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영웅문 1부의 이전 내용이 되는 동사서독
맨날 제목만 듣다가 실제로 보니 정말 독특했던 중경삼림
도가철학 배울 때 썼던 레포트인데, 내용이 너무 사랑은 허무해, 영원하지 않아, 이런 쪽이긴 하다. 노자의 무위자연을 주제로 쓰다보니 어쩔 수 없었던... 그래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은 기회였던 것 같긴 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처다보지도 않았을 이런 좋은 영화를 보게 된 계기가 되어서 더욱 좋았고. 동사서독 마지막에 구양봉이, 떠나는 날이 되어서야 사막의 하늘을 처음 바라보았다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 두개, 강력하게 볼 것을 추천한다.
덧없음에 대하여- 동사서독과 중경삼림
노자는 무위자연을 이야기 한다. 무엇인가를 억지로 하기보다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스스로 그러한 대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소박한 삶이 즉 무위자연이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온갖 허위허식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허위허식이라는 것의 범위를 어느 정도나 잡느냐에 따라 그 해석상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어쨌거나 노자사상에 비추어 덧없음이란 것은, 무엇인가를 이뤄내고자 노력할 지라도 그 결과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흘러가게 되므로, 혹은 그 결과라는 것도 결국은 의미를 찾을 수 없다, 혹은 의미가 없다라는 것으로 일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덧없음을 동사서독과 중경삼림이라는 두 영화를 통해서 왕가위 감독이 어떻게 그려내었는지 살펴보면서 덧없음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동사서독에 나오는 전형적인 사례들을 심층적으로 살펴보아 구체화시키고 일반화 시킨후에 중경삼림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두 영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바탕으로 결론을 내리는 방식으로 진행하겠다.
동사서독은 기본적으로 김용의 장편무협소설 ‘영웅문’에 나오는 인물들의 과거사 같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 혹은 그에 대한 무상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러인물들의 인과관계가 겹치고 섞여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여기서 주인공이라 이야기 할 수 있는 인물은 서독 구양봉이다. 그는 전체적으로 화자의 역할을 담당하며, 굉장히 전형적인 덧없음의 사례를 가지고 있다. 먼저 이 구양봉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는 백타산이라는 곳 출신이며,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자보다도 무공의 수련을 우선시 했고, 그 결과로 결국 사랑하는 여자는 다른 남자도 아닌 그의 형과 결혼하게 된다. 그냥 사랑을 놓친 것도 아니고 형수가 되다니, 이러한 지독히 아이러니한 설정은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극적 요소를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때서야 잘못을 깨달은 그는 결혼식 당일에 그 여자를 독촉하여 같이 도망가자고 하지만 여자는 거부하고, 결국 혼자 백타산을 떠나 먼 사막 지역에서 살인청부업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잠깐 구양봉의 경우에 나타나는 덧없음이란 무엇인가 살펴보자. 그는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 즉 사랑하는 여인을 한번 획득었지만 무공에 너무 열중했기 때문에 그 여인을 놓치게 된다. 이 영화의 배경상 무공이란 굉장히 중요하다. 따라서 무공을 열심히 연마한다는 것은 여인을 사랑하는 과정과 결국 나중에 함께 살게 될 때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물론 무공을 이러한 관점에서만 보기는 힘들다. 경우에 따라서 무공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너무 거기에 연연한 나머지 결국 사랑하는 여인을 놓치고 더불어 가지고 있던 다른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황량한 사막으로 가게 된다. 구양봉의 이 행동이 보여주는 것은, 본인은 비록 깨닫지 못했을 지라도 우선순위가 무공보다 여인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더 중요한 목표를 잃게 만든 무공수련의 덧없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무공수련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가? 혹은 덜 열심히 했어야 하는가? 그것도 그렇지 않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 배경상 무공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며, 설정상 구양봉의 위치는 백타산이라는 집단 내에서 꽤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입장에서 무공수련을 등한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과 무공수련은 얽히고 얽혀서 결국은 비극을 낳는다. 사랑과 무공수련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인간관계와 생업을 나타내며 따라서 이러한 구성은 이러한 것들을 부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의 사랑을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여인이 그 형과 결혼한 이유인데, 그것은 바로 구양봉이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구양봉은 과연 왜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는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는 달리 그렇다면 만약 사랑한다는 말만 해줬다면 구양봉이 그 여인을 놔두고 무공수련을 얼마를 하던간에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럴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그러나 구양봉은 그것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이 그렇건 그렇지 않건, 혹은 가정이 어떻건 간에 결과로서 행위에 대한 깊은 허무를 낳는다.
