의 이상이 가장 농밀하게 스며든 땅이었다. 나는 직감하고 확신했다. 이러한 내 현실 바로 코앞에 있는 바로 이 경험은 결코 신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명철한 과학적 사고와 열정적인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여정의 목적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해 서유럽으로 들어갈 예정이었으므로, 한국에서 도착하자마자 하루 묵었다. 적지 않는 나이에 처음 밟아보는 외국 땅 이었다. 거기다 전세계 근.현대문명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서양땅의 한복판에 들어서게 된다. 거기다 숱한 소설과 작가들과 영화와 음악들의 본거지인 그 땅을 밟게 되는 것이다. 이스탄불에 도착한날부터 나는 정신없이 카메라로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전체 여정의 주 타이틀이자 프로그램은 ‘성지순례’ 특히 성모발현지라고 불뤼고 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메주고리예란 지역에 1주일 동안 머무르는 것이었다. 이미 사원까지 세례명을 쓰고, 회신으로 보낸 이메일에는 ‘찬미 예수님!’이란 인사를 하고 있던 여행사의 프로그램인 만큼 여정의 본 목적을 내가 파악하지 못 할리 없었다.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라는 곳에 착륙해 버스로 하루 웬 종일 이동하고 나서야 그곳에 도착하고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국제 청소년 페스티벌’이라고 하니 말 그대로 생각하면 ‘주님’을 매개로 한 전세계 젊은 신앙인들의 축제 따위가 되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정을 겪으며 예상이 약간 빗나감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메주고리예는 예수님, 혹은 발현하셨다는 성모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세계적으로 많은 신자들이 찾는 유명한 성지였던 만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 처럼 성스럽게 보이는 곳은 아니었다. 이미 거리의 모든 곳이 성물 판매소나 술집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그러한 첫인상은 새로 신축한 성당의 매끈한 형상과 함께 어쩐지 산위로 저 멀리 보이는 십자가산이 상치되는 면모가 있었다. 메주고리예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그랬다. 그곳에서 우리 한국팀의 일정은 한 두명의 여행사 인솔자 분들을 중심으로 한, 여름성경학교 내지는 수련회와 비슷한 분위기로 진행되었고, 일정이 계속될 수록 그 이유로 같이 온 또래의 많은 이들은 연달아 불만을 조금씩 터뜨릴 정도가 되었다. 실상 이렇게 스스로의 내면에 있는 성격을 표출시키고, 기도와 십자가산 고행을 통해 스스로안에 있는 악을 떨치고 성모님의 은총을 그 안에 심어주겠다는 그런 취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여행, 아니 순례의 주된 목적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첫 몇일 동안 미처 생각치 못한 상황에 약간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그럭저럭 넘겼던 것 같다. 하루는 보통 오전에, 뙤악볕이라는 환경이 조금 걸렸지만, 동시통역되는 강연을 그저 벤치에 편히 앉아 듣는 것, 몇 시간의 자유시간, 어느 정도의 기도를 하고, 미사를 하고 일정이 끝난다. 가끔 새벽에 뾰족한 돌산을 맨발로 걷기도 하였다. ‘순례’에 원래 목적이란 있을 수 없고 다만 그 여정 자체가 하나의 신앙적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메주고리예에서는 어떤 꽤 분명한 ‘목적’과 ‘의무’를 달성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이미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문화권의 종교를 가지고 일상 속에 그것을 내밀하게 구현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였는데도 가장 유교적인 분위기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못내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처음 몇 일간 내가 그 땅에 들어선 목적을 부정적으로 생각해 봤으나, 시간이 조금 지나 그런 생각조차 쓸모 없는 것임을 깨닫고 그저 일정 그대로 따라갔다. 메주고리예와 그 안의 사람들이 나에게 주었던 이미지는 바로 여기까지이다. 마지막날 밤에 함께 ‘할렐루야!’를 목청껏 열정적으로 외치며 함께 신나게 사진을 찍었던 이탈리아인들과의 시간은 나에게는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현존과 기적을 좇는 사람들

