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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 황제는 로마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

홍순기 |2008.03.05 20:13
조회 308 |추천 0

 

-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얘기는 수에토니우스가 지어낸 것이다. 이 저술가는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기록했다. - 반덴베르크 Philipp Vandenberg, 독일의 작가

 

역사 속의 인물 중에는 사관(史觀)이나 후대 역사가의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 악인이나 폭군으로 매도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다. 폭군의 대명사처럼 각인되어 있는 네로도 그 중 한 사람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로마 역사에서 최악의 황제는 코모도스 황제를 꼽고 있는데 일반인들은 그를 몰라도 네로 황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네로 황제는 왜 폭군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그 근거는 세 가지를 꼽고 있다.

 

1. 기독교 신자를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2. 로마를 불태웠으며,

3. 어머니와 아내를 죽인 패륜아이기 때문이다.

 

과연 네로는 거처럼 흉악한 폭군이었을까? 정작 로마가 불타고 있을 때 네로는 어디에 있었을까?

 

할리우드 영화 '쿼바디스'에서는 불타는 로마를 내려다보며 악기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정신 이상자 같은 네로를 보여주고 있지만, 역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네로는 로마에 있지도 않았다.

 

(타키투스는 로마 제정시대의 역사가로 호민관 재무관 법무관을 거쳐 아시아주의 총독을 맡았다. 제정을 비판한 사서를 저술하였으며, 주로 저서로는 <역사> <게르마니아> 등이 있다.)

 

역사간인 타키투스(Tacitus)는 로마 대화재가 발생한 지 불과 수년 후에 쓴 책에서 불이 일어난 바로 그 시간에 네로는 화재 현장에서 80킬로미터나 떨어진 별장에머물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쿼바디스'에서 네로 황제는 폭군으로 방탕하고 퇴폐적인 생활을 하면서 신흥종교인 기독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영화의 대성공 이 후 네로가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어김없이 미치광이 변태에다 살인을 즐기는 포악한 황제로 자리잡게 된다.)

 

불이 타는 지옥관은 광경을 신이 나서 바라보기는 커녕 네로는 도시로 급히 달려가서 필사적으로 불길을 잡으려고 애썼다고 한다. 네로 황제가 훌륭한 새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스스로 로마에 불을 질렀다고 하지만, 그가 바와에 가담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보다 더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부분은 이 이야기 가운데서 제일 유명한 대목,

 

즉 불타오르는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탑 위에 올라가서 네로가 바이올린을 켜댔다는 대목이다. 16세기까지 바이올린은 발명되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리어(고대 로마의 수금)나 류트(서양 비파)를 켰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네로는 기독교도를 박해하지 않았다.

 

로마 대화재가 일어난 것은 네로가 황제로 즉위한 지 꼭 10년이 되었을 때였다. 네로는 대화재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로마인들에게 제법 평판이 좋았다. 그러나 로마 대화재 사건 이후 그에 대한 평판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네로가 로마에 궁전을 지으려고 했던 곳이 새로운 궁전 부지와 화재 장소가 일치해 네로의 방화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그럴 듯하게 퍼져갔다. 이런 소문이 빠르게 로마 전역으로 퍼져가자, 네로는 기독교인들이 불을 지른 것이라고 화살을 돌리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역시 확실하지가 않다. 초기 기독교는 아직 민중의 신망을 얻고 있지 못한 종파로 마술을 일삼는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도들은 네로와 로마의 속죄양으로 방화범의 누명을 씌우기에는 안성맞춤의 존재들이었다.

사실 로마 대화재 이후 체포된 방화범들 중에는 광신적인 기독교 극단주의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들이 처형된 이유는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의 안정을 위협한 '방화범'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 로마 이외 어느 곳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박해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즉 기독교 박해는 로마 시내에 거주하는 신자에게만 국한됐고 또 단 한 차례로 끝났다.

 

(당시 네로가 기독교 신자들을 처형한 숫자는 최대 300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는 어떻게 기독교 박해의 원흉으로 남게 된 것일까?

 

로마의 대화재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사실 네로 황제는 엄밀히 말해 기독교 박해와는 관련이 없고 그의 모습은 역사적으로 지나치게 왜곡되어 온 게 사실이다. 네로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바로 원로원 출신의 타키투스는 네로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네로의 왜곡이 시작되었다. 네로는 생전에 전통적인 기득권 층을 무시하고 문화 정치와 친서민 정치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런데 이런 정책이 보수적인 기득권 층인 원로원 계급에게는 눈 밖에 났던 것이다. 게다가 네로는 황제답지 않게 스포츠와 노래 부르기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로마 귀족사회에서는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네로가 포악한 황제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유럽에서 국겨로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기독교신자들을 학살했던 사실은 네로의 평가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네로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던 독일의 작가 반덴베르크는

 

"기독교가 국교로 자리잡은 4세기가 되어서야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들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나서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덮어씌웠다는 이야기도 이때부터 나오게 된 것이다."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불행하게도 거기에 말려들었고, 그것이 오늘날 네로를 기독교 박해의 원흉으로 몰아넣은 계기가 되었다. 후대의 기독교는 초기 순교자들의 삶을 미화하기 위해 역사적 신빙성이 빈약한 야사와 같은 사료들을 기본으로, 로마제국 말기부터 중세를 거쳐 지금까지 네로를 악마처럼 취급해오고 있는 것이다. 

 

http://cafe.naver.com/nazzis/1222 - 왜곡되거나 파묻히거나 승전국에 의해 쓰여진 역사를 조사, 연구하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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