여인이 구양봉을 버린 이유에 대해서 조금 더 파보자. 구양봉을 버린 것은 일종의 심리적인 측면에 기인한다.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이기기 위해서 그의 형과 결혼한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무엇이 중요한가? 둘은 말이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형식에 얽매였다. 형식이란 인위다. 그녀는 말한다. 내가 이긴 줄 알았으나 결국 졌다고. 그녀는 병을 앓고 있었고 나중에야 후회하면서 죽는다. 그녀의 이런 비극적인 결말 또한 위와 같은 상황에서 드러난 허무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구양봉이 결혼식날 같이 도망치자고 요구하는 것과 그녀가 나중에 후회하는 것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 진정 소중한 것이 앞에 있지만 인위적인 다른 것에 가려서, 즉 여기서는 무공과 기이한 경쟁심리, 그것을 잃게 되니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인위의 덧없음과 연관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등장인물인 동사 황약사는 구양봉과 구양봉의 여인 사이에서 기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그 여인을 사랑하지만, 구양봉이 있었고 또 나중에 그 형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저 바라만 보는 처지이다. 그는 매년 구양봉을 만나러 가는데 그 이유는 그와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만나고 오면 그의 소식을 전해주는 핑계로 그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구양봉은 그가 그저 자신과 술을 마시러 오는 것인 줄로만 알지만. 황약사의 행위는 일종의 완벽한 기만행위다. 황약사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지 못하고 여인만을 바라보기에 덧없으며 더불어 이러한 관계에서 구양봉과 황약사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우정관계 역시 완벽한 기만에서 오는 것이므로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 기만의 행위역시 황약사의 불분명한 감정 때문이니 그 허무의 깊이는 더하다.
다음 인물로 넘어가기 전에 이 영화에 등장하는 특별한 도구인 취생몽사를 잠깐 살펴보자. 그는 그녀가 죽기 전 구양봉에게 전해달라고 준 취생몽사라는 술을 가지고 온다. 여기서 감독의 기억에 대한, 혹은 인생사의 고난에 대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황약사는 술을 권하며 이야기 한다. 인생사의 고난은 기억에서 오는 것이며, 기억이 없다면 매일매일 새로 시작하는 것이기에 얼마나 좋을 것이냐고. 여기서 기억은 인생사의 사건들을 이야기하며, 이는 즉 인위적인 것과 연관된다. 이러한 기억들을 잊으면 얼마나 좋을 것이냐고 이야기 하는 것은 즉 그러한 인위적인 것들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취생몽사를 마시고 기억을 잃은 황약사는 다음에 살펴볼 인물에 하마터면 죽을 뻔 한다. 없으면 좋지만 실제 없으면 살아가는데 위협을 주는 것, 기억을 이러한 것으로 설정해 놓고 있다. 자기모순과 아이러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인물은 모용연(여자)과 모용언(남자)은 일종의 이중인격으로(실제로는 여자), 모용언과 친구가 된 황약사는 그와 술을 마시다가 술김에 남자 인격에게 여자 인격과 결혼하겠다고 이야기 하는 것으로부터 연유한다. 원래 여자인 모용연은 이를 믿었다가 상처를 받게 된다. 이 상처로 인해 깊은 실의에 빠지게 되고, 모용언은 구양봉에게 황약사를 청부하고, 모용연은 구양봉에게 모용언을 청부한다. 이것은 인위의 극치로 바라볼 수 있다. 둘 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지만, 그 내용은 극과 극이다. 한 명의 인물이 극과 극을 달림으로 결국 두가지는 중화되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결국 자가당착이며 따라서 덧없음이다. 더불어 취생몽사와 연관지으면, 이러한 것들은 살아감으로서 인해 생기는 필요악의 아이러니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 인물은 맹수살수로, 그는 30이 되어 눈이 멀게 된 인물이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고 떠도는데, 그 원인은 황약사이다. 황약사는 자신과 친한 친구였으나 자신의 부인과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부인을 떠난다. 믿었던 친구였는데 배신을 당해으니 이 얼마나 허무한가. 그는 떠돌다가 결국 구양봉에게 찾아가게 되며,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를 벌기 위해 무리한 임무를 맡았다가 죽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유는 떠났던 아내를 보기 위해서이며, 그는 그 수단(인위)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다. 맹무살수의 경우에 그 여비를 벌고자 하는 행동은 결국 덧없는 행동이 되며, 더불어 다시 부인에게 돌아가고자 했으므로 부인을 처음에 떠났던 그 행동도 덧없게 된다.
