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간수업이 끝나면 한강에 가서 맥주 한캔을 마시면서 사진도 찍고 마냥 걸으려고 했는데 예기지 않게 수업이 늦게 끝나서 가기가 어려워져 영화나 한편 보자는 생각에 비디오가게에 들어가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색, 계'를 골랐다. '시네마'라는 들뢰즈의 저서를 보면 들뢰즈라는 매우 저명한 학자가 그의 철학적 사고를 통해 영화를 보는 과정을 알 수 있다. 어떠한 의식과 사고를 얼마나 광범위하게 가지고 있는지가 사물자체를 보는 인식과 평가 자체도 다양하고, 다채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이라는 것, 그 중에서도 성욕이라는 것을 프로이트는 인간의 제일 첫 번째 충동이자 원동력?과 같은 개념으로 삼는다. 이를 비판하는 실존주의자들은 '생에 대한 욕구'가 이보다 앞선다는 것을 말한다. 죽을 병에 걸렸던 사람으로서 생각한다면 '생에 대한 욕구'가 성욕에 앞선다고 경험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는 것은 '선'에 대한 욕구?아니 바람이다. 욕구라 하면 무언가 부정직한 것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어감이 들기 때문에 바람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고 싶다.
유교와 같은 종교는 문란한 성과같은 문제에 대해 죄의식보다는 수치심을 지니게 하는 종교이고, 기독교의 경우에는 수치심보다는 죄의식을 가지게 하는 종교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계승되어 오면서 여전히 사람들이 되내이는 십계명 중에 하나는 '간음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간음이라는 것이 현대의 한국에서는 일부일처제의 사회이기 때문에 부인 이외의 사람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간음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일부다처제의 사회였기 때문에 한 명의 본처 이외에 첩?과 같은 여성과 성관계를 하는 것은 간음으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context의 문제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무엇이 간음일까? 어려운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성욕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일종의 극복해야 되는 대상으로 본다. 단순히 그 사람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머리깎고 산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다시 산에서 내려오면 그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해탈이나 열반이라고 표현한다면 단순히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러한 사고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닐테니 상당히 도달하기 어려운 의식이다.
양조위라는 배우를 좋아하기 때문에 골라서 무심결에 본 영화가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탕웨이라는 배우도 매력적이었다. 자유로워 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일까? 칸트의 말처럼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맞도록 행동하라'라는 말을 상기한다면 그 보편적 입법의 원리는 무엇일까?
한국의 '민주주의'사회에서는 양조위와 탕웨이의 관계는 간음일 것이다. 허나 구약의 이스라엘로 돌아가 양조위가 탕웨이를 첩으로 삼았다고 하면 이는 간음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에게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허나 사랑이라는 것은 오래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와 같이 표현되는 성경의 말씀을 기억한다. 이는 나에게 어떠한 시대를 넘어서 말씀 그대로 나가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성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나에게 위와 같은 감정들의 총체와 같이 인식된다. 말이 길어졌다. 그럼 이제 수업 들으러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