성모 마리아님이 발현하였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인 근거와 이유가 있고 증인들과 그들의 증언들이 생생히 살아 있다. 그러나 기도에 성실하지 않는 태도를 가진, 신앙이 약한 사람들은 결코 느끼기기 힘들다고한다. 보이는 것 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신앙의 기본 모티브가 서로 현저히 충돌하는 순간이다. 신앙 혹은 믿음의 종교적 뿌리는 본래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되어 있건만 메주고리예의 모든 사람들은 현존과 현실에서의 기적을 갈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종교의 근엄성 아래 집단적 센세이션이 일으키는 힘은 정말로 사람들에게 어떤 강력한 것을 발현하려 하였다. 그래! 바로 그것만이 진정한 발현이고 현존이었다. 더 이상 예수님과 마리아님은 구름위를 걷는 분들이 아니었다. 스스로 그렇게 되고자 강한 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땅 위에 실제로 불쑥불쑥 발현하였다. 또한 그들 스스로가 한 낱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는 하느님의 실존과 은총은 가장 정확하고 논리적인 으로부터 우리 순례자들에게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설득력있게 표현되고 전도되어갔다. 이를 통해 새로운 신자가 생겨나고 새로운 신앙의 방식이 배태될 것이었다. 비논리적인 신앙과 신의 범접할 수 없는 믿음의 최초 태생이 바로 명확한 논리와 설득력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중대한 순간인 것이다. 하느님 앞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의 시점으로 바라본 메주고리예의 모든 기도와 욕망의 본질은 바로 그러한 원리의 순환이었다. 이때 믿음이란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가장 신성한 수단에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5일동안 이루어진 강연 중에 기억남는 강연내용이 있다면 어떤 의사가 말한 치료기적의 경험담이었다. 엔지니어 혹은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 신앙을 동등하게 생각하는 그의 믿음의 방식이 나에게 있어서는 차라리 가장 솔직해 보였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나의 종교관과 유사한 면도 보였다. 그 이외의 열변들에 관해서는 뭐라고 할말이 없다. 강연을 했던 모든 사람들 당사자들에게는, 분명 어떤 믿음을 생겨나게 하는 기적적인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기본적으로 그 사람들의 기적을 믿는 편이었다.

영원의 도시 로마, 그리고 신의 구현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에 도착해 한없이 청명한 하늘과 뜨거운 이탈리아의 태양을 받으면서도 나는 아직 로마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다만 ‘내가 로마를 간다’라는 하나의 분명한 현실에 대한 나의 부푼 기대감과 설렘은 마침내 메주고리예에서 가져온 피로를 일거에 떨쳐내 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로마에 왔다는 반증이리라.

영원의 도시 로마. 로마는 고대에 천년 로마의 고도로, 고대 서양 세계의 핵심부중의 핵심부이었다. 그로부터 1천년이 지난 무렵에는 르네상스의 중심지였으며, 지금도 현대 이탈리아의 수도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의 말처럼, 로마는 과거에 존재했으며, 현재에도 존재하며, 미래에도 존재할 영원의 도시다. 그 로마에 지금 간다는 것이다. 숙소로 이동하는 버스를 타있는 내내 참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전날 밤에 일행들과 마신 보드카에 거나하게 취해 잠든 후 다음날 약간은 피곤한 상태로 로마 시내로 향했다. 그러나 시내에 도착해 버스에 내리자마자 바로 회복된 듯 했다.

그들의 섬세하며 웅장한 땅위의 표식들은 하늘에 대고 끝없이 공격적이기에 차라리 악마적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아직도 그곳의 숱한 성당안에서 울려퍼지던 파이프 오르간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 소리는 도저히 반역할 수 없고 두려워 고개를 들 수 없는 절대적 신의 육중한 위엄을, 한 조그마한 소년의 고막과 뇌리에까지 둔탁하게 산파하고 있었다. 그들의 웅장한 음악과 건물들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였고, 바티칸 궁에 들어서면서 보았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섬세한 대리석 조각상들은 마치 인간을 흙으로 빚었다던 조물주의 능력을 그대로 모방한 듯한 정도였다. 다른 면으로 보면, 신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고 신의 영광을 표현한다는 의지로, 실제로 스스로는 신에 근접해보고자 했던 권력자들의 의지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건축물들로 가득차 있었고, 이미 신의 무자비한 권능은 그 자체로도 차라리 그 땅에 실재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대리석들의 집합이 수많은 노예의 피땀으로 세워지고 교황의 권위를 지상에 확립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동전의 뒷면을 생각하게 된다. 로마는 분명 세계사에 빛나는 위대한 문명이지만, 그 위대한 문명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 위에서 세워졌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특히 카톨릭 교황의 집이라고 하는 그 바티칸 궁전의 엄청난 규모는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다니는 와중에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한번씩 들이마시는 공기 한걸음씩 밟는 그 땅 모두 ‘영광스런’ 역사와 희생의 숨결이요, 권력의 발자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는 나에게 단순한 순례지나 여행지 일 수 없던 것이다. 급하게 이동하고 또 이동하는 중간에 최대한의 기록을 목적으로 마냥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더욱 안타까웠다. 그 역사의 무대를 천천히 걸으며 어떤 깊이있는 생각을 발전시켜보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로마 일정 중 트레비 분수 대신 영화 로 유명해진 스페인 광장을 갔던 것이 지금 가장 마음속에 걸리는 기억으로 자리 잡고야 말았다. 왜,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 위대한 도시 로마에 다시 올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로마를 떠나는 버스 안에서 꼭 혼자서만 다시 오리라는 생각만이 가득했었다. 200년전 괴테도 이탈리아를 다녀오고 나서 이란 책을 저술했지만, 언젠가 나도 나만의 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로마'라는 두 음절의 단어가 주는 소망과 기대감, 그것은 진정으로 괴테의 것만은 아니었다.

