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형광등 함부로 발로 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빛나는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라는 안도현의 유명한 시가 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란 내용이다. 폐형광등도 어쩌면 연탄재와 비슷한 존재가 아닐까(녹색소비자연대 관계자들이 폐형광등 분리배출을 촉구하기 위해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모습)
수명이 다한 폐형광등에서 독극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맹독성 물질인 수은이 들어있음에도 발로 밟아 깨버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40W 직관형 형광등의 경우 개당 약 25mg의 수은을 함유하고 있다고. 많은 양이라곤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형광등이 연간 1억7000만개나 소비된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을 경우 해마다 약 3.5~4톤이나 되는 수은이 땅, 하천 등으로 스며들게 된다. 우리 인체에도 심각한 위협을 줄 수도 있다.
2006년 2월 환경부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혈중 수은 농도는 미국이나 독일에 비해 5~8배 높게 나타났다.
수은의 위력은 실로 엄청나다.
형광등 한 개에 들어있는 양으로 토끼 한 마리를 즉사시킬 정도다. 수은 한 스푼 분량을 호수에 버리면 호숫가 전체를 오염시킬 만큼 위험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형광등을 생산자 책임재활용제도(EPR)의 한 품목으로 지정했다. 제품의 설계, 생산 단계부터 폐기물의 발생량을 원천적으로 줄이고 재활용을 확대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제도다. 이를 위해 제품 생산자가 폐기물을 일정량 이상 재활용토록 의무화하고, 이를 이행치 않을 경우 관련 비용을 대도록 만든 것이다.
현재 폐형광등 처리는 한국조명재활용협회(회장 김창권 www.recyclinglamp.org)가 대행하고 있다.
협회는 업체별로 많게는 수억원씩 분담금을 걷어 폐형광등 재활용에 나서고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첫째, 이 형광등이 과연 경제적으로 재활용할 가치가 있느냐다.
물론 수은의 위험성을 고려해볼 땐 반드시 적정 처리하는 게 합당하다. 그러나 폐형광등 재활용은 타이어, 유리병 등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폐형광등 자체를 재활용하는 사업은 돈 되는 일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재활용할수록 돈을 까먹는 구조다.
폐형광등 하나를 처리하는데 드는 비용은 140~200원 정도. 반면 재활용 후 경제성은 고작 1원에 불과하다.
형광등을 둘러싸고 있는 소다유리는 재활용 가치가 사실상 없는데다, 극소량의 수은을 포집하는 일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이 때문에 폐형광등은 재활용품이라기 보단 폐기물로 보는 게 더 합당하단 지적도 있다.
재활용품이냐, 폐기물이냐를 따져보는 이유는 처리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가라는 법리적 해석과도 연관되기 때문이다.
재활용품으로 분류할 경우 처리주체는 생산자인 형광등 제조업체가 된다. 또 폐기물이라고 규정하면 정부가 이를 적절히 처리해야 한다.
이처럼 폐형광등은 폐기물과 재활용품의 교집합 안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들은 분리수거함을 곳곳에 설치, 폐형광등 분리배출을 유도하고 있다. 폐기물을 대량 배출하는 사업장에 대한 관리감독의 의무도 있다.
연면적 1000㎡(약 300평) 이상 또는 하루 300kg이상 폐기물을 배출하는 사업장은 협회에 위탁계약을 체결해 안전하게 처리해야 한다. 한 층에 60평인 5층짜리 건물도 이 규정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셈이다.
이는 2007년 4월 25일 개정된 환경부 지침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이를 위반할 경우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하지만 이를 준수하는 대형사업장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녹색소비자연대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폐형광등을 적절히 처리하는 대형 사업장은 약 1200곳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소 2만여곳 이상이 폐형광등을 종량제 봉투에 넣어 깨버리거나, 폐기물 처리업자에게 넘기고 있는 것이다. 이들 폐기물 처리업자들은 폐형광등을 종량제 봉투에 담아 발로 깨버리거나 불법 소각하고 있다고 협회는 보고 있다.
심지어 사업장을 관리 감독해야할 지자체도 자기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동사무소 등에 분리수거함을 설치하는 정도에 그칠 뿐, 위반사업장을 상대로 법적 제재에 들어간 지자체는 아직 한곳도 없다.
협회 관계자는 “대형건물이나 사업장의 관리인들뿐만 아니라 이를 계도하고 관리해야할 지자체 공무원들조차 아직 폐형광등 적정처리에 대한 인식과 정보가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폐형광등 수거율은 약 20%. 나머지 80%에 해당하는 연간 1억개 이상의 폐형광등은 불법적으로 매립,소각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협회에 폐기물 처리를 위탁한 제조업체들에게도 피해가 돌아가고 있다.
중국 등에서 밀반입되고 있는 형광등이 시장에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형광등에 재활용비용이 부과됐을 리 만무하다.
형광등 한 개에 매겨지는 분담금은 100원선. 가뜩이나 싼 값을 무기로 국내 시장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분담금마저 내지 않고 있으니, 가격경쟁력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몰아내는 형국이 형광등 시장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올해 협회가 환경자원공사로부터 할당받은 폐형광등 처리비율은 22.5%. 폐형광등 100개당 23개 이상을 거둬들여 수은 제거에 나서야 한다. 이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면 협회가 과징금을 물어야할 판국이다. 36개 ‘선량한’ 회원사들이 내는 돈이다.
협회 관계자는 “지자체의 철저한 관리감독과 지도가 절실한 시점”이라며 “무엇보다 사업장 관계자들이 환경에 대한 관심을 더 기울여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연도별 폐형광등 재활용 실적(2304호 8면)
마불(mabul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