구양봉을 찾아가는 한 여인의 사연은 위의 내용과는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 그녀는 관청의 무사들에게 동생을 잃고 구양봉에게 청부를 하나 구양봉은 돈이 없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며 차라리 몸이라도 팔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기다린다. 여기서 그녀가 몸을 팔아 돈을 마련했다면 이는 인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기다림을 택했고 결국 홍칠공을 만나 달걀하나로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결국 청부 중심하게 다친 홍칠공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파는 듯하다. 여기서 그런 듯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실제 몸을 파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지만 홍칠공이 부인과 완치된 상태로 함께 있는 장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인위의 덧없음을 어떻게 갖다 붙여야 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그 목적에 인위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결국 감독은 그러한 결말을 택한 듯하다. 즉 동생의 죽음에 대한 복수이다. 이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결국 그녀는 목적을 이뤘으나 자신의 신념, 혹은 정절을 잃게 된다. 그녀가 처음에 지키고자 했던 것을 지키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지키고자 했던 것은 덧없는 것이 되었고, 이로 인해 동생의 복수를 한 것 또한 덧없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 진다. 이런 것을 뒷받침하는 장면이 바로 홍칠공이 아내와 웃으며 장난치는 장면이다. 그녀는 몸을 팔고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데, 그 결과로 살아난 홍칠공은 영문도 모르고 그저 행복하다. 이는 그녀의 처지를 부각시키는 효과를 나타낸다.
홍칠공의 경우에도 역시 인위와 덧없음이 등장하는데, 결말은 제일 긍정적이다. 홍칠공은 영웅이 되기 위하여 떠돌아다니는데, 여기서 인위에 해당하는 것은 부인을 내치는 것이다. 그러다가 동생 잃은 여인을 도와주면서 깨달음을 얻어 다시 부인을 데리고 영웅행을 계속하기로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인위적인 것이 개입할 필요가 없음을 또 한가지의 방법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구양봉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게 되며, 과거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포기하게 됐음을 한탄한다. 그는 결국 취생몽사를 마신다. 황약사와의 차이점은 황약사는 실제로 기억들을 잊은 듯 했으나 구양봉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취생몽사는 일종의 상징물로 볼 수 있다. 사실 취생몽사는 그러한 효력이 없으나 황약사는 그 효력을 보았고, 그 때문으로 구양연에게 죽을 뻔 하고 친구인 맹무살수도 몰라보게 된다. 즉 황약사에게는 기억을 잊고자 함이 있었고, 구양봉에게는 없었다. 구양봉은 단순히 술이 마시고 싶어 취생몽사를 마셨던 것이다. 이는 인위의 유무의 차이로 볼 수 있고 더불어 기억을 잃은 황약사 자체가 얼마나 근거없는 것에 기인하는지, 그래서 더 의미가 없는지 이야기 하는 것이다.