천재들의 도시

버스를 타고 로마에서 메디치가의 본거지 피렌체로 이동하는 동안 가이드분으로부터 그 도시명에 대한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피렌체, 영어식 발음으로 플로랑스라는 것은, 카이사르가 아르노강 유역에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도시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플라워와 발음이 근접한 것을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한편 피렌체 대성당의 규모는 익히 예상했던 터라 그리 놀랍지 않았으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단테, 마키아 벨리와 같은 인물들이 활약했던 땅을 두 발로 직접 밟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찰 뿐이었다. 여행사에서는 성지순례의 형태를 이번 여정의 형태로 잡고 있었으니 대체로 세속적인 역사를 간직한 장소보다는 성당 위주로 편성되어 있었다. 메디치가의 저택을 가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으나 내가 그들이 살던 거리를 걸어봤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밀라노의 밤거리

분위기 자체가 자못 고풍스러운데다 흐린 날씨 탓으로 약간은 침침했던 밀라노의 이미지는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피사에서 피사의 사탑을 구경하고 나서 밀라노로 도착한 시간은 노을이 깔리는 늦은 저녁쯤이었던 것 같다. 황혼의 시간에 붉게 물든 고딕양식의 밀라노 대성당을 본 것은 작은운명이었을까. 그것은 붉게 물든 창 끝으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여실히 찔러대고 있었다. 그것은 염원이었을까 욕망이었을까. 고딕양식의 최고봉이라고 소개되는 밀라노 대성당은, 명품거리는 그렇다 치고 밀라노라는 도시 전체의 흑백 분위기와 함께 현재의 내 기억속에 맘대로 섞여있다.

어두워질 무렵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 밀라노에서의 밤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 일행들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다시 그곳을 찾았다. 야경촬영을 구실로 왔기에 역시 조명을 받은 밀라노 대성당의 자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좀더 악마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기억이다. 광장 근처에서 맥주를 마시고 돌아왔으나 그곳의 밤거리가 너무 아쉬워 호텔 근처에서 거리사진을 찍다 한 식당에서 이탈리안들과 우연한 기회에 함께 사진을 찍게 되었다. 처음엔 카메라가 희귀한 것이 이유인 줄 알았지만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전혀 달리 사진찍는 행위자체를 좋아한다고 한다. 사진을 찍어 준 덕분에 시원한 레몬주를 한잔 얻어 먹었다.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프랑스의 ‘메주고리예’

