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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바티스투타

김종완 |2008.02.17 04:16
조회 81 |추천 3


          

 

      '아르헨티나'라는 국가를 들으면 어떤사람이 떠오르십니까??


제 생각에 2명으로 나뉠거라 생각됩니다.


아르헨티나 축구의 전설 '디에고 마라도나'


부유한 자들의 창녀, 가난한 자들의 성녀 '에비타 페론'


하지만 전 이 둘보다 더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바티골'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입니다.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그의 이야기를 조금만 해볼까요??

 

 

아르헨티나에 있었을때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네 시작을 미비하였으나 네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서의 구절을 연상시키듯 그의 프로시작은 좋지않았습니다.


91-92시즌이 시작하며, 바티는 아르헨티나를 떠나 이탈리아의 피오렌티나로 이적합니다.


언어와 문화등의 적응기간을 거치고 1992년 2월 26일 '유벤투스'전에서의 골을 기점으로 '바티골'의 신화가 시작되었죠...


제노아전(戰) 두골, 포지아전 해트트릭(3골), 올림픽 스타디움(로마)전 두골..그의 거침없는 골폭풍은 계속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티는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고, 팀또한 12위에 그쳤습니다.


다음시즌인 92-93시즌에는 팀이 세리에B로 강등당하기도 합니다. 팬들도, 언론도, 바티가 이적을할거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바티는 팀에 남았고, 93-94시즌 세리에B를 우승, 94-95시즌에 세리에A로 복귀합니다.


복귀한 후 그는 11주 연속골을 터트리면서, 연속골 기록을 30년만에 갈아치우기도 하죠.


여기서부터는 좀 더 간략하게 정리해볼까요?


95-96시즌 팀은 리그 3위, 챔피언스리그 출전, 아탈란타를 격파 '코파 이탈리아', AC밀란의 홈에서 2골을 넣으면 '수퍼 코파'


'코파 이탈리아'는 FA컵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프로와 아마추어가 모두 경기해 우승을 다투는 대회죠.


운이 좋으면 아마추어가 프로를 꺾고 우승할 수도 있습니다.


'수퍼 코파'는 세리에A 우승팀과 코파 이탈리아의 우승팀이 붙어 이탈리아 NO.1을 뽑는 경기입니다.


단, 한경기로 끝나는 이벤트성 경기이며, 간단히 말해 챔피언 결정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96-97시즌 세리에A 100경기 출장, 서포터들에게 동상을 선물받기도 합니다.


또한 이 해는 바티스투타의 귀화설이 쏟아져 나오던 때입니다.

 

" 나 바티스투타는 나의 뿌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귀화하기엔 나의 조국 아르헨티나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포르투갈로 귀화하라는 피오렌티나 시절 절친한 동료 루이코스타의 말에-

 

 

97-98시즌 개막전 해트트릭, 2라운드 2골 등 리그통산 100골을 달성합니다.


98-99시즌 시즌 막판 바티가 1달간 부상을 입으며 팀은 3위로 시즌마감합니다.


99-00시즌 우승을 못하고 결국 AS로마로 이적했습니다.


약9년간 팀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스타플레이어가 우승을 할 수 있는 팀으로 가고싶다며 이적을 택했을 때


피오렌티나의 팬들은 그 누구도 바티스투타를 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앞길에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기도했죠.


00-01시즌 이탈리아의 명문클럽 AS로마로 이적한 바티는 지금도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프란체스코 토티와 함께


꿈에도 그리던 리그 우승컵을 차지합니다. 개인적으론 이 해 20골을 넣기도 했죠.


하지만, 이 해 가장 인상깊은 사건은 바티가 로마의 유니폼을 입고 피오렌티나의 홈구장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는 경기전에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죠.

 

"차라리 지금 부상을 당했으면 한다. 그러면 (피오렌티나와의)경기에 나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피오렌티나의 팬들은 적이 된 바티를 뜨거운 환호로 맞이했고, 바티는 이 날 양팀을 통틀어 유일한 득점을 해내고 맙니다.


골을 넣으면 그 누구보다 좋아하며 포효하곤 했던, 그 열정의 사나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골을 넣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팀의 동료들은 모두가 기뻐했지만, 그는 조용히 눈가를 훔쳤고, 피오렌티나의 팬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피오렌티나의 선수들은 바티를 조용히 안아주었습니다..


그는 잠시 후 가진 선수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나는 이기고 싶었지만 피오렌티나가 패하는것도 원하지 않았다.


경기 내내 이같은 복잡한 심정이 나를 괴롭혔다.


승리해서 기쁘긴하지만, 피오렌티나를 무너뜨린 장본인이 나라는 사실에 너무 가슴이 아플뿐이다."

 


 

다음날 신문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떴습니다.


'그라운드 위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바티스투타..

 

 

바티에 관한 또다른 일화가 있습니다.


2002 한.일 월드컵이 개최될 무렵. 아르헨티나의 경제상황을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보다 부유하던 국가는 '후안 페론'과 '에비타 페론'의 집권기때 남발된 정책으로 인해 수렁에 빠지고 맙니다.


월드컵에 진출했으나, 가난한 국가는 선수들은 머나먼 극동의 나라까지 선수들을 보낼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때, 아르헨티나의 선수들은 자비를 모아 극동으로 날아갑니다.

 

 

"모든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축구가 있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한달만이라도 우리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

-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

 

-2002년 한일 월드컵 출전하기 직전 기자회견에서-

 


 

월드컵당시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 스웨덴, 나이지리아와 함께 F조에 편성됐습니다. 흔히 말하는 죽음의 조...


첫경기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바티는 어려운 골을 성공시키며 팀에게 승리를 안겼습니다.

 

 

두번째 경기인 잉글랜드전에서 그는 골을 넣지 못했고, 팀은 베컴의 페널티킥으로 패배했습니다.


마지막 경기인 스웨덴전..아르헨티나의 선수들은 전력을 다했지만, 결국 1:1로 비기고야 말았습니다.


16강 진출 실패, 예선 탈락..벤치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던 한 선수가 그라운드에 쓰러집니다.


 

현실에 지친 국민들에게 누구보다 큰 힘이 되어주었던 33살의 영웅


그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방송을 지켜보던 아르헨티나의 국민들도 함께 울었겠죠?


 

 

그 후 그는 인터밀란에 1년간 임대 후 카타르에서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맞았습니다.


91년 입단후 2000년 로마로 이적하기까지, 바티는 피오렌티나에서 269경기에 출전하여 168골을 넣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깨지지않은 피오렌티나 최다골이며, 지금도 피렌체(피오렌티나의 연고지)에는 바티동상이 서있습니다.

 

 

P.S 그의 별명이 '바티골'이 된 이유가 궁금하십니까?? 그의 플레이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해설자가 미처 그의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골을 넣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죠...


"바티(스투타 공을 잡았습니다!),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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