동사서독이 인물들이 그야말로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덧없음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보여주는 반면에, 중경삼림은 두 개의 인연이 나오지만 둘은 공간과 시간이 같을 뿐 서로 엮여있지도 않으며, 동사서독에 비하여 덧없음이 그렇게 강조되지도 않는 듯하다. 지금부터는 동경삼림의 인물들을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먼저 형사 하지무를 보면, 그는 이미 한 여자와 5년이나 사귀었다. 5년은 매우 긴 시간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여자친구에게 버림받는다. 여자친구는 그에게 자신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여기서 하지무가 택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저 한달의 기한을 정해놓고, 그 기한에 맞춰진 여자친구가 좋아했던 통조림을 사모으는 것뿐이다. 하지무가 하고 있는 이 행동들은 사실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지만, 하지무 자신에게는 사랑은 유통기한이 있는 통조림과 같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사랑은 유통기한 있는 통조림에 비유된다. 사랑은 그 가치가 무한하지 않기에 덧없으며, 하지무의 행동도 그 가치가 없기에 덧없다.
경찰 633을 통해서도 감독은 사랑의 덧없음을 이야기 한다. 633의 여자친구는 비행승무원이다. 둘은 동거하는 사이이고 633은 비행을 떠나는 여자친구를 배웅한다. 이 사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떠나고 633은 사랑이 비행기의 도착지가 바뀌듯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은 언제든지 기착지를 바꿀 수 있는 비행에 비유된다. 이 둘의 관계는 633이 그녀와 있을 때 집요하리만치 비행기를 가지고 노는 것으로도 비유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무와 마찬가지로 사랑은 덧없으며, 둘 사이에 존재했던 행동, 감정들도 덧없게 되어 버린다.
중경삼림에서 다른 중요한 상징들도 나오지만, 일단 이 사랑의 비유에 대해서만 보기로 하겠다. 사랑이란, 엄청나게 중요하고 일반적인 상징이다. 노자에게 이야기한다면 인위적인 것의 대표적인 것쯤 될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에 어떻게 비유되고 있는가. 결국 끝나버림, 즉 유통기한과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음, 즉 비행의 기착지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랑은 아무리 열렬해도 정말 하찮게 끝날 수 있으며 결국 덧없는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633의 경우에는, 그 사랑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코드가 하나 더 있다. 나중에 사랑하게 되는 아비는, 우연한 기회에 633의 집 키를 손에 넣고 그의 집을 들락거리며 633여자친구의 흔적을 조금씩 지워 나간다. 633은 여자친구랑 헤어진 뒤에 집안에 있는 물건들과 이야기도 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듯 보이지만 어찌 보면 이상하리만치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 바뀌어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이 사랑했던 전 여자친구의 흔적임에도. 결국 나중에 아비와 자신의 집에서 마추질 때쯤 되어서야 간신히 이상함을 느끼게 된다. 이 때가 바로 이전의 사랑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랑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장치로서의 역할도 하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 친밀하게 여겼던 것에 대해서 무감각하다는 것은 그 본질에 대한 의문, 혹은 감정 자체에 대한 의문을 만들게 된다. 즉 덧없음이다.