눈비가 오는 날에 딱 맞춰 알프스 산을 올라간 덕분에 그 장엄한 알프스 자락 풍경을 케이블카를 타고서도 보지 못했던 안타까움이 있은 후로, 스위스의 제네바를 잠시 들렀다 야간 열차를 타고 프랑스의 남쪽에 있는 루르드로 향했다. 또 다른 성모발현지였던 곳이다. 지금껏 보아왔던 성당들 보다는 아담한 편이었으나, 한가롭게 흐르는 강가를 끼고 보이는 그곳은 녹색 풍경화처럼 아름다웠다. ‘기적수’라는 곳에 몸을 담그기 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평화스러워 보이는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이런 저런 미사와 행사를 치루고 나서 마지막날 밤 혼자서 밤거리를 배회했다. 아직 파리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프랑스 땅에 처음 들어섰다는 다분히 의식적인 감흥이 내 몸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느 때 밤거리를 걸으며 사진을 찍던 것 처럼 그렇게 걸어다녔으나, 분명 어떤 특별함이 있었다. 루르드의 밤거리는 굽이 굽이 휘어져 돌아가는 골목들의 틈새 틈새가 나에게 평범한 이국의 밤거리를 넌지시 건네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렇게 약 두어시간을 배회하다 호텔로 들어서는 길에 우연히 술에 만취한 일행들을 발견해 그들이 남긴 술을 내 뱃속에 열심히 버려놓고는 그 날밤을 마무리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파리를 동경했던 이유

오전에 루르드에서 테제베로 꼬박 6시간을 달려야 파리에 도착한다고 한다. 여정 중간에 식당칸에서 보았던 귀여운 프랑스 소녀의 얼굴이 기억난다. 엄마로 보이는 중년여자와 한명의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너무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길래 슬쩍슬쩍 눈을 마주치고 웃어주곤 했고, 마침내 허락을 한 것 같아 한 장의 자연스런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피곤한 여정이었지만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그런 소소한 일들은 나의 피로를 여유로 바뀌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참을 달렸을까, 종점인 파리역에 도착했다. 로마땅을 밟았을 때 느꼈던 감정과는 조금은 다른 느낌이었다. 내리자마자 버스에 타기 바빴으므로 여유가 없었고, 식당으로 가는 길에 잠깐 보았던 거리 조차 밀라노의 거리 분위기가 비슷하기에 그다지 실감은 나지 않았었다. ‘내가 파리에 왔다’라는 사실에 대한 의식이 억지로 무엇인가를 끌어올리려 하였다.

늘 어느 도시에 도착해도 마찬가지였다. 호텔에서 잠으로 밤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호텔 카운터에서 우연히 만난 일행들과 나는, 이미 파리와는 상당히 떨어진 호텔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오를리공항으로 간 후 그곳에서 잡아탄 택시에 샹젤리제 거리를 가지고 주문했다. 오를리 공항으로부터 샹젤리제 거리까지는 무려 30유로가 넘게 들었다. 택시비가 비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곧 파리의 야경을 볼 수 있었기에 돈이 아깝지 않았다.

개선문과 함께 있는 샹젤리제 거리는 이미 너무도 유명한 곳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했던가. 아예 먹을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내가 그 곳에 서있다는 사실이 주는 설레임과는 별도로 샹젤리제 거리에 대한 막연히 큰 기대를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약간 실망스러웠다. 사실말하자면 기대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마치 우리나라 서울의 광화문 거리를 연상하게 하면 되었다. 다만 개선문의 야경을 배경으로 한 사진을 한장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 흐뭇했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을라치면 사람들은 늘 카메라의 물리적인 크기와 그 카메라를 가지고 찍는 나에게 호기심을 보인다. 이번에도 그 호기심을 빌어 우연히 지나가던 한 무리의 일행들(멕시코 인들인 것 같았다.)과 신나게 또 한장의 소중한 사진을 담게 되었다.

본래 물랑루즈를 가자고 했던 것이 거리가 너무 멀어 그곳으로 가게 된 것은 나로서는 가장 큰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에펠탑의 야경을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펠탑은 역시 듣던대로 대단한 야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일단 크기면에서 생각보다 컸고, 숱한 영화의 배경에 보였던 그것을 직접 본다는 기쁨도 있었다. 분명히 랜드마크로는 제격이었다. 관광지의 분주하고 떠들석한 분위기와, 암흑속에서 환한 실루엣을 빛내며 홀로 거대하게 서있는 그 물체가 풍기는 출처 모를 낭만과 고독함은 탑 꼭대기에서 간간히 돌아가는 직사조명과 함께 어떤 상당히 변증적인 매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저 앉아서 멍하니 바라볼 뿐 이었다. 에펠탑이 잘 보이는 곳(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에 가서 수동으로 차분히 야경을 제대로 담고나서 그것을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고 군것질을 한 후 바로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그 다음날 본격적인 파리 투어가 이루어졌는데, 파리의 노틀담 성당과 개선문을 비롯해 유명지는 거의 돌아본 듯 했다. 중간에 시간이 생겨 10분동안 머무른 콩코르드 광장은 그 당시의 느낌으로서는 바티칸 궁전의 광장과 느낌면에서 규모가 맞먹을 만했다. 많은 이름이 그 광장을 거쳐갔지만 그 중에서 불란서 혁명 당시 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에서 목을 잘렸다고 하여 ‘피의 광장’이라는 이름도 있었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이 있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 광장에 계속 그 이름이 남아 있었다면 관광객들이 몰리지 못했을까. 오히려 더욱 유명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곳에 있던 우아하고 섬세한 조각상들의 이면에는 하늘을 찔러 벨 듯한 오벨리스크와 버무러진 인간광기의 역사가 서려있었다.

