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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테두리 혹은 사람의 테두리를 따라 긋는 금... <2008 이상문학상 작품집>

백혁현 |2008.03.18 16:35
조회 72 |추천 0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함께 일하는 친구 하나가 내게 절독을 권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이 잘 풀리기 위해서는 책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푸하하하 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 웃고 말았지만 말이 풀씨가 되었는지 그 후로 여러 가지 일이 겹치면서 자의반타의반으로 책을 읽는 일에 소홀하고 말았다. 쓰는 일에는 더더욱...

 

  그런데 읽고 쓰는 습관 또한 술이나 담배와 마찬가지의 중독이었던 것인지, 그 절독의 기간 동안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가지 않아도 될 곳과 하지 않아도 될 일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결정적으로 우울증으로 고생하였고, 마음의 분란으로 힘겨워했다. 나름의 금단증상으로 치부하며 버티기엔 입안의 가시보다도 더욱 성가신 탓에 결국 이렇게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제길, 금서로 인한 금단증상이라니...

 

  그렇게 오래 전에 읽었던 2008년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다시 한번 조심스레 들추었다. 당대의 내노라하는 본격문학판의 작가들을, 그들의 작품들을, 이미 읽은 그것들을 속독하면서 조금씩 책읽기를 예열하는 중이다. 당대의 내노라하는 그들이 읽어내는 동시대를 함께 읽어낼 수 있을까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후미진 곳에서 허기져 있다고 여기는 나를 향하여 그들이 펼쳐 놓은 글의 식탁, 을 향하여 한 발 더 다가선다.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 기억이 있다. 진짜 사랑은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시점부터 시작되는 것 같아, 라는 요지의 말이었던 듯하다. 그렇게 사랑은 객관화되었을 때 보다 진실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의 진창 그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사랑을 바라볼 수 없다고 믿었던 것도 같다.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겼다는 건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지만 청춘에 대해서는 만종과 같다. 사랑을 믿던 한 시기가 끝났으며, 뒤를 돌아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지금 서른다섯이라는 인생의 한낮을 지나고 있다.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이글거리지만 이미 저묾과 어둠을 예비하고 있다. 내 생애의 조도는 여기가 최대치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사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천 수만 가지의 상황들 중 나에게만 딱 적용되는 그 중 하나의 사랑, 이라는 딜레마 아닌 딜레마를 향한 수만 가지의 가설 중 하나에 대한 이야기 즈음... 권여선의 유달리 알콩달콩한 문장을 읽는 재미는 역시 남다르지만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는 어딘지 조금 싱거운 느낌이랄까...

 

  권여선의 「내 정원의 붉은 열매」.

  수상작가가 손수 선정한 자신의 대표적인 단편 소설이다. 지난 세월 어쩌면 나의 첫사랑일런지도 모를 P형에 대한 기억... 무심한 듯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처럼, 그처럼 무심하게 돌이켜 떠올려보는 P형에 대한 기억... 굵은 글씨로 씌여진 소제목을 따라가보는 것도 재미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무심한 사람의 입에서 들었네’ ‘그리고 나도 또한 무심히’ ‘그 말에 귀를 기울였네’

 

  정영문의 「목신의 어떤 오후」.

  정영문을 읽는 일을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한다. 물론 나와는 정반대로 극악하게 그의 글을 따라다니는 무리도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하지만 이번 글은 그의 다른 글들에 비하여 좀더 수월하게 읽힌다. “어쨌든 우리는 일생이 하루로 집약되는 것 같은 하루를, 무척 나른하고 몽롱하고 길게 느껴지는 일생 같은 하루를 보내기를 원했고, 그 결과 소풍을 가기로 결정을 했다...” ‘기괴한 상상’이나 한없이 늘어지는 상념 또는 끈적끈적한 관념을 지레짐작하고 두려워한 것은 그러니까 나의 선입견... “문득 대체로 동물들은 그 형태에 있어 대칭적이거나 대칭을 선호하지만 식물들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들은 대칭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지만 웬만하면 무시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어떤 식물들은 대칭을 참을 수 없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계속해서 옮겨 다녀야 하고, 그래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동물과는 달리, 딴 곳으로 이동할 수 없는 식물이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자유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보여주는 어떤 통찰이 가볍게 읽혀서 좋았다.

 

  하성란의 「그 여름의 수사修辭」.

  열 자로 딱 맞춰서 보내야 하는 전보의 기억... 그렇게 아내와 아이들과는 따로 떨어져 빠리 의상실을 홀로 지키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 돌아가신 할머니를 향하여 들어간 섬과 바캉스로 분주한 주변의 인파들에 대한 기억... 다듬어지고 꾸며지고 그렇게 아름다운 정연함을 보여주는 ‘그 여름의 수사’

 

  김종광의 「서열 정하기 국민투표 - 율려, 낙서공화국1」.

  김종광이라는 작가가 보여주는 허심탄회함이 항상 좋았다. 그가 풀어내는 어느 소읍의 좌충우돌하는 일상도 보기 좋고, 그가 비비꼬는 율려라는 미지의 나라의 이모저모 또한 보기가 좋다. 이번에 그가 보여주는 것은 율려의 유일무이한 문학인 바로 낙서에 대한 이야기... “... 내가 쓴 좋은 글이 독자들한테 가면, 어떤 독자냐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그저 그렇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좋고 나쁨을 판별할 수 없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도저히 뭔 말인지 알 수 없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고, 다양하게 변주될 뿐이라고. 그러니까 좋은 글이란 대체 뭐냔 말이지? 보는 사람 맘 아니냐고?” 그가 흥건하게 풀어내는 문학 혹은 문학판을 향한 일침이 좋다.

 

  윤성희의 「어쩌면」.

  죽어버린 그들이 풀어내는 살아있는 우리들을 향한 넋두리... 살아서는 할 수 없었지만 죽음으로 인하여 가능해진 일들, 혹은 살아서는 알지 못하였지만 죽음으로 인하여 알 수 있게 되 일들, 또는 살아서는 절대 만날 수 없었지만 죽음으로 인하여 만날 수 있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천운영의 「내가 데려다줄게」.

  우중충하고 모던하지만 동화... 현실에서 저지른 과오를 뒤로 한 채 찾아든 시골에서 맞닥뜨리게 된 현실의 이면... “돌아가야 했다.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빨리 늪을 벗어나야 했다. 구애의 손짓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내의 착각이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여자는 사내를 곤경에 빠뜨릴 진창인지도 몰랐다...” 늪의 어두움과 습함에 가려져 바라볼 수 없는 진실, 그렇게 사내는 진실에 당도할 수 있을까...

 

  박형서의 「정류장」.

  아버지의 억지를 통해 시골, 에서도 구석진 그곳 우리집에 세워졌던 정류장... “... 세상엔 실로 무수한 정류장이 있었다. 머물렀던 모든 정류장의 흔적이 내 삶의 여권에 남았지만, 각각의 세세한 인상까지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삶의 곳곳에 세워진 정류장들을 계속해서 거쳐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듯 최초의 정류장, 그곳에 있던 아버지라는 나의 원류를 향하고 있는 지금의 나...

 

  박민규의 「낮잠」.

  치매, 그 저물 무렵의 로맨스... 박민규의 여타의 소설들에서 보여주던 재기발랄함이 조금 자제되어 있는 반면, 노후한 삶에도 그럭저럭 피어나는 로맨스의 여리디 여린 여운이 은근하게 다뤄지고 있다. 한낮 꿈처럼 축약되는 온 생애라는 것이 있다면 어떨 것인가 하는 의문도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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