지금까지 동사서독과 중경삼림의 인물과 사건들에 대해서 살펴보고, 거기에 허무와 덧없음이 무엇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 살펴보았다. 중요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 그 발단은 하찮은 것이며 그 끝도 하찮은 것으로 난다. 이는 영화에서 나타나는 관계와 상징들, 즉 동사서독에서는 말 한마디 안 했다는 이유로 파국으로 치닫는 구양봉과 여인의 사랑, 술김에 말한 한마디로 시작된 황약사와 모용연의 갈등관계, 홍칠공의 달걀한개, 맹무살수의 여비로, 중경삼림에서는 유통기한 있는 통조림과 기착지가 바뀔 수 있는 비행기표, 스쳐지나가는 0.01cm로 나타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 영화는 덧없음에 대한 소재를 비슷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점도 엿보인다. 동사서독에서는, 대부분의 인물들의 결말이 아무런 결실, 혹은 새로운 시작 없이 끝난다. 물론 홍칠공의 경우에는 개중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지만. 반면에 중경삼림에서 네 명의 주인공들은 아픈 상처를 딛고 새로운 사랑은 시작하게 된다. 임청하와 하지무를 보면 그 비유가 약하긴 하지만 임청하가 하지무에게 연락을 함으로써 관계가 새롭게 시작되며, 633과 아비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둘 사이에 있었던 오해, 그려서 줬는데 젖어서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비행기표, 가 풀리면서 앞으로 지속적인 관계가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차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동사서독은 덧없음에 비교적 충실한 반면에, 중경삼림은 덧없음은 존재하나 그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음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결말을 조금만 더 연장해서 생각해 보면, 결국 새로운 시작도 덧없음이라는 테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중경삼림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라, 동사서독 유일의 해피엔드 케릭터라고 할 수 있는 홍칠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포인트는, 과연 중경삼림의 주인공들이 가졌던 이전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었는가라는 물음이다. 이 영화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은 과연 이전에 덧없이 끝나버린 사랑에 비해서 무엇이 다른가? 영화에 나오는 0.01cm는 그렇게 심각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매일 많은 사람들과 그 거리를 지난다. 그런데 영화는 이 거리를 사랑이 시작되는 일종의 징표, 당장은 알지 못하지만, 로 비유한다. 그 거리의 무의미함을 사랑의 무의미함으로 비유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각각의 커플들은 사랑은 시작하지만, 사실 앞에서 끝난 것처럼 허무하게 끝나지 말라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다.
새로운 사랑이라 할지라도, 이전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역시나 사랑이라는 굴레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영화에서 내내 서술했던 사랑의 일반적인 덧없음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동사서독의 홍칠공도 아내와 함께 즐거워하며 사막 너머로 떠나지만 마찬가지이다. 원래 감독이 2,3부를 기획했었다가 취소해 버렸다고 하여 알 수 없는 중경삼림의 커플과는 달리, 동사서독의 특징상 영웅문에 나오는 홍칠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미래를 추측할 수 있다. 홍칠공은 거지문파 개방의 장로가 된다. 내 기억으로 아내는 언급된 적이 없다. 개방이라는 특성상으로 봐도 아내를 가지기 힘들다. 과연 홍칠공 부부에게는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감독은 결국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어떤 것을 인위적으로 하더라도 그 결과는 항상 그에 응하여 나타나지 않으며 오히려 굉장히 하찮은 것, 즉 자연스러움에 의하여 나타나고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다시 이야기해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게 되는 것은 덧없으며, 또한 어떤 목적을 가지는 것조차 덧없음을 말이다.
동사서독과 중경삼림에서 보이는 차이점은 하나가 더 있다. 이미 앞에서 한차례 언급했는데, 동사서독의 인물들이 서로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는데 반하여 중경삼림의 인물들은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할 뿐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덧없음의 속성 한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덧없음은 자신과 깊게 혹은 옅게 관련된 어떠한 복잡한 관계에서도 함께 존재하며 더불어서 자신과 관계없는 같은 시간과 공간에도 마찬가지로 편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덧없음을 굉장히 일반적이고 광활한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왕가위 감독의 이 영화들은 완전히 다른 배경과 인물들을 지니고 있으나 이야기 하고자 하는 본질은 비슷한 것 같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며 동시에 여러가지 속성들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동사서독에서는 좀 더 다양한 인물로 다양한 대상에 대하여 덧없음을 펼쳐내었다면, 물론 사랑이 굉장히 대두되기는 하지만, 중경삼림에서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화두로 두개의 서로 다른 커다란 줄기에 의존하여 주제를 뽑아낸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영화를 비교함으로써, 한가지만 봤다면 놓쳤을 다양한 속성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어서 보다 깊고 즐거운 시간이 된 듯 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 감독의 다른 영화들도 함께 보고 이러한 것들을 발견해 내는 즐거움을 가졌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