결국 세느강의 유람선을 타고 파리의 주요 건물들을 돌아보는 것으로 파리의 일정이 마무리 되어갔다. 이스탄불에서 있을 하루정도의 일정을 제외하고는 이제 서유럽땅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돈이 더 있었다면 혼자서 몇일 더 머무르고 싶을 정도였으니 파리를 떠날 때 느꼈던 아쉬움은 지금도 절절할 정도다. 그것은 아마도 여정의 막바지에 느끼는 섭섭함과 결부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나는 창가쪽에서 행여나 파리시내가 보일까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파리를 떠났다.

동서양 문명의 교착지점

여행 막바지라 그런지 몰라도 일행들은 버스만 타면 졸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이스탄불이라는 중요 여행지점이 남았는데도 졸음은 계속해서 쏟아졌다. 다만 버스를 내리고 삐죽삐죽한 팔다리를 가진 모스크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이 떼어졌다. 첫날 잠시 이스탄불을 거쳐갔지만 구시가지로 들어선 버스의 창가로 보이는 이스탄불의 거리거리는 다시 새롭게 보였다. 이미 거대한 건축물이라면 눈 시리게 보아왔던 터이므로, 세계 최고크기의 돔을 가졌다고 하는 성소피아 성당에서 어떤 특별한 신기함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슬람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안에 홍일점 처럼 우뚝 서있는 카톨릭 성당이라는 면에서 상당히 의미있는 관람이었다. 물론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인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천년 고도의 동로마제국의 심장이었기도 했던 이곳은 그 후 오스만 제국이라는 이슬람 문명에 의해 멸망당할때까지 비잔틴 문화라는 타이틀 아래 서양 문명이 도래했던 곳이다. 동서양이라는 것도 이제는 사실 고리타분한 로컬리즘적 개념이기는 하다. 이렇게 보았을 때 터키라는 국가가 가진 지리적 여건으로 초래된 역사의 흐름이 있었을 뿐, 터키, 특히 이스탄불만의 고유한 문화를 두고서, 물리적으로 나뉘어진 신시가지와 구시가지 간의 모습의 차이가 있을 망정, 동양적 문화, 서양적 문화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나눠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다만 비슷한 건물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블루 모스크와 소피아 성당의 쓰임새가 다르듯 종교 문화권의 차이와 구분은 확실히 해야 한다. 여전히 종교적 구분법은 유효했다. 한편으로 군데군데 뜯겨져 나간 예수의 모자이크가 이 도시의 유구한 역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이스탄불에 맞는 마지막 햇살은 따갑게 비추고 있었다.

신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믿음

인간이 신에게 자신의 충성심과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은 역시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이때 종교는 수 천년 동안 국가와 통합되어 기능했고, 강력한 통치수단으로 손색이 없었다. 도처에 종교적 건축물이 널린 유럽을 여행하면서 특히 종교와 인간에 관한 다소 무거운 주제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의 카톨릭체제의 역사는 언제나, 묵주를 끼고 매일 아침 소박한 기도를 드리는 나의 어머니의 뒷모습과는 전혀 별도로, 인간의식의 발로가 신을 향해 가장 적극적으로 펼쳐졌던 찬란한 장이었던 동시에권력자와 정치의 강압아래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지어진 피의 역사임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피의 얼룩과 영광으로 장식된 땅을 딛어봤기에, 그래서 이번 여정은 나에게 있어 의미이상의 의미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종교적 믿음이 어떠한 체제를 이루고 제도화되면서 생기는 종교적 문제들과 나의 어머니가 자식들의 건강과 인류의 보편적 평화를 위해 드리는 순수한 기도에서 나오는 종교적 문제간의 간극은 이미 나의 생각 안에서 크게 벌어져 있었다. 메주고리예와 서유럽을 기행하면서 오히려 많은 것들이 분명해졌다.

