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사랑은 얼마면 되나요

코아미즈 ... |2008.02.28 19:45
조회 89 |추천 0

사랑은 얼마면 되나요

 



사촌언니와 형부, 형부의 회사동료, 그 동료의 학교후배.. 그렇게 여러 명을 거쳐 소개팅이 들어왔다. 조건이 어떻든 사람은 일단 만나봐야 안다는 생각이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최고명문 S대 경영학과 출신. 억대 연봉에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 키180에 잘생긴 외모. 부유한 강남 8학군 출신. 성격 활달하고 사회성 좋음. 나와는 4살 차이… 주변에서는 나보다 더 반기며 잘되길 바랬지만, 난 이런 조건이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소개와 여자들이 거쳐갔는지 그리고 눈은 얼마나 까다로운지 연상이 되어 마냥 기대되지 만은 않았다.
만나기 전 전화통화에서 그는 그날 어디에서 오냐고 묻길래 결혼식에 들렀다 온다고 했더니 대뜸, “아 그래서 지금 결혼식에서 식사를 하고 오시겠다? 뭐 전 아무데서나 대충 때우고 갈 테니까 혼자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오십시요.” 라며 삐딱하게 얘기를 한다. 거기까진 생각도 못했던 나는 독단적인 그의 반응이 자꾸 마음에 걸렸지만, 너무 예민하게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편견 없이 만남을 갖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 언제나 처럼 예식장은 너무 멀고 교통은 혼잡했다. 그의 말대로 식장에서 나만 밥을 먹고 가는 게 맘에 걸려 음료수로만 배를 채웠다. 친구들의 늦장으로 소개팅이 임박해서야 파하게 되었고, 난 급하게 모범택시를 잡아타고 서울시내를 질주하여 약속장소로 갔다. 단 5분이 늦어 약속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조금 늦겠다는 그의 전화가 왔다. 천천히 오시라고 하고 숨을 돌렸으나 그는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나서야 카페 문을 열고 나타났다.
늦은 사람의 미안함을 찾아볼 수 없는 태도도 그랬지만, 그는 대부분의 소개팅남이 첫만남에 정장이나 차분한 캐주얼을 입고 오는 것과는 달리 후줄근한 티셔츠에 건빵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마치 담배를 사러 집 앞 가게에 잠깐 나온듯한 너무나 편한 옷차림이었다. 난 기분이 상했지만 그냥 좋게 넘기며 같이 먹으려고 결혼식에서 밥을 안 먹고 왔으니 밥 먹으러 가자고 했더니 시큰둥해 하며 자긴 자다가 나와 배가 별로 안고프니 술이나 마시자는 것이다.
그렇게 근처 주점에 들어가 동동주를 마시면서, 난 긴장감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너무도 능숙한 그의 말솜씨와 여자를 탐색하는 놀라운 기술에 말려들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고분고분하게 대응해 주었다. 왜냐하면 남자들은 여자가 순종적 이여야 좋아하니 소개팅에선 무조건 수동적으로 대해야 한다며 제발 좀 하고 싶은 말 다하지 말라는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부글거리는 속을 참는 내게, “그 직업은 결혼 후 언제까지 직장생활 가능하죠?” “그 나이까지 시집 못간 이유가 뭐죠? 사실 여자나이 30이면 말 다했죠, 근데 걱정 말아요. 난 4살 차이까지는 만나주니깐, 남들처럼 어린것만 밝히지 않고 사람자체를 본다는 거죠.” “종교가 있다면 어느 정도죠? 난 너무 종교에 심취한 사람 싫어요. 그런 사람 처음부터 교제 안 해요”….
마치 선전포고를 하듯 종교를 언급 할 때 급기야 난 ‘그래 이 사람은 정말 아니다. 주선한 사람 생각해서 오늘 하루 예의를 갖추고 들어가자’ 고 마음을 먹고 “제 생각은 다르거든요, 저는 종교가 중요하구요 남자도 내 종교를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라고 말을 했더니 잠시 냉랭한 기운이 흘렀고 그렇게 그날의 자리가 마무리 되었다. 코앞 정류장까지도 데려다 주지 않고 가버리는 그의 뒤통수를 쥐어박고 싶었지만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며.
결과를 궁금해 하는 사촌언니의 전화에 다른 말 다 생략하고 “언니, 1시간 정도 늦었는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어. 게다가 성의 없이 소개팅스럽지 않은 추리닝 분위기 나는 옷을 입고 나왔더라고.” 라고 만 말하고 그래도 나 신경 써줘서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퇴근길 복잡한 버스에서 그에게 전화가 왔다.
“확인할 게 있어서 전화 했습니다. 방금 제가 선배한테 황당한 얘기를 들었는데요, 여태까지 제가 이런 말 들어본 건 처음이거든요. 아니, 내가 그날 추리닝을 입고 나갔습니까? 똑바로 말해보세요!!!”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옆에 있는 사람도 다 들릴 지경이었다.
“여러 사람 거치면서 말이 와전된 것 같은데요, 전 추리닝 입고 나왔다고는 말하지 않았고요, 1시간 늦었는데 미안하다고 말 안 했던 건 얘기했거든요.” 그랬더니
“제가 늦어서 미안한 표정 지은 것 못 봤나요? 그랬으면 됐지 꼭 말로 해야 되요? 그리고 사람이 맘에 안 들면 안 든다고 넘어가면 될 일이지 왜 남의 사회생활까지 문제 있게 합니까? 꼭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말 지어내야 직성이 풀립니까?”
’헉! 이사람, 정말 중증이었다. 성격도 파탄이지만 자기가 날 안 찍어서 내가 분풀이로 말을 지어낸 것으로까지 생각을 하나보다. 게다가 내가 무조건 소리지르고 덤비면 미안하다고 사과할 만만한 여자로 알았나 보다. 안되겠다 할말은 해야겠다.’
“이보세요, 그러니까 지금 저한테 그거 따지려고 전화하신 건가요? 기가 막히네요, 잘 들어갔냐고 전화한 통 없었던 사람이 이런 일엔 부리나케 전화하셨네요. 근데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 저 소개팅 하루 이틀 해본 거 아니거든요. 끝나고 나서 이런저런 말 옮기는 그런 사람도 아니고, 그럴 만큼 한가하지도 않거든요. 그리고 말이죠, 수준 이하의 사람이랑 말도 안 되는 대화에 여력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거든요.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군요.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사실 복잡한 버스만 아니었어도 더 따끔하게 말해줄 수 있었지만, 그날 소개팅에서와는 사뭇 다른 차가운 말투로 그를 무시해버린 것에 일단 맘을 진정시켰다.
난 황당한 그 일을 사촌언니에게 말했고, 그의 미친 행동은 말 많은 주선자들을 통해 또 한바퀴를 돌고 돌았을 것이니, 결과적으로 그는 그가 걱정하는 사회생활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게 된 셈이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난 조건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일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최종 선택될 여자가 과연 누구일지 몰라도 이렇게 내가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학벌도, 인물도, 능력도 사람의 기본적인 소양을 형성해주지 못했던 것을 보니,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겸손함을 배우고, 그 깊이만큼 타인을 배려하는 폭이 넓어지는 이 세상이 새삼 공평하게 느껴진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