분명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것은 바보짓이다. 특히 하이젠베르크 이후의 현대물리학자들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눈으로 분명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나는 종교의 힘과 심지어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가져다 주는 기적을 믿는다. 그러나 그 기적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강경한 성직자들은 기도와 신앙을 통해, 무신론자들은 과학의 힘을 빌어 현상을 명철하게 보는 예리한 이성의 힘을 통해 올바른 길을 찾는다. 심지어 그들은, 인간은 단지 우주의 하잘 것 없는 먼지에 불과하니 그러한 거대 자연에 순응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일종의 우주적 예의에 대한 견해마저 동일한 면모를 보인다.

다만 극히 위험해 보였던 것은 종교근본주의자들이었다. 최악의 경우는 그 옛날 초기 기독교도들이나 스토아 학파의 스타일을 상당히 물려받은 것 처럼 보이는 경우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아니면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견해이자 태도를 어느 누구보다 강하게 갖춘 사람들이었으며, 각종 절제와 의무를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과 쾌락에 무조건적으로 우선하여 악함에 대응하는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그들의 그러한 입장을 세계를 단순히 선과 악이라는 대치상황으로 보는 관점과 맞물리게 하여 아주 대단한 편협을 이루어내고 있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청교도적인 성향을 보였다. 이번 여정을 통해 나는 그러한 믿음을 아주 굳건하게 지니고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꽤 보았다. 그들에게 예수라는 인격신은 하나의 우주이자 모든 것이다. 그 이외의 것은 다분히 하위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의 생명보존을 위해 자신들이 이미 걸치고 있는 과학과 자연환경이라는 옷의 존재를 무시하고야 말기에 이른다. 그리고 나서 현실과는 대비되는 대안공간을 그들의 든든한 백그라운드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너무 염세적인 평가인가? 그러나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그들의 그 강력한 믿음의 이러한 모든 구조를 대단히 윤리적으로 구축하고 또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순된 그들 믿음의 구조 자체가 이미 하나의 올곧은 진실로 형변환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자체가 차라리 눈에 보이는 신의 현존이었다. 그리하여 분명 굳은 믿음으로 뭉쳐진 신앙이 가진 ‘위대한 힘’은 어떤 식으로든 실재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 힘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번 여정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이미 멋모르던 어린시절에 받은 세례명까지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교적 체계. 특히 카톨릭이라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고 냉소적이었던 전보다 ‘신앙’과 ‘믿음’이라는 것들에 대해 좀더 명료한 관점을 생겨나게 할 수 있었던 동시에, 심지어는 대체로 일부분을 더욱 옹호하는 입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만 나에게 어떤 큰 불행이 닥쳐오더라도 나의 모든 것을 종교에 내맡기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만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의 실존적 삶이 담긴 우리의 땅

“짝짝짝~”
덜컹거리며 착륙한 기내에는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안전한 착륙을 자축하는 박수소리였던 것이다. 박수를 친 것은 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니라 외국사람들이었고, 종종 그 모습을 보았기에 그리 놀라진 않았다. 이번 여정을 무사히 끝마치고 많은 것들을 얻어온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런 박수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창 너머에 착륙작업을 도와주고 있는 검은색 머리의 항공사 직원들이 보였다. 바로 이곳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이었다. 나의 땅에 돌아온 것이다. 언젠가 여행 중 어떤 가이드로부터 유럽에서 오래 있다가 한국에 가면 얼마나 우리나라 곳곳의 풍경이 얼마나 각박한지 알게 될 것이다라는 조소 섞인 말을 들었다. 관점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1950년대 이후 까맣게 탄 황무지 쑥밭에서 시작한 우리의 땅은 그들의 땅에 비하면 정말 깔볼만한 곳인가.

거쳐갔던 어느 공항보다 거대했던 인천공항을 버스로 떠나면서 창가로 저 멀리 보이는 고층아파트와 죽죽 뻩은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차들을 보며 나는 아무 말없이 그냥 가볍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이곳은 이미 앞으로 우리가 딛고 살아가고 ‘그들’이 자랑하는 땅보다 아름답게 가꿔야 할 우리의 땅이었던 것이다.


이태호
2007.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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